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이번 주말에 나는 수녀님들과 피정 지도를 하면서 보냈다. 수녀님들 중에는 내 영적 지도 수녀님도 계시고, 내 교수 수녀님도 계시고, 내 영어를 도와주시는 수녀님도 계셨다. 이제는 팔순을 훨씬 넘긴 그분들을 보며 ‘내가 준비해 온 작업들을 할 수 있을까’하는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너무 늙어버린 수녀님들 앞에서 내 마음은 타들어가고 무거워졌다. 저녁을 먹고 홀로 바닷가를 걸으면서 그분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릴 수 있도록 아주 간단한 프로그램으로 바꿔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다시 준비를 했다.

아침이 되어 수녀님들과 간단한 인사를 하고 부드러운 몸 기도로 인도했다. 그러면서 계속 하느님께 ‘부드러운 영을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늘 젊은 학생들과 생활하는 내 영이 이분들께 너무 거칠게 느껴지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들어, 아기 손바닥 같은 당신의 부드러운 영으로 이분들의 영혼을 감싸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체력이 되는 한에서만 따라하시고 혼자 쉬고 싶으면 쉬셔도 된다고 이야기를 드린 후, 아주 천천히 피정을 진행했다. 다리가 아프시지는 않을까하는 나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성실하게 일해 온 수녀님들은 끝까지 열심히 따라하셨다.

ⓒ박홍기
그렇게 조용한 하루를 지내고 마지막 묵상 나눔 시간이 되었다. 본원을 내주고 도시 한가운데 있는 아주 조그만 휴양소로 옮긴 우리 수녀님들이 힘드시리라고는 생각했지만, 늘 평화롭게 미소를 짓는 모습에 잘 지내신다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묵상 나눔을 하는 데, 나에게 영적지도를 해 주시는 수녀님이 처음으로 입을 떼셨다. “30년 살던 수녀원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옮기고 익숙해진 관계들을 내려놓으면서, 내 자아가 깨어져 나가는 것 같이 아팠어요”라는 그 분의 고백에 우리의 정체성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가는 것임을 절감했다. 또 한 수녀님은 알코올중독이었었는데, “내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이 주시는 현재에 충실하려고 노력해요. 하지만 오늘 성공하지 못해도 또 다시 지금을 사는 훈련을 할 수 있는 거니까, 희망이 있지요”하고 나누어 주셨다. 너무나도 정직한 그 나눔 앞에 마음이 먹먹해 졌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 하느님 안에서 나는 무엇을 잃게 될까를 묵상해요.”

그런데 나에게 가장 감동적으로 다가온 나눔은 이번에 90세가 되신 헬렌 수녀님의 말씀이었다. 수녀님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 하느님 안에서 나는 무엇을 잃게 될까를 묵상해요. 매일 매일 시력을 잃어가고, 청력을 잃어가고, 기억도 잃어가지요. 젊은 때는 오늘 하느님 안에서 나는 무엇을 얻게 될까를 묵상했지요. 그분은 사랑이시기에 잃어버린 것을 발견하는 것도 사랑을 얻는 방법이지요.”

아!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것도 제대로 묵상하지 못한다. 영혼의 무딤 때문에. 더구나 우리는 잃게 되는 것이 무엇일지를 감히 묵상하지 못한다. 영혼의 두려움 때문에. 그런데 지금 이 수녀님은 그 잃어버림의 은총을 이야기하고 계셨다. 나는 이분들의 겸허한 늙음에 관한 묵상 앞에 무릎을 꿇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분들의 얼굴에 깊이 패인 주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경건하게 바라보고 싶어졌다. 그 수녀님이 수줍게 웃으면서 손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쭈글쭈글한 손가락에 끼어진 서원반지가 곱다고 생각했다. 잃어 가는 것들도 하느님의 사랑 앞에 덤덤히 내려놓은 노 수도자의 단순한 삶을 보며 잘 내려놓은 노년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생각했다. 피정을 마치고 혼자 바닷가를 걸으면서, 만약 오래 살게 된다면 하나하나 잃어버리는 것을 꼼꼼히 챙기고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상실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다가 우리 민족이 겪는 상실의 아픔이 떠올랐다. 이번 세월호 소식을 듣고, 이상한 일은 하루하루 그 아픔이 옅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더 진해져 가는 것이다. 슬픔과 아픔이 내 세포 속으로 깊이깊이 걸어 들어오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가 함께 겪는 이 아픔은 조금씩 잃어가고 비워가는 아름다운 상실이 아니다.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잃어버렸음을 보여주는 반증이고 충격이며 고통이다.

