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성주간을 맞으면, 거대한 부활의 신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문 앞에 서있는 느낌이 든다. 박사과정을 준비하면서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개신교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담당한 적이 있었는데, 성주간이 없는 혹은 성주간의 전례가 없는 부활이 내겐 당혹스럽기까지 했었다. 수난과 부활을 몸소 만져보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성주간, 특히 성삼일의 전례는 우리 교회가 지닌 보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는 성목요일 성만찬과 세족례를 무척 좋아했었다. 예수님이 생을 마감하시면서 당신이 사랑하시던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을 드셨음을 기억하는 이 저녁 전례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우리가 친구들과 혹은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는 저녁이 마치 이 마지막 저녁식사 같다면, 우리의 일상도 얼마나 마음 아프도록 아름다울까?

그리고 세족례. 서로의 발을 닦아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는 하느님 나라의 소박함과 정다움이 느껴진다. 지거 쾨더 신부님의 ‘발을 닦으시는 예수’라는 작품에 보면, 베드로의 발이 담긴 물에 비치는 예수님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누구의 발도 초라할 수밖에 없다. 나이만큼 초라해지는 것이 발인 것 같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발은 아이들의 무구한 발이 아닐까. 우리네 일상의 삶이 초라한 만큼, 발도 꼭 그만큼 초라한 것 같다.

본당에서 일할 때 성체분배를 하면서 신자들의 손을 보며 울컥 눈물이 났었다. 성체를 영하기 위해 내미는 손바닥을 보면 힘든지, 거친지, 메마른지 노동으로 힘든 그분들의 삶이 느껴졌다. 물론 그건 나의 느낌일 뿐이겠지만 어찌 되었건 손은 얼굴과는 다른, 아주 투명한 모습으로 주님의 몸을 전해드리는 내 앞에 다가왔었다. 그런데 발을 내민다는 것은 손에 비해 훨씬 깊은 친교와 관계를 의미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누렸던 그 깊은 친교 말이다.

서로의 발을 닦아주는 친교 속으로

내가 주로 성주간 전례를 지내는 뉴만 성당의 성목요일 세족례는 모든 신자가 자기의 발을 내어주고 다른 신자의 발을 닦아 준다. 나는 늘 이 부분이 좀 부담스러운데, 그건 발을 내어주는 전제조건인 친밀감 때문인 것 같다. 남의 발을 닦아준다는 것도, 닦아 달라고 내어 놓는 것도 친교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인 것이다. 그 전례가 끝나면 감실이 비워진다. 텅 빈다는 것, 끝이라는 것이 진정 마음에 와 닿는 시간이다.

▲ <베드로의 발을 씻겨주는 예수님>, 포드 매독스 브라운

성금요일이 되면 주님 수난 예식이 진행된다. 전세계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한다는 생각을 하면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작년 성금요일에는 동네의 작은 성당에서 전례에 참여했는데 십자가에 친구하는 시간이 정말 길었다. 이유는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불편한 몸들을 이끌고 나와 십자가를 경배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인간의 삶과 정의를 위해 자기를 헌신한 많은 사람들을 함께 기억하면서 그 노인 분들과 같이 아주 천천히 십자가 경배를 드리러 걸어갔었다. 올해는 주님의 수난에, 우리나라와 바른 것을 위해 헌신하는 많은 분들이 겪는 고난을 함께 경배하려고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부활의 빛 속에서 되찾기를 희망하면서.

그리고 성토요일. 나는 이 성삼일의 거룩한 행진 중에 성토요일이 주는 고요함을 가장 사랑한다. 아직 부활하지 않으신 예수님, 성당을 기웃거려 보아도 거기 주님은 계시지 않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부활의 빛이 움트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바쁘게 지내다가 갑자기 받은 텅 빈 하루처럼 성 토요일은 그렇게 침묵하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오면 우리는 빛을 묵상하며 부활의 신비 속으로 온 공동체가 함께 걸어들어 갈 것이다.

