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셨다. 아니, 그보다는 어머니이신 교회를 상징하는 교황님께서 아파서 신음하는, 불신과 실망으로 지친 세상을 대표하는 우리 땅을 몸소 찾아오신 것이다.

미국 가톨릭 신문인 NCR(National Catholic Reporter)는 내게 인터뷰를 청하며 교황님이 가셔서 만나게 될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하고 물었다.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세월호로 아파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고, 거리의 미사가 생각났다. 교황님은 어떤 교회를 만나실까? 그건 여전히 신학적인 물음이 된다. 교황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고 묻고 싶었다. 그분이 교회를 무어라고 규정하는가에 따라, 한국의 교회는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다른 어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다양하다. 굳이 나누자면, 사회정의에 관심을 갖고 사회변화에 참여하는 그룹과, 교회 내에서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한 그룹이 되겠다. 사실 사회참여 그룹도 결국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것이니까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교황님의 방문이 우리에게 뜻하는 것이 무얼까 하는 질문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한국을 방문하실 때, 특히 성체대회 때, 아주 가까이 다가가 그분을 뵙는 행운을 얻었다. 한국의 젊은이를 대표해서 선물과 꽃을 건네 드리려고 다가갔는데, 자비로운 미소 앞에 나의 부족함이 자꾸 떠오르며 다가가기 미안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중에 하느님께 돌아갈 때도, 하느님은 자비롭게 나를 맞아주셔도, 내가 잘못 산 게 죄송해서 다가가지 못하겠구나 하고.

그런데 내 삶을 돌아보면, 내겐 분명 성사 같았던 누군가의 방문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직도 진하게 마음으로 울리는 방문은 성체대회 때 오셨던 브라질의 대주교이신 동 에우데르 카마라(돔 헬더 까마라)다. 아주 작고 왜소하신 그분이, 거리의 배고픈 소녀에게서 하느님의 빵을 생각한다던 그분의 말씀이 아직도 내 맘에 쟁쟁하다. 그분은 너무 크시고 나는 너무 초라한 신문기자로 그 자리에 들어갔다가 온몸이 얼어붙는 전율에 그분이 떠나신 그 방에 한참을 서있었다. 똑똑하다는 다른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그분의 삶과 영성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나는 그냥 얼음이 되어서 그분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한 번은 시애틀에서 있었던 종교간 대화 포럼이었는데, 투투 대주교님과 달라이 라마 두 분의 방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의아한데, 어떻게 수천의 사람이 그렇게 편안하고 평화스럽게 하나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냥 워싱턴 주립대학의 체육관이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거기에 갔다. 두 분의 소탈한 웃음과 편안한 이야기에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인간애를 회복해 갔다. 참 신비로웠다. 어떻게 한 순간의 현존이 사람들 마음의 결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거룩함이란 것이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공명이며 사랑임을 교황님이 세월호로 자녀를 잃은 부모님들을 안아 주시고 거리에서 사람들과 인사하시고 했다는 기사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 지난 16일 봉헌된 124위 순교자 시복 미사 중 공개된 김형주(이멜다) 화백의 작품. ‘새벽 빛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작품에 순교자 124위의 모습 전체를 담았다. ⓒ교황방한위원회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서 빛을 다시 찾은 광복절이다. 우리나라의 수호성인이 성모님인 것과 무관하지 않게, 해방을 기념하는 이날, 우리는 성모님이 하늘에 오르심을 기념하는 것이다. 어릴 때 나는 신정(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성당에 가야 하고, 광복절(성모 승천 대축일)에도 성당에 가야 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그리고 성모님은 우리나라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 성모님은 고통 받는 모든 민족을 사랑하신다. 그분의 생이 그러하셨기에 말이다.

성서에서 하늘에 오른 사람들이 나온다. 구약성서에는 에녹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 하늘에 불러올려졌다고 이야기하고, 엘리야는 불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랐다.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따라간 사람들이 하늘에 오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신약성서에는 루카 복음이 예수님의 승천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예수님의 승천 장면이다. 넋을 놓고 하늘을 보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다가와, 왜 그렇게 하늘만 보고 있느냐고 하신다. 승천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땅 위에 있음을 이르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앙의 모범으로서 성모님의 승천을 믿는다.

성모님이 하늘로 오르심은 우리에게 더욱 지극한 마음으로 땅을 섬기라는 가르침이다. 그렇게 우리는 교회를 받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124위 시복식이 성모 승천 대축일에 이뤄지길 소망했다. 그러나 성모님의 뒤를 지극한 마음으로 따라가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그 다음날 복자로 올려드림도 의미 있는 것 같다.

특히 이번 복자들은 역사적으로 우리 신앙의 조상들이기에 더욱 감사하다. 주문모 신부님은 중국분으로 한국에 오셔서 우리말을 배워가면서 사목활동을 하시다 처형되었다. 난을 피해 피신하시다가 양들과 함께 생을 마치시려고 다시 돌아오신 분이시다.

더욱이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강완숙 골룸바도 계신다. 이분은 주문모 신부님을 도와 신자공동체를 이끄신 여성지도자다. 왠지 사도행전에 나오는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를 연상시킨다. 박해의 와중에, 언어가 안 되는 중국인 신부님을 모시고 공동체를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분들은 하늘로 오르신 성모님처럼, 철저히 고통 속에서 진실을 따라가신 분들이다.

교황님이 바쁜 일정 속에서도, 가장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몸이 불편한 자식을 데리고 온 엄마와 그 자녀를 축복해 주시고, 가시는 곳마다 “희망하라”고 이야기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 자랑스러운 124위 복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진리에 충실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의 아픔을 인정하고,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는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나는 일진이 되어 나서지는 못하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세월호의 진실에 대해, 그로 인해 아픔을 겪은 우리 민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도한다.

한 가지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것은, 지난 여름 우리 수녀원에서 있었던 기도 나눔 이야기다. 거기 모인 수녀님들 다섯 명이 우연히 우리 창설자 수녀님이 복녀가 되시고, 그 유해를 수녀원에서 그분의 본당으로 옮기던 이야기를, 수도생활 중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라며 들려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를 잊을 수 없는데, “그분은 우리의 창설자이기에 앞서 캐나다가 사랑하는 캐나다의 성인이더라”라는 한 수녀님의 나눔이었다.

성인(聖人)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우리 124위 순교 복자의 개성을 찾아주고 싶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한국이 사랑하는 한국의 복자들이니 말이다. 나는 깊은 지식이 없지만, 기회가 닿는 대로 124분의 삶을 하나하나 맛보며 공부해 가고 싶다. 우리 선조, 우리 성인, 이 나라에 큰 빛 되소서!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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