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광복 70주년이다. 70이라는 숫자가 주는 이격감(離隔感)이 얼떨떨할 정도다. 벌써 70년이 되다니! 오래 전, 지금은 없어진 <TBC 라디오>의 역사 드라마로 ‘광복 20년’이 있었다. 최희준의 주제가를 비롯하여 김구 선생에게 꼭 "아우님"이라고 호칭하며 자신이 한 살 더 많다는 것을 굳이 강조하던, 노욕에 찌든 이승만의 덜덜 떨리는 목소리도 아직 귀에 쟁쟁한데 그 20년이 어느덧 70년이 되었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70년이 지나도 우리는 1년 중 가장 역사적 의미가 큰 날을 꼽으라 한다면 아직도 여전히 광복절을 꼽는다. 4.19도 있었고 6월 항쟁도 있었지만 모두 광복절의 그늘 속 일이었다. 그만큼 광복절은 우리에게 절실한 역사적 의미로 다가온다.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가 언제 이토록 모질게 이민족에게 당한 적이 있었던가? 고려 때 원나라의 침략을 받았고 조선조에 청나라의 침략을 받았지만 모두 사력을 다해 싸우다 져서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끝났다. 기원전에 한나라가 조선을 정벌하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고 하지만 그 지역이 어디인지조차 불분명한 옛일일 뿐이다. 그에 비하면 일본이 조선을 멸망시키고 통째로 나라를 집어삼킨 것은 총소리 한 방 나지 않은 너무나도 허망한 과정이었다. 그 방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교활하고 야비했고 그 결과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잔혹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조선은 이미 개국 500년이 되어 왕조의 생명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이래 가장 거대한 문화 변동인 서구 문명의 내습이 덮쳤다. 세월마저 바야흐로 제국주의 침략의 세월이었다. 모든 파고가 한꺼번에 몰렸고 거기에 또 다시 교활하고 야비한 이웃을 둔 복이 겹쳐 나라가 망했던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참 집요하게 싸웠다. 모든 제도적 물적 기초를 빼앗긴 상태에서의 싸움이라 초라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3.1운동은 단지 만세운동이었다. 그래도 11년 뒤 인도에서 간디에 의해 이끌어졌던 소금행진에 비하면 훨씬 거대하고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범민족적 저항운동이었다. 옥중의 네루마저 자신의 어린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3.1운동은 조선민족이 단결하여 자유와 독립을 찾으려고 수없이 죽고 일본경찰에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숭고한 독립운동이었다. 너도 조선에서 일어난 이 맹렬한 저항운동에 젊은 여성과 소녀들마저 동참했다는 것을 듣는다면 틀림없이 감동을 받을 것이다"라고 썼다.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수많은 야만적 식민지배와 그 지배에 대한 저항과 비교하더라도 우리의 저항은 결코 미약하지 않았다. 총포와 화약을 조금 먼저 받아들였다고 그 위력을 앞세우고 아시아를 잔인하게 유린한 일본은 결국 미국의 원자폭탄 두 방을 맞고 항복하고 말았다.

▲ 1945년 우리나라가 광복됐을 때 환호하는 국민들.(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비록 타력에 의한 해방이었지만 우리의 눈물나는 염원이 담긴 해방이었다. 그러나 해방은 어떻게 전개되었던가? 우리의 염원은 강대국들의 횡포를 당해낼 수 없었다. 나라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점되었다. 북위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들어서서 김일성을 세웠고 이남은 미군이 들어서서 이승만을 세웠다. 들어선 두 정권은 서로를 허수아비(괴뢰)라고 불렀다. 이렇게 되기 위해 그려 온 해방이 아니었다. 일본은 왕의 목이 잘린 것도 아니고 천황제가 폐지된 것도 아니었다. 악질적인 침략의 벌을 침략자가 받지 않고 그 희생자에 불과했던 우리가 받은 셈이었다. 독일이 받은 분단의 벌은 침략에 따른 벌이었지만 우리는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 했는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수치스런 전후처리였다.

