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해외에 나가 국적을 밝혀야 할 일이 생기면 우리는 어김없이 South Korea 사람이 된다. 요즘은 남북 간의 국력이 크게 차이 나고 북한 사람이 해외에 나가는 경우가 워낙 적다 보니 그냥 Korea만으로 통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외국인들의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인 인상은 여전히 분단국의 사람이다.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경제규모가 세계 십 몇 위를 기록하고 있고 OECD에 가입해 있으며 한류의 본고장이라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철지난 88올림픽까지 들먹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그 모든 정보를 능가하며 그들의 의식을 강력히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역시 the Korean War와 늘상 깨지는 소리가 나오는 분단국의 이미지다.

세계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 외국인을 떠나 우리나라를 가까이 경험하면서 비교적 사정을 잘 아는 외국의 주요 정치인들은 어떨까? 이를테면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그의 각료들,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공산당 고위 간부들, 일본의 아베 총리와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그동안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한 수많은 나라의 지도자들. 그들은 어떨까? 내가 볼 때 그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심지어 남북 간의 티격태격하는 꼬락서니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그에 따라 훨씬 더 구체적인 인상도 가질 텐데 그 인상이라는 것이 대개 한심함 반, 연민 반이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남들이 우리나라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끄럽고 모멸적인 주변국의 인식을 어떻게 하면 만족스럽고 우리의 자존심에 상응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그런 주변국들의 부정적 인식을 정면으로 치고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남북 간의 대결구도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 가는 것이다. 지난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정상회담과 공동선언은 그런 점에서 세계인들이 보기에 괄목할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그동안 '가련한 놈' 보듯 해 온 미국과 중국과 일본의 눈을 휘둥그렇게 했고 그런 극적 전환은 김대중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한 오슬로의 시각에서 단적으로 표출되었다.

▲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김정일 남북한 정상이 남 북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사진 출처 = <한겨레 TV>가 2011년 게시한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바로 그것이다. 이웃집 사람을 붙잡고 내 동생이 어떻고 내 애비가 어떻고 욕을 하며 그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줄줄이 늘어놓는다면 이웃집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듣는 앞에서는 무어라고 위로도 하고 네가 옳다고 맞장구를 치겠지만 돌아서서는 "에라, 이 한심한 놈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남북 간에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 가는 것만이 우리나라 미래를 열어 가는 결정적인 방향이라고 천명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전전 정부인 노태우 대통령 당시에 천명한 것이었고 그것은 민족사의 위대한 전환이었다. 그 점에서 나는 노태우 대통령이 신군부 폭거의 주역이었다는 용서할 수 없는 죄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 방침을 천명한 당시의 관료들에게 감사한다. 그것은 남북 정상회담을 과감히 추진했던 김영삼 대통령에게 계승되었고 결국 김대중 대통령에 와서 찬란한 빛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핵개발이라는 골머리 아픈 악재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노무현 대통령에게까지 이어졌다. 화해와 협력의 느티나무는 20년의 연륜을 안고 푸르게 푸르게 자라났던 것이다. 만약 두 번째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이 차질 없이 추진되었더라면 해주공단은 물론 다양한 경제협력사업이 추진되어 지금은 부산에서 출발한 열차가 평양을 거쳐 북경이나 모스크바를 향해 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도 우리를 단지 분단국가라는 사실만으로 '극동의 한심하고 딱한 존재'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만만치 않은, 저력의 나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에서 역사의 방향을 틀고 수령 20년의 느티나무를 우지끈 부러뜨린 이명박 대통령의 어처구니없는 판단을 통탄해 마지않는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방향전환이었다. 역사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판단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천안함 사태니 연평도 포격이니 하는 것을 들고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이명박이 야기한 남북관계 단절의 비극적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었다. 권력은 종종 그 선후 관계를 뒤집어 국민의 인식을 오도해 왔다.

