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나이를 먹으면서 가장 행복한 일은 거리에 나가보면,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 아름답게 보인다는 점이다. 젊을 때는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바라볼 여유가 없었을까? 젊은 나에게 언제나 늘 아름답게 보였던 사람들은 어린이들이었었다. 잘생긴 아이도, 꾀죄죄한 아이들도 모두 참 아름답게 보였었다.

이제 이렇게 나이를 먹고 길을 나서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참 아름다워서 감탄하게 된다. 나이가 주는 은총일까? 이번 여름 한국에서 한 달여를 지내면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고 무척 행복했던 것 같다.

젊은 사람의 아름다움과 나이든 사람의 아름다움

그런데 아름다운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나이든 사람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좀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전철을 타고 가다가 나이든 사람들을 보면, 이 사람은 내 나이쯤 되었을까, 아니면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까 가늠해 보다, 머리숱도 좀 듬성듬성하고 주름도 패인 얼굴을 보면, 사느라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헤쳐 나왔겠구나 하는 생각에 짠한 마음이 살짝 든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저런 아픔과 어려움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같은 시대에 같은 조건을 살아가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 그러니까 누구의 엄마로, 누구의 아내로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위대함 같은 것이 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속으로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라고 중얼거린다. 이름 없는 한 인간이 이름 모를 한 인간에게 보내는 축복의 말로서.

지난 주말에는 어떤 여성 그룹의 초청으로 ‘지혜의 원(The circle of wisdom)’이라는 여성 피정을 지도했다. 둘째 날 거의 이 모임이 끝날 무렵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라는 말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 어느 피정에 참석한 신자들이 파견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나는 사실 거의 마무리 단계에서 한 이 예절이 아주 간단하게 금방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그저 1박2일을 함께 지낸 여성들이 서로 나누는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먼저 천천히 일어나 내 곁에 선 자매의 눈을 바라보며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라고 인사를 했고, 모두 서로서로에게 아름답다는 인사를 나누도록 했다.

그런데 내 앞에 선 자매의 눈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인사를 나누는 순간,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났다. 이 무슨 주책인가 싶어 당황하는데, 다른 자매들도 마찬가지인 듯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리고, 급기야는 거의 서로서로 따스한 포옹들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가끔 서로 아름답다고 이야기하거나, 안거나 하는 것들이 서구식이라거나 우리네 방식이 아니라고들 이야기하는데, 서로가 아름답다고 이야기하고, 또 격려와 우정의 징표로 포옹을 하는 것은 그저 참 인간적인 행위임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느낌을 이야기하는 시간에,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 순간의 감동을 나누었는데, 특히 한 자매는 아름답다는 말을 처음 들을 때는 너무 안 듣던 말이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는데, 자꾸 이 말을 반복해서 말하고 또 들으면서, 자신 안에 아름답고 싶은,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음을 새롭게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삶의 아픈 이야기들을 나눈 자매들이 아름답다고 할 때, 그것은 세상이 이야기하는 그런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해 ‘참 좋더라’ 하신 하느님의 마음과 더 가까운 듯싶다.

그녀의 ‘몸’이 아름답지 않은 게 아니라
‘몸의 이미지’가 건강하지 않은 것

사실 인간은 다 타자의 욕구에 의해 통제되고 지배된다고 현대의 심리학은 이야기한다. 자크 라캉은 거울 앞에 선 꼬마가 거울에 비친 거울상이 자신임을 아는 것은, 그 상이 너라고 가리키는 손가락에 의해서이며, 이 손가락은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절대 권위를 상징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 타자의 욕구를 자신의 욕구로 이해하는 경우가 더욱 많고 또 그 상태도 심각하다. 세상의 눈으로 자신의 몸을 이해하는 경향이 더욱 깊이 때문이다. 몸이 자신을 타자와 구분하는 경계를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몸은, 특히 힘없는 여성의 몸은 쉽게 남성 욕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남성의 눈으로 보는 대상이 된다.

사실 프로이트가 정신병을 연구할 때만 해도, 몸은 정신적인 아픔과 고통을 드러내는 도구였다. 히스테리라는 몸의 상태가 실은 성적 욕구의 좌절에 대한 표현인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몸 혹은 몸에 대해 자신이 가지는 느낌이나 생각(body image)은 훨씬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한다. 그러니까 정신에 대한 작용으로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몸이 뚱뚱하다거나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 혹은 그 느낌이 우울증이나 피해의식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영국의 여성주의 심리학자 수지 오바하(Susie Orbach)는 <몸들(Bodies)>이란 책에서, 살찌는 것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종종 여성 피정을 할 때, 자기 몸의 이미지를 가지고 묵상을 하는데,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것을 힘들어 하거나, 뚱뚱한 자신의 몸을 싫어하는 여성들을 만난다. 마른 여성의 경우, 너무 말랐다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사회가 선호하는 이미지라는 긍정적인 생각의 이중 구조 속에서 혼동하기도 한다. 적절한 몸의 살과 사회나 미디어가 요구하는 몸의 살 사이에는 얼마만한 간극이 있는 걸까?

내가 사는 미국 사회에서 살이 찐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살이 찐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뚱뚱하거나 커다란 몸을 전혀 비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는 몸에서 나온다. 즉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살이 찌는 경우가 드물다. 미국에서 유기농 야채 위주의 식사, 요가, 댄스 등 고급의 삶으로 아주 날씬한 몸을 가꾼다는 것은 안정된 경제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다. 젊은 대학생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매일 기름진 음식과 콜라 같은 음료를 먹기 때문에 살이 아주 많이 찐다.

처음 미국에 가서 ‘여성주의 복음 읽기’라는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은 뚱뚱한 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여성이 가장 매혹적이라는 이야기를 했었고, 나는 그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내가 그 선생님의 나이가 되고, 내가 가르치는 여학생이 두둑한 살집을 가지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수업에 들어와서 열심히 공부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할 때, 매혹적이라고 느낀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젊은 여성이 몸에 대해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는 것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몸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라기보다는 몸의 이미지가 아프거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의 이미지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젊은 자매를 만나고 나면, 나는 홉킨스의 유명한 구절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하느님이 보는 나로서 살아가라(Acts in God’s eye what in God’s eye he is)”고 기도하게 된다.

이번 주말은 한국의 여성들과 연대 속에서 함께 울고 웃으면서, 여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다시 한번 깊이 느낀 행복한 시간이다.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권력과 힘의 구조 속에 있지 않기에, 마음의 가난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힘없는 자의 역설적인 자유를 살 수 있기에 행복하다. 오늘 아침, 테이블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몸의 이미지로 고통 받는 자매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은 참 아름답습니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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