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교회로 가는 길 - 호인수]

내가 쓰기로 한 이 꼭지의 주제가 ‘열린 교회’라는 건 첫 번째 원고를 보낸 후에야 알았다. 그만해도 다행이다.

<빛두레>는 작금의 한국교회를 닫힌 교회로 보고 우려를 금치 못한다. 닫힌 교회란 높은 담과 솟을대문을 세워 바깥사람들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거기서 누가 뭘 하는지 알 수 없고 왕래조차 못 하도록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그들만의 교회라는 말이다. 대문을 열고 담을 헐어서 남녀노소, 지위고하의 차별 없이 수천 명이 한데 모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정답게 나누어 먹는 잔치마당이 <빛두레>가 꿈꾸는 교회의 참모습이다.

민주공화국인 우리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이 권력을 한 개인이나 집단이 독점, 남용하는 것을 우리는 독재로 규정한다. 독재 타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나? 민주주의는 그만큼 소중하고 고귀한 가치를 지닌다.

한국 천주교회는 전국을 교구 단위로 나눈 지역 중심의 교회다. 삼권이 분립된 나라에서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지만 교황이 임명하는 교구장은 교구의 절대권자다. 임기도 없다. 그런데 교구장 임명 절차나 과정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어 교회 조직의 최다 구성원이요 유지와 운영의 원동력인 신자들의 의지는 반영될 여지가 없다. 신자들은 그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 믿고 받아들이면 된다.

작은 지역교회인 본당의 사제도 마찬가지다. 사제의 인사는 전적으로 교구장의 뜻에 달려 있다. 사제는 그나마 정해진 임기가 있는데 그 역시 교구장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늘거나 줄 수 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원형의 교회로 달라진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한데 한국교회는 마냥 주저앉아 있는 것만 같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주교나 사제의 인사에 신자들의 여론을 적극적으로 참작 또는 반영할 수는 없을까? 대통령이 임명하는 각료들도 사전에 국민의 대표 기관의 인사청문회라는 검증 과정을 거친다. 총리나 대법원장, 헌재소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비로소 자격이 주어진다. 형식상의 민주주의다.

한국교회에는 그게 없다. 심지어 교구의 사제를 대표하고 실무를 총괄하는 총대리의 임명이나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중차대한 사업의 시행 여부부터 신자들이 모이는 본당을 분할 신설하는 결정까지 사제나 신자들은 철저히 소외된 채 발표된다.

하느님의 뜻은 늘 피라미드의 꼭짓점을 통해 내려온다. ‘민심이 천심’은 남의 얘기일 뿐이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형식조차 갖추어지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교구는 언제부턴가 연중행사인 사제 전체회의에서 찬, 반 토론이 사라졌다.)

피라미드형의 수직적 교계제도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원형의 교회로 달라진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교황이 몇 분씩이나 바뀌고 그 가운데 성인도 나셨다. 한데 한국교회는 마냥 주저앉아 있는 것만 같다. ‘우리들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영영 묻힐 것만 같던 1980년 광주의 발포 명령자도 서서히 밝혀지고 있지 않은가?

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원로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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