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삶 - 송승연]

정신장애인과 관련된 이탈리아와 일본 이야기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기형도의 시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 일부다. 정신장애인의 억압된 일상은 현존하는 실제이지만,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신장애인의 삶과 관련하여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낸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이탈리아와 일본의 사례다. 이탈리아는 정신병원이 없는 국가로 유명하다. 이탈리아는 과연 어떻게 '모든 정신병원'을 '폐지'할 수 있었을까? 이탈리아도 20세기 후반 정신보건 개혁이 시행되기 전에는 우리나라와 상황이 비슷했다. 1904년 Law36(구 정신보건법)이 제정되었고 모든 주는 정신병원이 1개소 이상 설치되었다. 이때 정신장애인은 사회적 통제대상으로 취급되었고, 이 법제 아래에서 자의입원이 ‘권장’되었지만, 실제로는 ‘강제입원’이 대부분이었다. 이로 인해 정신병원 입원환자 수는 계속 늘어났다.

1960년대 비로소 개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68혁명은 이탈리아에서 공장과 대학뿐만 아니라 정신병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의 정치사회적 혁명은 대중의 의식에서 정신병원에 입원된 환자들을 하층계급 중 가장 보호받지 못한 집단으로 인식시켜 주었으며, 그로 인해 정신장애인에게 연대와 관심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정신보건 개혁운동과 강력한 노동운동이 연대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점차 학생운동과 페미니스트운동 등과 광범위한 연합이 구축되었다. 이탈리아 정신과의사 프랑코 바자리아는 법으로 정신보건 개혁을 완성시켰다. 법안제정 과정에서는 정치적 운동이 크게 작용했다. 급진당이 1904년 제정된 Law36 폐지를 위한 국민투표를 강행했고, 그 국민투표를 피하기 위해 정부가 서둘러 새로운 법을 제정했다. 그것이 바로 1978년 5월 13일 제정된 바자리아법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Law180이다.

이 모든 과정을 종합해 보았을 때,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정신보건 개혁은 일종의 ‘정치’였다고 보인다. 이탈리아의 사회혁명과 동시에 정신보건 체계의 새로운 혁명이 나타난 것은 우연으로 볼 수 없는 관련성이 있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가치’다. 이탈리아의 정신보건 개혁이 정치사회적으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에는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자리아가 정신병원을 폐쇄하고 지역사회 대안을 창출하기 위해 개혁을 한 이유다. 

이탈리아 개혁의 선구자인 바자리아는 정신병원 존재 그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환자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용인하고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래서 정신병원을 폐쇄한 것은 정신장애인의 존엄성과 시민권(법적, 경제적 등)을 복원하기 위함이었다. 중요한 것은 정신질환이 아니라, 질환으로 인한 결과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환자와 전문가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어떠한지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환자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향상된다면 전문가와 상호적인 관계를 가지며 치료에 대한 통제권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신병원 내 관계에서는 환자의 권리가 많은 부분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바자리아는 ‘자유가 진정한 치료’라고 믿었기 때문에 정신보건 개혁을 진행한 것이다.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우라카와에는 '베델의 집'이라는 정신장애인 공동체가 살고 있다. 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각자의 주제를 가지고 동료들과 함께 나누며 지혜를 모은다. (사진 출처 = 참새TV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일본은 또 다른 측면에서 흥미로운 이슈를 던진다.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작은 마을인 우라카와는 ‘베델의 집’이라는 정신장애인 공동체로 알려져 있다. 필자도 베델의 집을 2번 방문한 적이 있다. 베델의 집이 주는 가장 중요한 함의는 정신장애인이 겪고 있는 어려움, 정신의학적 용어로 ‘증상’이라 지칭되는 개념을 새롭게 전환시킨 것에 있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볼 때 ‘문제점’부터 보려는 습관이 있다. 그랬을 때, 문제를 부정적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부정은 사라져야할 존재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베델의 집에서는 ‘증상’을 ‘고생’이라는 프레임으로 재정립한다. 

예를 들어,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고, 그 상황을 반복했을 때, 표면적으로는 악순환의 반복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본질은 자기 스스로 관계의 회복을 위한 방편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이었음이 드러난다. ‘증상’은 문제가 아니다. 사라져야 할, 억압해야 할 부정성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대안 모색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다시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그 과정. 우리는 어쩌면 넘어지는 순간의 스냅사진만 보고 그것을 단순히 문제로 취급했을 수 있다. ‘고생’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인식의 변화를 동시에 가져온다.

또한 중요한 것은 베델의 집의 철학이다. “열심히 하지 않기"는 베델의 집 사무실에 붙여 있던 글귀다. 우리는 늘 무엇이든 열심히 한다. 그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성공이든 실패든 그것은 온전한 나의 책임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과업을 과도하게 열심히 하다 보면 그것 또한 실패로 귀결된다. 뭐든지 즐겨야 한다는 의무는 섹스 중독, 거식증, 쇼핑 중독 같은 잘못으로 이어진다. 일에 대한 열정이 직장에서는 어느 정도 효율적이지만 일정한 한도를 넘어서면 번아웃 신드롬이 된다. 어느 정도 자기관리는 효율적이지만 과도해지면 자기애적 성격장애라는 딱지가 붙는다. ”열심히 하지 않기“라는 베델의 철학은 부정성이다. 삶이 1퍼센트 결함도 없이 완벽할 수 있을까? 그 환상을 깨고, 부정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해체와, 공동체의 복원, 실패로의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일 수 있다고 베델의 집은 이야기한다.

이탈리아와 우라카와 베델의 집 모델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정신병원 병상이 없다는 것이다. 지역사회가 잘 돌아가면 정신병원 입원의 존재가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와 일본의 사례를 완벽한 이상향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는 1978년 모든 정신병원 폐쇄를 명령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실제로 2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려 2000년에 완료되었다. 일본은 여전히 강제입원과 병상 수가 높은 국가 중 하나다. 특정 국가의 모델이 유토피아라고 믿는 것은 왜곡된 환상일 수 있다. “더 나은 쪽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할 필요가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탈리아 혁명가의 문장이다. 정신보건개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6년 이탈리아 학자가 논문에 쓴 글귀다. 이 당시 이탈리아도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도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으며 한 걸음씩 긴 호흡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송승연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 정신보건사회복지사로 현장에 있다가, 지금은 한국 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비당사자 활동가로 당사자운동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적 운동세력으로 확장되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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