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이번 주말에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홀리 네임즈 수녀회 젊은 수녀님들이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우리 수도공동체 국제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 모였다. 아프리가 리소토라는 작은 나라에서 두 분의 수녀님, 캐나다 퀘벡에서 두 분의 수녀님, 리소토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미국 수녀님, 그리고 나까지 모두 여섯 명이 모여서 닷새 동안 회의를 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이 나뿐이어서 환대의 정신(hospitality)을 발휘해서 방 배정, 오피스 공간 예약, 간식 등을 준비하기로 한 것이 얼떨결에 모든 모임 준비, 회의 진행, 노트까지 몽땅 떠맡게 되어 부담스런 마음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할 일이 많다고 해도 ‘미국 스타일’로는 절대 진행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내가 ‘미국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안건을 칼 같이 준비하고, 거의 쉴 틈 없는 토론으로 그 일정을 다 채우는 방식을 의미한다. 미국 사람들은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한다. 그것이 그들의 방식인데, 영어권이 아닌 사람들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피곤하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열정이 없거나 혹은 똑똑하지 않다고 판단을 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런 태도가 바로 제국주의적인 오만이라고 생각하며, 또 영어가 힘든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에서 온 수녀님들은 시차도 있고, 생활 여건도 많이 다르니까 훨씬 적응하기가 힘들 것이다. 불어권 수녀님들을 위해서는 통역 수녀님이 오셨지만, 아프리카 수녀님들은 통역도 없다. 갑자기 나의 지병인 화가 나면서 나는 이 모임을 자매들이 평등한 조건에서 서로를 나누는 모임이 되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모임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각국 수녀님들에게 보냈는데, 캐나다에 있는 불어권 수녀님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당신은 이렇게 쉬는 시간이 많은 모임은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관상적인 그리고 즐거운 모임이 되기 위해서’라는 내용만 써서 답장을 보냈다.

내가 짠 시간표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미팅, 점심식사 후 오후 3시까지 휴식, 3시부터 6시까지 미팅, 그리고 저녁 기도와 브리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그 시간표도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 같은데, 북미주의 문화는 이렇게 느슨한 모임을 불편해 한다. 아니, 성실한 수녀님들의 문화는 쉼 없이 일해야만 편안해 한다. 나는 사실 당신들도 좀 불편을 겪으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박정은

나는 서로의 꿈 나누기로 첫 모임을 시작했다. 내년에 각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 수녀들이 함께 모여서 나누고 싶은 꿈들을. 우리들은 꿈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모두 갈망하는 것은 하나 됨(unity)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어떤 일치를 꿈꾸는 걸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나는 나보다 훨씬 젊은 리소토 수녀님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리더도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자원은 부족해서 자신은 없고, 그래도 할 일은 자꾸 보이는…… 그런 안타까운 마음들 말이다. 각자가 꿈꾸는 글로벌한 자매애를 표현해 보는 작업을 하면서 한쪽 벽에는 형용사를, 한쪽 벽에는 동사를, 또 다른 한쪽 벽에는 이미지를 그려보라고 했다. 뿌리내리기, 나무, 기꺼운(willing), 장미와 가시 등의 단어들을 통해 우리가 꿈꾸는 것, 그리고 글로벌한 자매가 되고 싶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서서히 드러났다.

그렇게 나눔 중심의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되던 이 모임의 흐름이 셋째 날부터 빨라졌다. 갑자기 아프리카와 캐나다에서 온 수녀님들도 모두 각자의 의견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 우리는, 모두 한 마디씩 하기 전에는 누구도 발언권을 다시 가질 수 없다든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는 꼭 묻기라든지, 문법은 무시하라든지 하는 세부적인 규칙들을 세워 나갔다. 나는 우리가 세운 규칙대로 진행을 하다가도, 누구든지 너무 지쳐 보이면 무조건 쉬고 천천히 진행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는 두 수녀님을 바라보는 것이 기쁨이며 희망이었다.

아프리카와 캐나다에 있는 수녀님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서로의 삶의 자리를 잘 들어봐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일을 하다 보면 늘 모임이 아침 일찍 있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또 이메일을 빨리 보내주지 않아서 결국 성질 급한 사람이 다 처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가만히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있는 미주 시간으로는 아침 7시가 좀 이르지만, 내가 8시를 고집하면, 아프리카의 수녀님들은 컴퓨터가 있는 분원에서 자신이 사는 분원까지 겨울의 추운 밤길을 50분이나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 안에 이메일로 답장이 안 오면 “아, 이 수녀님들과 일하기 힘들다”고 속단하기가 쉽지만, 컴퓨터가 없는 분원에서 이메일을 바로바로 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흰 이를 다 드러내놓고 화상채팅 회의에서 웃어주던 아프리카 수녀님들을 보니 미안하고 죄송했다.

호미 바바(Homi K. Bhabha)는 그의 저명한 저서 <문화의 위치>에서 시차(time lag)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자기가 처한 문화에서 실재를 인식한다. 그런데 다른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 빈 시간이 바로 적응과 타협이 일어나는 공간이 되고 거기서 글로벌한 자매애는 시작된다. 그렇게 되려면 말하기보다는 들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의 자리를 잘 알아야한다. 최소한 내가 일정 문화의 자리를 모를 때는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그럴 때 관계 안에서의 창의성이 시작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많은 경우 미국식의 담론은 말하기에 있다. 기도로 묵상 나눔을 많이 하는데, 묵상 시간이 거의 없고, 말하면서 묵상을 하는 듯한 인상을 받은 적도 있다. 사실 듣기는 모든 기도의 시작이며 모든 관계의 시작이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거나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면 무조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그래야 관계가 싹트는 법이니까 말이다.

이번 미팅은 사실 몸도 피곤하고 아픈 상태였고 여러 가지로 지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대륙에서 같은 소명을 살고 있는 자매들을 새롭게 만났다는 점에서 은혜로웠다. 함께 식탁에서 기도를 하고, 우리 회의의 영성을 아주 자연스레 이야기할 때, 하나 됨의 신비를 엿보는 듯 했다. 상기된 얼굴로 수도회의 소명을 이야기하는 젊은 수녀님들의 사랑스런 얼굴을 바라보면서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서 참 든든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립된 마음으로, 성소자가 거의 없는 현실을 생각하면 혼자라서 외롭게 느껴지지만, 눈을 돌려 다른 대륙에서 수고하고 있는 자매를 보면 우리는 모두 함께 이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디 우리 수도회만일까? 그리고 어디 수도자들만 그럴까? 아름다운 하늘 나라가 이곳에 임하도록 우리는 사실 모두 함께 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문화에 대한 편견과 판단, 나와 타자에 대한 의심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함께 가자, 이 길을. 모두가 하나 됨을 위하여!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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