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9월 24일(연중 제25주일) 마태 20,1-16

대개의 사람들이 말하는 정당함엔 얼마간의 욕망이 담겨 있다. 사람은 저마다 제 가치관과 신념을 지닌 채 살아가고, 그것이 훼손당할 때 ‘정당한 것’을 찾아 헤매거나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게 된다. 서로 다른 우리가 제각각 외치는 ‘정당함’은 서로의 이해관계에서 빚어지는 욕망들의 부딪힘이란 게 현실 속 체험이다.

사실 그렇다. 상대적 세상에서 제 신념의 절대적 정당성을 외치는 건 실은 제 진정성에 대한 비뚤어진 숭배와 같다. ‘내가 진정으로 말하잖아!’, ‘내 말 좀 들어 보라. 진짜 솔직히 말한다!’ 등등의 외침으로 제각각의 진정성을 담보 삼아 제 자신을 제외한 타인들에게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며 제 정당성을 강퍅하게 주장한다. 이건 너무 천진난만하지 않은가!

신앙은 제 신념에 대한 절대화가 아니라 다른 신념들에 대한 개방성을 배워 나가는 길이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밭에서 일한 일꾼은 제 계산을 절대화했다. 포도밭 주인은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각각의 일꾼들과 상대적인 계약에 충실했다. 이른바 ‘한 데나리온’으로 대변되는 주인의 충실성은 그 누가 되었건 자신 앞에 서 있는 일꾼들을 향한 자비였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의 계산은 이미 ‘한 데나리온’ 너머에 있었다. 그 일꾼은 ‘한 데나리온’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한 게 아니라, 저 혼자의 ‘진정성’을, ‘한 데나리온’ 너머의 제 욕망을 ‘정당성’으로 둔갑시켰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다른 신념들에 대한 개방성은 관념적일 때는 편해도 실천적일 때는 상당히 곤혹스럽기도 하다. 여전히 우리의 욕망들은 살아 꿈틀거리고 있고, 그 욕망을 제거한다는 건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신념이 부딪칠 때, 우린 또다시 서로의 진정성을 정당성으로 내세울 것이다. 어쩌면 답을 찾고자 하는 데서 우리의 정당성은 무너지는 게 아닐까.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건, 어쩌면 첫째도 꼴찌도 없다는 건 아닐까.

아프고 슬프고 안타까워서 서로의 신념이 다르다는 것에 대한 적응을 포기한 채, 제 목소리로 통일시키거나, 잘난 목소리에 순응하는 식으로 답을 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 다름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태초에 하느님은 ‘제 종류대로’ 고유한 가치들의 ‘조화’를 보시고 좋아하셨다. 바벨탑은 그만 지으면 안 될까.....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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