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에 일어났는데도 어김없이 늦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 주고 가는 출근길. 오늘도 지각을 하느냐 마느냐다. 이렇게 된 거 연가를 내고 잠깐 놀러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갈등하면서도 열심히 달려왔더니, 어쨌거나 세이프. 아직은 9시 전이다. 다급히 컴퓨터를 켜고 숨을 고른 뒤, 아까부터 일했던 사람처럼 진지하게 앉아 있는데, 남편한테서 문자가 왔다. 집을 치우다가 메리의 일기장을 보았단다. 일기장을? 남편은 아이들의 현재 모습에 초점을 맞추는 스타일로 아이의 사생활에 대해선 그리 궁금해 하지도, 캐려 하지도 않는 인물이다.
인생에서 적어도 한 번은 어둠의 터널을 지나게 된다.그 터널에서 빨리 나오고 싶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매년 반복되는 죽음의 사순과 생명의 부활에 생생하게 다가가기는 쉽지 않다.하지만 일상에서 괴로운 순간들이 다가오면 부활에 대한 갈망이 절실하다. 김용길사진 작가.귀촌하여 농가 한 채를 수리하며 인생의 동반자인 엘리사벳 그리고 이웃과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으며 청소년들을 위한 무료 카페, 무빙 까사미아를 준비하고 있다.
세월호참사 5주기입니다. 전국에서 세월호 5주기 추모제를 치르면서 촛불을 밝히며, 304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봅니다. 못된 정치인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망언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가슴속 깊은 분노와 억울한 슬픔을 흔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해인 수녀는 세월호 5주기 추모시 '그 슬픔이 하도 커서'에서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잎을 보며/배가 떠 다니는 푸른 바다와/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며/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오늘도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것/미안하다는 것, 죄송
새봄이 되고 나서 다나와 내가 자주 나누는 대화."엄마, 나 많이 컸어?""응, 진짜 많이 컸지. 다나 이제 혼자서 쉬도 할 수 있잖아. 밭도 안 밟고, 복실이 물도 주고, 혼자 옷도 잘 입지?""맞아, 나 많이 컸어. 다랭이 오빠랑 다울이 오빠도 컸어?""그럼, 오빠들도 많이 컸지. 날마다 쑥쑥 키도 크고 으랏차차 힘도 세졌어.""다나도 힘 세졌는데...."그러고는 나를 들어 올리겠다고 끙끙 힘을 쓴다. 내가 애써서 들리는 시늉을 하면 다나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나를 진짜로 번쩍 들어 올
김준희(효주 아녜스)홍익대학교에서 교육학 전공 뒤 만화가로 활동하던 중 전공을 살려 무료 대안학교 교장 노릇을 하며 지냈다. 지금은 본업인 만화만 열심히 그리며 살고 있다. 30여 권의 만화책을 냈다. 현재는 천주교 의정부교구 주보와 어린이 주보, 어린이 잡지 에 영어 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콜텍 정리해고 문제가 꽉 막혀 있습니다. 환갑을 지낸 김경봉 조합원은 15일 있을 박영호 사장과의 협상 자리에 나가기 위해 콜텍 본사의 옥상 농성을 해제하였습니다. 임재춘 조합원은 단식 농성 31일차를 보내고 있습니다.지난 수요미사에서 임재춘 조합원이 가슴에 품고 있는 이해인 수녀의 시를 낭송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해인 수녀는 두 권의 시집과 함께 손 편지와 카드 시 등을 전달했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힘들어도 힘내시길 함께 기도드린다”며 “늘 다시 시작하는 오늘의 기쁨이 있기를” 소망하셨습니다. 또한 임재춘 조합원이 단식 30일차를
2주 전, 장모님을 모시고 화개장터로 봄나들이를 다녀왔다. 이곳에 이르자 온 세상이 꽃으로 가득 찼다. “♬ 봄~ 봄~ 봄~ 봄~ 봄이 왔어요. ♪”어느새 입가에 봄 노래가 맴돌았다. 계절의 여왕, 이 봄에 여행을 떠나 보면 어떨까? 김용길사진 작가.귀촌하여 농가 한 채를 수리하며 인생의 동반자인 엘리사벳 그리고 이웃과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으며 청소년들을 위한 무료 카페, 무빙
2007년 7월입니다. 국내 1위였고, 세계 3위 악기회사였던 (주)콜텍은 국내 공장의 물량을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넘기고 국내 공장을 폐쇄합니다. 노동자 250명은 졸지에 정리해고되었습니다.2009년 11월, 서울고등법원은 “회사 전체의 경영 사정을 종합 검토해 정리해고 당시 경영상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2014년 6월 양승태 대법원은 “미래 대비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라는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렸습니다.2019년 3월 12일, 해고노동자 임재춘 조합원이 정리해고 사과와 정년이 되기 전 명예복
2014년 4월 16일. 그날을 잊지 말자고 했다. 세월호의 원인 규명을 막았던 정권이 물러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고, 그 일이 있었던 5년이 지난 지금, 많은 이의 가방에 매달려 있던 노란 리본을 이제는 찾기가 힘들어졌다. 재조사 잘하고 있겠지 하는 믿음, 그리고 울다 지쳐 애간장이 녹아 버린 유가족들의 처지에 함께 엉엉 울던 울음소리도 잦아든 지금이다.얼마 전, 마지막 3분의 CCTV 영상이 소실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오고, 유가족은 또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이 사고의 원인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인가, 밝혀진다고 한들 자식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이후 반경 20킬로미터 이내는 영구 피난지역으로 선포됩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모든 가축들은 살처분됩니다. 즉 사람도 동물도 살 수 없는 곳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죽음의 선포에 맞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후쿠시마 핵사고가 발생한 곳으로부터 14킬로미터 안에서 소를 살처분하라는 정부의 방침에 저항하며 소들과 함께 살고 있는 요시자와 마사미 씨(62)입니다.요시자와 마사미 씨는 한 목장의 ‘소치기’였습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로 고농도 방사능이 덮쳤습니다. 순식간에 방사능 수치