성삼일의 전례는 거대한, 그리고 장엄한 구원의 드라마이며 우리는 그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특히 수난에 관한 묵상은 신자 됨에 대해 다시 한 번 각성하고 공동체가 함께 거듭나는 그런 시간이다. 개인의 성화도 물론이지만, 성삼일의 전례는 무엇보다도 공동체 전체, 아니 우주 전체의 구원과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다른 창조물들과 연대하여 죽음의 힘을 이기고 새 생명으로 나가기를 고대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기에 전례는 과거와 미래가 함께 공존하면서 실현되는 공간인 것이다.

마음 졸이며 전례를 준비하는 제의방 수녀님들을 위해

일상 속에서 여전히 분주하다가 숨이 턱에 닿아 성목요일 만찬 미사를 향해 달려갈 것이 뻔한 찌질한 수도자의 일인으로서, 이 성주간에 내가 꼭 기억하고 기도하는 분들은 처음 본당에서 성주간을 준비하는 제의방 수녀님들이다. 나도 처음 본당에 파견되었을 때 그 많은 전례를 어찌 준비하는가, 혹시 틀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으로 어쩔 줄 모르고 쩔쩔 매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다. 한국 교회의 선량한 본당 제의방 수녀님들은 모두 그런 마음 졸임이 있을 것 같다.

본당 사제들이 전례를 담당하는 것이고, 수녀들의 일은 그분들이 그 거룩한 일을 잘 하도록 도와드리는 것이지만 소소한 일들, 예를 들어 십자가 경배 예절에 쓰일 십자가에 보라색 천이 세 번에 걸쳐 다 내려오게 스카치테이프를 붙여 놓는 다든지, 무덤 조배실을 꾸민다든지, 부활 성야에 분향 예절을 위해 정확한 시간에 숯불을 피운다든지 하는 일들은 무척 어렵고 또 마음 쓰이는 일이었다. 또 성목요일에는 성유축성미사에 가서 성유를 받아와야 하며, 성금요일은 열심히 감실 청소를 하는 날이기도 하고 부활 전례에 쓰일 성작이며 성구들을 광이 반짝반짝 나도록 닦는 날이기도 하다.

물론 나의 덤벙거리는 성격과도 관련 있는 문제겠지만 무엇보다도 묵상의 달콤함을 잃어버린 서러움이 더 문제였던 것 같다. 수련을 마치고 처음 본당에 온 젊은 수녀라면 예수님의 수난을 사실 극적으로, 온몸으로 느끼고 싶은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의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핑 도는 그런 시기였기에 나의 마음은 갈라지고 황폐해졌다. 나는 예수님의 상처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여러 가지 전례 준비가 나의 발목을 붙잡는 느낌이었다.

정신없이 성목요일 전례를 마치고, 성금요일이 되었다. 성금요일 전례를 틀리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과 동시에, 수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느끼고 싶은 간절한 욕구 사이에서 내 맘은 타들어갔다. 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해야 하는 이 시간에 예수님 십자가상에 두른 자색 천이 흘러내리면 어쩌나 하는 것을 걱정하는 본당 제의방 수녀인 나는, 비참했다. 신자들이 다 돌아간 늦은 오후, 나는 엉엉 울었다. 그리고 예수님께, “예수님, 이게 뭐에요. 나는 예수님의 수난을 전혀 느낄 수 없어요” 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말씀이 들여왔다. “너도 그러니? 나도 너처럼 수난 동안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어.”

성주간 수요일 아침, 왜 20년 전 한국의 조그만 시골 본당에서 제의방 수녀로 보낸 성주간이 생생히 떠오르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기도와 나의 수도생활이 참 철없는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혹시 본당에서 전례 준비로 걱정이 태산일 본당의 첫 서원 수녀님들을 특별히 기억한다. 기죽지 마시라고. 전례 준비가 좀 서툴고 틀려도 수녀님들의 그 걱정과 조바심은 신선한 아름다움이며 수난받는 그리스도께 바치는 향유라고.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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