피정을 마치는 식탁에서 우리나라가 많이 아프다고 이야기하니, 북한이 아니라 왜 남한이 아픈 나라냐고 묻는다. 북한은 이상한 이데올로기로 아프지만, 남한은 자본주의 때문에 영혼이 아픈 나라라고 하니 선량한 수녀님들이 그만 어쩔 줄 모르신다. 그래서 그냥 우리의 민족혼이 눈을 번쩍 뜰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만 했다.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 하나하나 헤아리고, 슬퍼해야 한다

태평양 바닷가에서 선량한 할머니 수녀님들이 좋은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는 분명 한반도에 사는 착하고 슬픈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리라 믿고 희망한다. 언제나 악은 아주 섬세하고 영묘하다. 슬픔 속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그렇게 한꺼번에 잃고 우리 민족이 사랑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그들의 희생이 안타까운 것이 되기에 침착하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잃은 것, 아니 그동안 우리가 잃어 온 것은 과연 무엇일까를 헤아려야 한다.

▲ 지난달 안산 와동일치의모후성당에서 신자들이 세월호 사고 희생자와 실종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한수진 기자

나는 이번 부활 성야미사에 가지 못한 채, 단발마적인 아픔 속에 암과 투병하는 내 친구 줄리아 수녀와 연대하는 의미로 방에 남아 촛불을 켜고 빛으로 다가오시는 부활하신 예수, 사랑의 신을 묵상했다. 그리고 대신 아침 일찍 부활 미사를 갔다. 친구의 죽어가는 모습과 우리나라의 아픔으로 부활이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미사에서 신부님은 우리의 일상이나 세상의 돌아가는 일들을 보면 아직 부활은 멀고 부활을 기쁘게 외칠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가 이렇게 기쁘게 부활을 외치는 것은 부활이 우리의 근본적인 희망이며 사랑이 악을 이긴다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이야기 하셨다. 정말 공감했다. 우리는 아직 부활하지 않았다. 그리고 섣부르게 부활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죽음에 깊이 묻혀야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미루어 놓은 것들을 하나하나 다 세고, 슬퍼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를 미워하는 것으로는 이 슬픔과 상실을 승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실을 찾되, 미워하지는 말자. 나도 편하고 살기 좋아진 우리나라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서울역 지하도에 웅크리고 누운 많은 사람들을 외면했으니까. 그런데 정말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믿음과 우리가 진정 한겨레라는 것을 잊어 버렸던 것 같다.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면, 우리 민족은 다 잘 살게 되는 거라고 함께 믿었던 잃어버렸던 그 꿈을 나는 다시 찾고 싶다. 혼자 꾸는 꿈은 그냥 꿈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꾸는 꿈은 실현되는 꿈의 첫 걸음이란 헬더 까마라 주교님의 말씀을 새기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까? 나의 이기심은 내게 손해가 와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생명을 택하기 위해 ‘우리’를 되찾는 희망으로 무언가를 잃을 각오는 되어있을까? 오늘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기쁘게 세어보는 우리 수녀님처럼은 못하겠지만, 손해를 보더라도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꼼꼼히 세어보고 싶다. 실망하고 슬펐던 제자들에게 어김없이 찾아오셨던 부활하신 예수,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그렇게 죽음을 이기는 강한 부활신앙을 독하게 살아내고 싶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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