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얼마 전 <뉴욕타임스> 기사에 ‘과학자들이여,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칼럼이 실렸다. 내용인즉, 과학자들이 아니더라도 기후변화를 보면 지구온난화 현상이 심각한데, 왜 그걸 말하지 않는가 하는 항변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기후가 이상하다. 내가 사는 베이 지역은 겨울이 우기로 비가 많이 오는데, 정말 겨울 내내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버클리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차와 샤워를 자제하는 운동이 전개될 정도였다.

과학자들이 사실 연구자금을 제공하는 측에게 유리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혹은 불리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이미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학자들의 윤리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종교인들의 윤리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을 이야기하려면 정확한 자료와 정직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고, 진실을 이야기하려면 내가 온전히 진실을 가진 사람이 못 된다는 정직한 성찰과, 진실을 담고자 하는 깨끗한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허튼 돈으로 너희 학비 낸 적 없었다”는 아버지
나는 허튼 지식 말하지 않고 살고 있을까

점점 잘 살게 되는 한국 사회와는 달리 우리 집은 상대적으로 점점 가난해져 갔는데, 아버지는 그걸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가족들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말년의 아버지는 휴가 나온 내게 “허튼 돈으로 너희들 학비를 낸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하셨고,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던 양배추에 베이컨을 넣고 살짝 볶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요리를 해드리고 “깨끗한 돈으로 교육시켜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에요”라고 말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드렸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학부모로서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기의 자리에서 바른 응답을 하며 사는 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본다. 땅을 만지는 농부들은 생명의 땅에 독약을 들이부을 수 없다는 간단한 이유로 유기농을 시작하기도 하고, 죽어가는 도시를 더 이상 볼 수 없어 어떤 젊은이들은 도심 한가운데에 채소를 가꾸는 정원을 만들기도 한다.

나는 한 사람의 수도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최소한 내가 해야 하는 응답이 무얼까 생각해 본다. 우리 아버지가 허튼 돈으로는 절대 자녀의 학비를 내지 않으셨듯이, 나도 허튼 지식, 설익은 지식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학생으로 평생 남는 것도 가르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정직한 응답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사실 늘 배워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새내기 학생이다. 일반 가정에서도 신위를 쓸 때, 현고 학생 부군 신위라고 쓴다. 나도 죽은 후, 누가 ‘그 학생 열심히 생을 공부하다 갔다’고 이야기해주면 참 좋을 것 같다. 사실 산다는 것은 배움에 들어서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 면에서 지금 이 시대에 내가 배우고 가야 하는 영적인 수업들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리라.

요즘, 창조주(the creator)와 창조물(the created) 사이의 친밀함과 관련하여, 나를 사로잡은 주제는 창조다. 내 마음 안에, 우주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 특히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창조가 마음을 울린다.

하느님의 뜻과 나의 욕구 사이에서 욕구에 충실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그러나 나의 욕구를 안다는 것은, 진실한 욕구를 안다는 것은 내가 내 마음 속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마음과 잘 조율된 상태에서, 내 욕구 깊이 깃든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뜻과 함께 춤을 춘다는 뜻이다. 창조하시는 하느님과 그 하느님의 마음이 피조물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모습을 본 것은 영화 <참새들의 노래(The Song of Sparrows)>였다. 이 영화는 이란 감독 마지 마지디의 작품인데, 색깔, 이미지 등의 대비를 통해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삶, 창조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아름다운 응답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가난한 이란 시골에서 타조 치는 일을 하며 가족을 돌보는 아버지이다. 사실 자식을 잘 돌보고, 사랑하는 아내가 밥거리를 걱정하지 않게 하고픈 그 아버지의 마음과는 대조적으로, 타조라는 새가 상징하는 세상의 거대함 앞에, 조금은 왜소하고 슬픈 보통의 아버지다. 그런 아버지가 시내로 나가서 돈을 벌어오면서, 그리고 그럴 듯한 문명의 찌꺼기를 실어 나르면서 서서히 무언가를 잃어간다. 그는 차츰 물질에 집착하고, 자기 식구만을 생각하는 옹색한, 그래서 찌질한 가장으로 변해간다. 여기서 비추어지는 모습은 회색과 철조들이다.

▲ 영화 <참새들의 노래(The Song of Sparrows)>의 한 장면

그런데 아이들이 하는 일은 생명을 키우는 일이다. 아이들은 조금씩 돈을 모아 양어장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제법 멋지게 물을 끌어 놓았고, 이제 금붕어들을 사서 풀어 키울 계획인 것이다. 꼬마들은 기쁨과 기대로 상기되었다. 손으로 키운 모종들을 내다 팔러 도시에 나가 한 통 가득 물고기를 샀다. 그들의 마음은 온통 초록색 기쁨이다.

그러나 한 꼬마가 물고기들이 담긴 물통이 새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물을 구하러 가지만, 오히려 물통은 그들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고 길바닥에 나뒹군 고기들은 죽어간다. 그때 보이는 꼬마들의 슬픈 얼굴은 망가진 세상에서 고통 받은 인간들을 보시는 하느님을 연상케 한다. 꼬마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주 빨리 하나의 결정을 하는데, 그것은 물고기에 대한 소유를 내어놓고, 개울물 속에 물고기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창조주와 한 마음이 되어 활동하는 하느님의 영을 담은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들은 결국 단 한 마리의 물고기만 들고 돌아온다.

풀잎처럼 작은 것이라도 생명을 택하는 법 공부해야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창조를 하면서 살아간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김치찌개도 하나의 창조다. 내가 사람들에게 건넨 친절한 응시도 결국 하나의 창조 행위이다. 물론 내가 건넨 미움이나 분노도 결국 내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냐시오 성인이 말하는 무질서한 영혼의 질서를 바로 회복한다는 것은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마음과 잘 조율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의와 평화가 요구되는 지금 여기에, 우리 마음 깊이에서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길은 무얼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요사이는 부쩍 신명기의 말씀이 와 닿는다. “내가 이제 생명과 죽음을 너희 앞에 내어 놓나니, 살려면 생명을 택해라.” 때로는 좋은 의도로 시작한 것도, 나의 자아가 개입되면, 서서히 죽음의 편으로 끌려간다. 물론 세상은 <참새들의 노래>처럼 간단하지도 않고, 대한문 앞에 나가서 미사만 드리면 어쩔 거냐는 똑똑한 논리 앞에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죽음은 섬세하고 거대한 힘으로, 우리를 몰아간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래서 내 영혼의 세밀한 움직임을, 그리고 사회의 아픔과, 무엇보다 내 안 깊은 곳에 깃든 하느님의 마음을 공부해야 한다. 내가 정당화한 폭력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한 미움을 고백하고, 풀잎 하나 작은 것이라도 생명을 택하는 법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2014년을 살고 있는 나에게 요구한다. 응답하라, 2014.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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