한심한 것은 박근혜 정부도 이 정책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들은 드레스덴 선언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선언인지 잘 모르고 있다. 외국의 낯선 지명이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적대정책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드레스덴 선언이다. 단지 이명박은 내놓고 대북 적대정책을 밀고 나갔고 박근혜는 마치 전향적인 무언가를 추구라도 하는 양 속이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문제는 꼬박 8년째 이어지고 있는 이 대북정책이 나라를 거의 30년 전의 구도로 되돌려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심하고 가련한 나라'라는 인식이 오바마에게도, 시진핑에게도, 아베에게도 고스란히 자리 잡혀 있다. 그것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한국이 그녀의 한복 빛깔 만큼이나 휘황찬란하게 여겨지고 있을 것 같은가? 제발 제 정신을 좀 차렸으면 한다. 오죽하면 죽음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병석의 김대중 대통령이 이명박에 의해 파탄되는 남북관계를 보고 "원통하다"고 절규했을까?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의 인식과 없는 사람의 인식이 이처럼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한국을 비천한 나라로 여기고 있는 주변국들의 인식은 도처에서 확인되고 있다. 일본은 내놓고 한국을 무시하고 있다. 그 무시에는 미국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는 계산이 뒷받침되어 있다. 미국의 오바마는 박근혜 대통령을 바로 앞에 세워 놓고 "poor president"라고 말했다. 그것은 답변을 못하고 버벅거리는 대통령에 대한 무심한 유머였지만 내가 볼 때 그것은 미국 정치 지도자들의 명백한 poor Korea 인식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민감한 군사적 문제를 두고 행한 최근의 시진핑이나 러셀 미 차관의 발언을 보면 한국은 아예 발바닥의 때만큼도 여겨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분단되어 소모적 갈등에만 싸여 있는 나라가 주변으로부터 어떻게 여겨지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국제적 환경을 보면 모든 것이 과거와 다르다. 중국의 팽창은 동아시아의 판도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가장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단연 일본이다. 일본은 이른바 평화헌법 체제에서 벗어나 강력한 국방력을 갖추려 하며 그것을 미국과의 동맹 강화로 추진하려 한다. 미국도 중국의 팽창에 공연히 위축되어 일본과 손잡는 것이 일단은 최선의 방법이라 여기고 있다. 핵심은 일본의 불안이다. 유사 이래 한 번도 외침을 당해보지 않은 나라가 왜 불안해 할까? 그들이 저지른 지난날의 패악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의 핏속에 잠재해 있는 뿌리 깊은 침략근성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본의 그 불안에 동조하거나 편승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유사 이래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중국을 문화적으로 존중하기 시작한 당대 이래 그들도 우리를 침략하지 않았다. 있다면 몽고족이나 만주족이 중국을 유린하면서 새로운 패권 인정을 요구했을 때뿐이었고 그나마 군신관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향후 중국은 어떤 상황에서도 미국과의 대결 관계 속에서 한국의 지지와 동조를 원하는 이상의 무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는 지정학적 관계로 보더라도 주변국과 원만하게 지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 적이 있다. 옳은 지적이라고 본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구체적인 적대 행위를 하기 전에는 그들과도 협력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미국을 끼워 넣는 군사적 동맹은 곤란하다. 이미 한미일 군사정보 협력체계를 구축한 것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한미군사동맹은 그동안 해 오던 것이니까 그렇다 하더라고 일본이 낀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사드는 중국을 공개적으로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하느냐가 아니다. 우리는 중국과도 일본과도 잘 지낼 필요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처럼 일본과는 얼굴도 마주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만나 악수하고 이야기하더라도 우리가 일본의 군사적 팽창을 찬성하지 않고 군사협력 관계를 맺을 의향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만 당당히 얘기하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그 정체성은 현재로서는 앞에서 이야기한 바 남북관계에서 온다. 남과 북이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강력히 그려 나가는 데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확립된다. 마치 자전거가 달리는 힘에 의해 옆으로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단지 움직이지 않고 선 자리에서 균형만 찾으려다가는 결국 넘어지고 만다. 중심성은 달리는 힘에서 오며 그것은 남북관계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탈북자들 모아 놓고 밤낮 북한 흉만 보는 안이한 여건에서는 그런 힘이 형성될 수 없다. 중국도 일본도 눈이 휘둥그레질 강한 정체성은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우리가 힘찬 소용돌이를 형성할 때 함께 형성된다.

남북관계 개선에 대해서는 입을 꼭 다물고 행여 입을 벙긋 했다가는 종북 공격이라도 당할까 눈치를 보는 야당, 통합진보당이 백주에 습격당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닐 부(否)자 한 자만 내놓고  멀뚱멀뚱 구경만 한 야당이 분열에 이르고 선거에서도 참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야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데에서 분열이 왔기 때문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북한을 고립시키고 야당을 멍청이로 만들고 집요한 우민화 끝에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이겼다고 희희낙락하는 중에 나라는 소리 소문 없이 정체성을 잃고 중국과 미일동맹 사이에서 좌면우고하는 중에 결국 추동력을 잃은 자전거처럼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지 않는가?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에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기로 한 이 맹목적 정권 3년차에 그래도 실낱같은 기대를 걸어 본다. 남북 교류를 회복하라.
 

 
 

이수태
연세대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받은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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