그때부터 발 들여 놓기 시작한 미군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냉전이 종식된 뒤 국력이 증대하고 있는 중국을 상대로 새로운 패권 쟁탈의 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한편 민족문제는 어떻게 되었는가? 세계적인 탈냉전 추세에 맞추어 노태우 정부 이래 20년간 일관되게 추구되어 오던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은 이명박 정부에 의해 폐기된 이래 8년째 반공시대의 대결 국면으로 되돌아가 있다.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광복 이후 우리가 본의에 반하여 봉착한 분단을 생각한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우선된 과제는 당연히 분단의 극복이 될 것이다. 우리와 똑같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분단이 되었던 독일은 이미 분단을 극복하고 재통일을 달성한지 25년이 되었다. 못난 우리만 아직도 분단이 된 채 북쪽을 비난하고 헐뜯고 비하하는 데에서 자기만족을 구하고 있다. 이런 꼬락서니를 보는 일본, 중국, 미국은 한국을 제대로 된 나라 취급도 하지 않고 있다. 가련하고 못난 놈 취급을 한들 무어라고 할 것인가? 우리가 성숙한 나라로서의 행동을 보여 주지 못해서 얻은 자업자득의 인식을 어떻게 바꾸어 달라고 요구할 것인가?

세월은 살 같이 흘러 마치 광복 70년이 순식간에 오듯 광복 100년, 150년도 순식간에 올 것이다. 그 100년 150년이 왔을 때 돌아보면 그 사이에 우리가 어떻게 먹고 살아왔던가 하는 것은 의외로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죽음을 앞두고 돌이켜 볼 때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 잘 살아왔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올바른 자세로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듯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결국 광복의 그 날에 꿈꾸던 조국의 모습을 어떻게 구현했는가, 특히 타의에 의해 분단된 현실을 독일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재통일시켰듯이 가련한 한반도는 어떻게 하였는가가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무어라 하든 노태우 정부가 세운 남북 화해 협력이라는 기본 방침을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 현실적으로 구현하고 개성공단 사업이며 금강산 관광 사업 등 가시적 성과를 보였다는 것은 광복 이후 최대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긴 안목에서 보았을 때 경제성장과 남북관계의 개선이 가지는 민족사적 의미는 후자 쪽에 훨씬 더 궁극적 비중이 있다. 경제 성장이 없었더라면 남북관계의 개선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논리에는 동의하지만 만약 남북관계의 개선이 없었더라면 경제성장은 그 자체로서는 마치 암꽃이 피지 않는 호박 넝쿨의 무성함처럼 무의미했을 것이다.

이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이명박 정부는 아무 이유 없이 포기했고 파괴했다. 이명박은 대통령 취임도 하기 전, 당선 첫 정책 발표로 통일부 폐지를 선언했다. 야당의 거센 반발로 통일부는 존치되었지만 내내 있으나마나 한 부처였고 이후 대북관계는 철저히 적대정책으로 일관되었다. 금강산 관광 사업은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즉각 중단되었고 남북관계에 대한 기대감을 완전히 잃은 북측이 천안함 사건을 도발한 이후 모든 국면은 20년 전의 냉전구도로 되돌려졌다.

남북 화해 협력은 우리가 일제 36년의 잔혹하고 치욕적인 지배를 받으며 그려 오던 광복의 꿈이 지난 70년간 지향해 왔고 또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향해 나가야 할 목표다. 그리고 그것이 현시점에서의 진정한 광복이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없이는 이 땅에 진정한 광복은 없다. 민족문제는 이제 더 이상 남과 북 간의 관계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 지향을 잃으면 남이든 북이든 그 내부의 모든 지향이 벽에 부딪치도록 되어 있는 이 구조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결코 통일부만의 과제가 아니다. 이 사업이 길을 열지 않는 한 경제도 외교도 교육도 문화도 정치도 민주주의도 더 이상 풀려나가지 않을 것이다. 신비하다고나 해야 할 연관성이 그 모든 것들 사이에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했지만 암담하게도 이 땅에 회복된 빛은 보이지 않는다. 가로막힌 장벽, 전 세계가 이미 떨쳐낸 지 오래 된 허망한 대결구도만 삼엄하게 남아 있다. 이 깊고 오랜 정체가 풀려 모든 분야가 탁 트인 전망을 향해 시원하게 질주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그 옛날 광복의 꿈에 젖어 노심초사하던 선현들의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이수태
연세대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받은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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