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40년, 은퇴 앞둔 호인수 신부

“우리 성당에서는 구경도 못하는
  중딩 고딩
  청바지 핫팬츠들
  어제 저녁 부평역 지하도를 지나다 보니
  죄다 거기 모여 있더라
  모여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웃으며 서성대기만 하더라“

  호인수, ‘부평역 지하도’

은퇴를 앞둔 사제는 10대가 어렵다. 성당에선 볼 수 없는 중딩, 고딩을 옷 가게, 화장품 가게가 즐비한 부평역 지하상가에서 본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성당에서 점점 젊은이를 볼 수 없어 고민하는 늙어 가는 교회의 마음이 이럴까?

▲ 시집 "목련이 질 때", 호인수, 분도출판사, 2016. (표지 제공 = 분도출판사)

40년 사제생활이 고스란히 담긴 호인수 신부(인천교구)의 시집 “목련이 질 때”가 나왔다. 세 번째 시집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아픔이 묻은 사제의 시면서, 나이가 들면서 변한 세상을 보는 쓸쓸함,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평범한 사람의 시다.

이화여대 박경미 교수는 발문에 “젊은 시절 섬에서 섬으로 옮겨 다니면서 신부님이 만난 사람들은.... 경제성장의 기관차가 폭주하는 동안 영문도 모른 채 뒤로 밀려났거나 묵묵히 살던 대로 살다가 짓밟힌 사람들이다. 실직하여 아낙네들의 벌이에 의존하며 술을 마시는 남편들, 수녀가 되려다가 약을 먹은 순자는 1970년, 80년대에 쓰신 시들의 주인공이다. 그들 머리 위에는 하늘도 무심하게 텅 비어 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신부로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데 대한 아픈 마음을 시에서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고 썼다.

호인수 신부를 만나기 위해 그가 주임신부로 있는 인천 부개동 성당을 찾았다. 성당 입구에는 ‘농민 백남기 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제관 문에는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노란 리본이 붙어 있다.

그는 지난 40년간의 사제생활을 돌아보며 “아쉽고, 부끄럽다”고 했다. 또 높기만 한 “교회의 장벽”에 희망이 없어 보인다고 씁쓸해 했다.

그의 사제생활은 교회의 장벽이 얼마나 높고 단단한지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교회 안에서 주교와 신부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교회의 결정과 그 과정은 베일에 싸여 있다. 그는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주교를 뽑는지라도 알려 주면 좋겠다고 했다. 또 신자 수를 늘리는 것이 하느님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현실에서 희망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내년 말이면 떠난다. 교회는 그런 게 없다. 한번 주교가 되면 계속 한다. 잘만 하면 좋지만, 모든 권력은 썩는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하루 할 때보다 이틀 할 때 더 썩고, 2년보다 20년 뒤에 더 썩는다. 이건 아주 자연적인 것이다. 안 썩으면 성인인데 세상에 성인만 있을까.”

“그래도 가만히 보면 주변에 알려지지 않게 예수님처럼 살려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 사람들이 그나마 희망이다.”

제도교회 시선으로 보면 그의 어떤 행동은 일탈이다. 그의 본당에서는 판공성사 대신 일 년에 한 번 미사 중에 성찰과 반성을 유도하는 방식을 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고해성사가 천주교의 보물이라고 여기지만, “아무리 좋은 보물이어도 내가 싫으면 끝이다. 미주알고주알 말하려니 창피하다는 사람을 배려해 줘야지”라며 개별적인 고백 말고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신자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방식이 좋은지 물어야 하는데, 그런 걸 안 하고, 죄라고 한다.”

“때 아닌 가을홍수 끝에
 하늬바람 매섭게 몰아치는데
 얼어붙은 논에서
 남의 벼 떨어주느라
 주일미사 못했다고
 고해성사 보러온 중늙은 아낙네

 거친 두 손에는
 죄가 묻어 있지 않았다
 대답하라 교회여
 죄란 무엇인가
 (중략)"

 호인수, ‘고해성사’ 중에서

▲ 호인수 신부 ⓒ배선영 기자

이런 일탈(?) 덕분에 그는 주변에서 욕도 많이 먹었다. 40년간 수없이 욕을 먹다 보니 만성이 됐다. 20여 년 전 인천교구 사제들 중심으로 인재양성위원회를 만들어 평신도 양성에 힘쓰자고 했을 때도 그랬다. 인재양성위는 지금까지도 석사, 박사 과정에 있는 평신도에게 등록금을 지원한다.

돈 없어 학교 못가고, 굶는 사람을 돕지 왜 자기가 원해서 공부하겠다는 사람을 돕냐는 원성이 자자했다. “사람을 키워야 하고, 적어도 이런 장학금 받아서 자기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되면, 아닌 사람과 다를 것 아니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또한 평신도가 다양한 분야에서 똑똑해야 신부도 자극받아 더 공부할 것이라는 “불순한 의도”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얼마 전, “딴따라는 사람을 기쁘고 신나게 하는 게 사명인데, 그 대상에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호 신부는 찔렸다고 했다. 당연한 말인데도 새삼스럽게 들렸다. 사제도 딴따라와 마찬가지로 사목의 대상에 예외는 없어야 했다. “왜 이렇게 좋은 사람, 싫은 사람 구별이 정확할까....” 그는 “미안하고 부끄럽다.”

호 신부는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인천 지역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로 통한다. 평신도 신학자가 중심이 된 우리신학연구소, 그리고 교회 안에서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언론을 만들어 보자며 10년간 고민한 결과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도 그와 함께 시작됐다.

100세 시대에 아무리 은퇴한다 해도, 그간 해왔던 일을 생각하면 그의 앞으로가 궁금하다. 꿈을 묻자 쑥스럽게 문익환 목사의 ‘꿈을 비는 마음’이란 시를 말하며, “통일.... 좋은 세상 오는 게 꿈이지”라고 답한다.

시에서도 말에서도 그의 언어는 꾸밈이 없다. 이보다 솔직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날 것이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슬프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
 집들이에 초대를 받아도
 문상이나 문병을 가도
 우르르 대폿집에 몰려가도
 습관처럼 나는 으레 빈손 맨입인데
 사람들은 말한다
 신부가 무슨 돈이 있냐고
 가난은 오늘도 남의 말
 행복은 여전히 멀다"

 호인수, ‘나는 가난하지 않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