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삶 - 송승연]

오늘부터 격주 화요일에 정신장애인 억압과 배제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구조적 맥락을 살피며 그들의 평범한 일상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 '광기와 삶'을 5-6회에 걸쳐 싣습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송승연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정신장애인’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무엇이 떠오르는가? 위험성? 통제불가? 무능? 너무 부정적인 이미지만 나열했는가? 그러나 아마도 이러한 이미지들이 떠올랐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사실 대다수는 정신장애인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미지의 존재’에 대해 우리는 외부에서 형성된 프레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예컨대 뉴스, 신문기사 등의 언론 혹은 영화, 드라마 등의 미디어로 만들어진 어떤 가공의 이미지들 말이다. 이처럼 정신장애인의 부정적 편견은 우리가 직접 겪은 경험이 아니라, 간접 경험으로 만들어진다. 즉, 우리는 직접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정신장애인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보자. 성소수자는 퀴어 퍼레이드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신체장애인은 도로 점거 등의 당사자운동으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신장애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대다수가 여전히 사회에서 배제되어 격리된 공간에 있다. 바로 정신병원에 말이다. 비록 소수가 지역사회에 살고 있더라도, 사회적 억압으로 인해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정신장애인은 물리적 격리와 동시에 사회적 억압에 직면하고 있다. 물론 낙인(stigma)이 형성되는 데 있어 언론과 미디어의 영향이 더 클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접촉조차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한번쯤은 깊게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이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물리적, 공간적 단절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단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는 정신장애인 배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정신장애인을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키는 것은 당연한 ‘과학적 치료’라고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푸코는 ‘지와 권력의 결탁’이라고 표현했다. 18세기에 들어오면서 광인은 사법관에 의한 수감의 대상이 아니라 의사에 의한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 정신의학은 ‘이성’이라는 객관화된 권력을 광인에게 합법적으로 시행하게 되었고, 광인의 처우 방법이 합리적이고 인도적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푸코는 고대의 드러내는 권력(감옥)이 근대로 넘어오면서 윤곽이 애매해져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부드러운 이성적 대리인인 ‘학술적인 지’를 통해서 오히려 철저하게 행사된다고 주장한다. 다르게 말하면 광인이 쇠사슬에서 풀려나서 정신병원에 치료받으면서 ‘언뜻 보면’ 더 나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 권력 체계는 더 단단해졌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이 권력임을 인지하지 못할 때, 억압의 사슬은 더 굵어진다. 명백한 적이 보지 않게 되었다. 물질적 사슬이 관념적 사슬로 대체된 것이다.

자유는 정신장애인도 지역사회의 일부로, 같이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어 준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실제로 필자가 만난 어떤 정신장애인 활동가는 약 10년을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지냈다. 내가 대학과 사회생활로 20대 청춘을 보냈다면, 그녀는 정신병원의 폐쇄적 공간에서 20대 청춘을 보낸 것이다. 10년이란 시간을 통제하는 것은 가시적인 물질적 사슬로 볼 수 있지만, ‘정신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이 덧씌워지는 순간, ‘치료’라는 이름으로 전환되는 순간, 관념적 사슬로 대체되고 우리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스쳐 지나가게 된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유를 억압받으며, 정신병원에 입원이 가능했던 이유는 1995년에 제정된 ‘정신보건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보건법이 제정된 이후 정신장애인 인권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가 제기됐고, 2010년 즈음부터 시민단체, 인권변호사, 정신장애인단체 등이 연대한 사회적 행동으로 2016년 9월 헌법재판소에서 강제입원에 관한 법률인 정신보건법 24조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정신보건법이 20년 만에 정신건강복지법으로 개정되었다. 2017년 6월 개정법이 시행되면서 그 전까지 너무나 쉬웠던 강제 입원은 조금 어려워졌고, 너무나 어려웠던 퇴원은 조금 더 쉬워졌다.

물론 정신건강복지법 시행으로 '탈원화'(deinstitutionalization), 또는 탈시설화가 얼마나 진행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관념적 사슬을 깨기 위해선, 우선 지역사회로 나와야 한다. 자유는 정신장애인도 지역사회의 일부로, 같이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어 준다. 미국의 경우 1960-70년대 예산문제로 탈원화가 진행되었다.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정신장애인에게 드는 비용보다, 지역사회 정신건강서비스 비용이 더 적게 들었기 때문이다. 탈원화에 있어서 이러한 비용편익 관점 또한 중요하다. 지금 우리나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예산이 급격히 늘고 있으며, 이대로 간다면 국가 건강보험재정에도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가치’의 문제다. 마하트마 간디는 “그 사회의 진정한 척도는 가장 취약한 집단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광기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 인권 수준에 대한 리트머스가 검증되는 순간이다. 배제된 곳에 더 배제되어 있는 존재인 정신장애인이 물리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한 조직된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결국 ‘가치’의 회복을 위해서는 탈원화가 필수적으로 이행되어야 하는 당위성이 나온다.

세상은 빠르게 흘러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부와의 단절은 정신장애인을 사회부적응자로 만든다. 이 모든 것을 정신장애인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길 순 없다. 이는 국가와 지역사회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장애인 복지의 문제다. 영화 '설국열차'는 열차 안에서의 삶이 가장 안전하다는 주장에 대해, 기차를 멈추고 문을 열고 나가라고 외쳤다. “오래 닫혀 있어서 벽 같지만, 저건 문이라고.” 나가면 얼어서 죽을 것이라는 경고는 결국 허황된 것이었음이 영화에서 나타난다. 여전히 기차 안에서 지내면서, 죽어가는 삶을 살 것인지, 기차를 멈추고 춥고 배고픈 눈밭에 뛰어내려야 하는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왔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차 밖의 삶은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송승연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 정신보건사회복지사로 현장에 있다가, 지금은 한국 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비당사자 활동가로 당사자운동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적 운동세력으로 확장되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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