우리 집에 이 시대 마지막 간 큰 남자가 살고 있다. 쉽게 눈치를 챘을 테지만 바로 다울 아빠! 평일에는 회사 가서 돈 벌어 오고 주말에는 애들하고 놀아 주고.... 그런 평범하고 자상한 아빠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생활을 하고 있다. 그저 자기 소신대로 (돈벌이 전혀 안 되는) 농사 짓기, 그거 하나만 한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컴퓨터를 손에 쥔 채 혼자 노는 걸 좋아하고, 자기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고.... 오죽하면 내가 "저 사람은 뒷짐 지고 애 셋을 키우는 것 같다"며 하소연을 늘어놓을까
몇 가지 잘못된 내용을 수정하겠습니다. 도요다 나오미 사진가에 의하면, 2011년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후쿠시마현에서 고농도 방사능에 피폭된 핵쓰레기를 담고 있는 새카만 포대들은 2200만 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약 10퍼센트인 220만 개가 핵발전소로부터 4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던 이이타테무라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약 140만 개가 있다고 합니다.후쿠시마현에는 약 20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후쿠시마현민 1인당 약 12개의 새카만 핵쓰레기 포대를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새카만 포대의 한 개의 무
2년 전 친구를 만나러 독일에 갔었는데,어느 날 그를 따라 푸른 들판이 펼쳐진 곳에 닿았다. 살다 보면 우리 앞에 여러 갈래의 길이 놓인다. 때로는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며 길을 걷기도 하고,때로는 어떤 이유로 길을 벗어나기도 하고,때로는 헐떡이며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 하지만그 길을 걸어가고 있기에 목적지에 도달한다. 김용길사진 작가.귀촌하여 농가 한 채를 수리하며 인생의 동반자인 엘리사벳 그리고 이웃과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으며 청소년들을 위한 무료 카페, 무빙 까사미아를 준비하고 있다.
아이들이 나를 어떤 엄마로 기억해 줄까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영 자신이 없는 거다. ‘당신은 어떤 유형의 엄마인가요?’ 하는 자가 테스트를 하면 일단 성질을 잘 부리는 엄마가 나온다.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계속 화가 나 있는 엄마. 특히 아침에 그렇다. 보통날의 아침이면 자신에 대해 돌아볼 겨를도 없지만, 가끔은 내가 연기 쫌 하는 배우 같아서 놀라곤 한다. 내가 있는 곳이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장르는 재난영화다. 나는 혼돈과 공포에 사로잡힌 얼굴로 생사를 건 다급함, 궁지에 몰린 인간을 연기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이후 8년이 지났습니다. 일본 정부와 후쿠시마현은 후쿠시마 부흥의 상징으로 적극 귀환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후쿠시마를 떠났던 젊은 부부들의 귀환을 위해 교육부와 함께 막대한 돈을 투입하여 새로운 학교를 건축했습니다. 이 학교들에는 잔디운동장과 수영장 그리고 강당 등의 최신 시설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학교로 돌아온 학생 수는 후쿠시마 핵사고 발생 전의 5퍼센트입니다. 특히 나미에마치와 토미오카는 후쿠시마 핵사고 발생 전의 1퍼센트에 불과합니다.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
후쿠시마 핵사고 8주기입니다. 불과 8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아직도 후쿠시마인가?”라고 말합니다. 기억은 짧고 망각은 비정한 현실인가 봅니다. 마치 해운대라는 거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해운대가 고리 핵발전소로부터 22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침묵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후쿠시마 곳곳은 ‘귀환곤란 구역’입니다. 후쿠시마 핵발전단지 반경 20킬로미터 외에도 이타테 마을은 대부분이 귀환곤란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귀환곤란 구역은 연간 방사선량이 50밀리시버트를 넘어 귀환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고농도 오염지
처음 귀농하던 해(당시 스물아홉) 여름에 친구들과 제주 순례를 했다. 해군 기지가 들어선다 어쩐다 시끄럽던 시기에 제주가 생명평화의 땅으로 지켜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가지고 떠난 길이었다. 십년도 훌쩍 지난 일이라 어느덧 꿈에서나 겪은 일처럼 아득하지만 아직도 어슴푸레 기억나는 장면이 몇 가지 있다. 마법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던 어느 곶자왈 풍경, 비 오는 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던 아이들, 한국 전쟁과 4.3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동굴을 랜턴에 의지하여 비틀거리며 걷던 기억.... 그때 나는 아름다운 것이 얼
장인어른께서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다.한 사람이 죽으면 지구상에서 커다란 도서관 하나가 무너지는 것이라고 한다.죽음으로써 ‘인간아,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라는 성경 말씀이 이뤄졌다.이제 세상에서 마주한 모든 희로애락을 다 털어 내고 영원한 안식을 얻으소서. 김용길사진 작가.귀촌하여 농가 한 채를 수리하며 인생의 동반자인 엘리사벳 그리고 이웃과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으며 청소년들을 위한 무료 카페, 무빙 까사미아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