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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인의 ‘위험성 신화’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광기와 삶 - 송승연]

최근에 개봉한 ‘곤지암’이라는 영화는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다. 이런 영화가 현재에도 상영되는 이유는 아마도 여전히 정신장애인은 ‘위험’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셸 푸코는 저서 "광기의 역사"에서 18세기 후반 광인들을 수용시설로 격리시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수용을 통해 배제시키려고 했던 것이 환상적 양상을 띠고 다시 대중에게 돌아왔다고 언급한다. 21세기 현재 한국에서 ‘곤지암’은 18세기 정신병원 ‘비세트르’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의 이미지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정신장애인은 위험하다’는 이미지는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2017년 3월 경찰청은 정신장애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가정하는 체크리스트 작업을 추진하였으며, 2017년 6월 정신장애인을 정신병원에 강제입원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테이저건(전기충격기)을 써 죽은 사건이 나기도 하였다. 또한 2017년 미국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자가 1000명에 달하였는데 1/4에 해당하는 236명이 정신질환자로 확인되었다. 이에 대해 미국의 풀뿌리 정신건강옹호단체 NAMI의 수석정책자문 론 혼버그는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는 의료응급상황의 경우 911에 전화를 걸어 특별히 훈련된 의료전문가를 동원합니다. 그러나 정신건강 위기상황에는 경찰을 보냅니다.”

그렇다면 정신장애인을 향한 ‘폭력적이다’, ‘잠재적으로 위험하다’와 같은 고정관념, 막연한 두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사람 죽이고 나쁜 짓 해도 정신병 있다고 판별되면 엄청난 감형이 뒤따르죠.” 최근 중증 정신장애인 수용시설 문제점에 대한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정신장애인과 관련된 부정적 인식을 조장하는 사건사고 기사는 우후죽순 쏟아지며, ‘정신병이 있다고 감형해 주지 말라’는 댓글들이 달리는 것은 일상다반사다. 여기서 우리는 좀 더 본질적인 부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던 제도인 '정신착란성 방위'(insanity defense, 정신질환 때문에 범죄라고 판결할 수 없다는 법적 개념)다. 국내에서는 형법 10조(심신장애로 인하여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로 존재한다.

대니얼 맥노튼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1843년 스코틀랜드 급진주의자 대니얼 맥노튼은 영국 총리인 로버트 필을 살해하려다가 착각하여 그의 비서를 총격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맥노튼은 '정신이상의 이유로 무죄'(not guilty by reason of insanity)로 판명되었으며, 정신병원에 구금되었다. 이후 이는 맥노튼 규칙(M’Naghten Rules)으로 성문화되었다. 정신착란성 방위의 근원이 되는 맥노튼 규칙은 범죄를 저지른 정신장애인은 완전한 행위주체자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여기서 모순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정신장애인의 억압과 차별, 학대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문제시되어 왔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등장한 개념이 바로 '회복'(recovery)이다. 회복운동은 정신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촉진하고 강제적인 정신과 치료 반대를 추구한다. 그러나 정신장애인의 ‘완전한 자기결정권’과 정신착란성 방위 개념으로 인한 ‘침해당한 행위주체’는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이다. 이와 관련하여 Pouncey와 Lukens(2010)는 정신착란성 방위는 회복을 위한 중요한 도전과제를 야기한다고 언급한다. 사법정신의학은 일부 범죄자가 처벌보다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이는 정신장애인의 사회적 학대를 최소화하려는 회복 운동의 요구와 일치한다.

그러나 정신장애인의 사회적 잘못(social wrongs)에 대한 책임을 완화하기 위한 근거로 '침해당한 행위주체'(compromised agency)를 사용할 때, 정신장애인은 “자기 자신을 이끌고, 통제하고,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의 회복 경로를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행위주체자라는 회복 운동의 주장을 어기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한다. 근본적으로 이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정신장애인이 완전한 행위주체자로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예시로 2011 노르웨이 총기난사 사건을 볼 수 있다. 2011년 7월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는 노르웨이 오슬로 근처의 정부 건물과 좌파정당 청소년 캠프에서 77명을 총격으로 살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온라인에 올린 1500페이지에 달하는 선언문이 발견되었고, 좌파 문학 비평가, 노벨상 수상자인 홀로코스트 생존자, 기사공작블라드(Vlad the Impaler), 유나바머(Unabomber) 등의 인용문을 찾아냈다. “브레이비크의 행위는 정치적이었는가? 아니면 단지 정신이상 행위인가?” 이 질문은 그의 법적 소송의 중심이 되었다.

초기의 정신과의사 위원회는 그를 편집성 정신분열증이라고 진단했다. 이 평가결과가 발표된 후 브레이비크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많은 희생자들과 가족들은 부당하다고 외쳤다. 노르웨이 언론사에 보낸 긴 편지에서 브레이비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정신병원에 정치활동가를 보내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가학적이고 더 사악하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나쁜 운명이다.” 한편 희생자들 중 56명과 그들의 가족들은 브레이비크가 정신이상이라고 선언되면, 자신의 범죄에 책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라고 불만을 표했다. 그 순간 범죄자뿐만 아니라 피해자, 그리고 대다수 대중은 정신이상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오심에 해당한다는 주장에 수렴했다.

2011년 7월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는 노르웨이 오슬로 근처의 정부 건물과 좌파 정당 청소년 캠프에서 77명을 총격으로 살해했다. (이미지 출처 = Flickr)

결국 두 번째 평가에서 브레이비크는 정상(sane)으로 선언되었다. 정신이상으로 치부하여 그의 범죄의 본질을 외면하려 했던 유혹은 사라졌다. 이처럼 ‘정신착란성 방위’ 개념이 존재하는 순간, 범죄자와 정신장애인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만약 어떠한 질병이 있다면 그 질병을 가진 환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범죄자로 인식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당뇨병이 있었을 때 그는 행동할 수 있으며, 누군가를 죽인다면 그는 질병 유무를 떠나서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정신장애인은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 책임은 사라지며, 치료와 공공안전이라는 명목으로 시민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에도 명분을 주고 당연하다고 여기게 만든다. 정신장애가 없는 많은 사람 중에도 타인이나 자신에게 위험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그러한 치료와 강제입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는 정신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다.

정신장애인의 ‘위험성 신화’는 무엇이 목적인가? 모든 범죄를 예상하고 예방할 수 있다고 믿는가? 만약 그렇다면, 실제로 그게 가능하다면 모든 자유와 책임은 보장되는가? 세상이 좀 더 좋아지는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는 잠재적 범죄자를 찾아내고 판단하는 것은 현실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만약 범죄를 저지르거나 폭력행위를 저지를 것을 정확히 예측한다고 하더라도, 예비 범죄자로 확정되는 순간,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자유가 박탈당하는 것은 동일함을 보여 준다. 위험한 집단이라 판단되는 순간 적법 절차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애초 누군가를 위험하다고 예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신화일 수 있다. 수많은 학자들은 누가 폭력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고 그럴 가능성이 없는지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해 수년간 노력해 왔지만, 우연히 예측된 것보다 더 큰 정확도로 누가 폭력적일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누군가를 함부로 쉽게 범죄자로 낙인 찍을 수 없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라면 더더욱 말이다.

송승연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박사수료. 정신건강사회복지사.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적 운동세력으로 확장되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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