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 10]

우리 집에 이 시대 마지막 간 큰 남자가 살고 있다. 

다울이가 그린 아빠 초상화. ⓒ정청라

쉽게 눈치를 챘을 테지만 바로 다울 아빠! 평일에는 회사 가서 돈 벌어 오고 주말에는 애들하고 놀아 주고.... 그런 평범하고 자상한 아빠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생활을 하고 있다. 그저 자기 소신대로 (돈벌이 전혀 안 되는) 농사 짓기, 그거 하나만 한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컴퓨터를 손에 쥔 채 혼자 노는 걸 좋아하고, 자기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고.... 오죽하면 내가 "저 사람은 뒷짐 지고 애 셋을 키우는 것 같다"며 하소연을 늘어놓을까. 아니 사실 하소연이라기보다 신기해서 하는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 당당하게 제멋대로 살 수 있는지....

여기까지가 그동안 내 생각이었는데, 요즘 다른 차원에서 다울 아빠를 바라보고 있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전혀 내색도 않고, 어쩌다 감기에 걸려도 아픈 척도 안 했던 다울 아빠가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지경에 처했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이었을까. 마늘밭에 쪼그려 앉아서 풀 매고 오더니 전부터 살며시 아팠던 허리가 더 심하게 아프다고 했다. 누워서 좀 쉬면 나아질까 했는데, 그날 저녁에 몸을 일으키지 못해 저녁밥도 못 먹을 정도가 되었다. 급기야 다음날 아침엔 일어나는 것도 간신히, 걷는 게 힘들어 네 발로 기어서 움직여야 했으니 하루아침에 중증 환자 탄생!

그쯤되니 내가 발 딛고 있는 일상의 현장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당장 순천에 나갈 일이 있는데 운전을 해서 데려다 줄 사람이 없다니! 다나가 화장실에 가야 할 때 내가 바쁘면 "아빠한테 도와 달라고 해" 하고 떠넘겨 왔는데 이제 그럴 수 없다니! 쌀 씻고 조리질 하는 건 오랫동안 다울 아빠가 담당해 왔는데 이젠 내가 해야 하다니! 당장 눈앞에 닥친 농사일은 어떡하나, 찧어 놓은 쌀 떨어지면 나락을 도정해야 하는데 그건 어쩌나, 일주일 한 번 태극권 수업은 갈 수 있을까.... 이런저런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 다울 아빠는 공기나 햇빛과 같은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을! 눈에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물심양면으로 숱한 도움을 주고 있었는데 내가 그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는 것을!(누군가 이런 식의 얘길 하면 참 진부하다 싶은데 살면서 겪는 다양한 일들 속에서 그런 진부함이 새롭게 내 몫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별거 아닌 거 같은데 별거인 진실!)

정신이 번쩍 나게 다울 아빠가 고마웠다. 전에 허리가 불편하다고 했을 때 '이게 다 당신의 지난 삶의 결과다, 이번 기회에 다르게 살아라!' 잔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렇게 치부할 일만은 아니었다. 그가 아픈 건 나 때문이기도 하다는 걸 조금 받아들이게 되었달까? 내 고생만 안중에 있었지 네 고생에는 관심조차 두고 있지 않았다는 뼈아픈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달까?

작업반장 다울 아빠의 지시 아래 땔감을 정리하고 있는 아이들.언제나 솔선수범을 보이던 다울 아빠는 요즘 어쩔 수 없이 작업 전선에서 물러나 있고 그 자리를 오합지졸 같은 나와 아이들이 채우고 있다. ⓒ정청라

그러고 보니 예전에 다울 아빠를 주제로 만든 노래가 하나 있다. 언젠가 다울 아빠가 컴퓨터 타이머에 입력해 둔 메시지에 빵 터져서 만들게 된 노래인데, 짧은 메시지 한 문장이 다울 아빠의 속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야, 느그들만 먹지 말고 나 좀 주라!"

타이머가 반복해서 몇 차례 울리자 아이들과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더랬다. 컴퓨터 목소리 자체가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다울 아빠의 마음속에 저런 아이 같은 마음이 숨어 있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이기도 했다. 우리가 간식을 먹고 있을 때 안 먹어도 괜찮은 척 일하고 있거나 혼자 놀고 있더니만, 알고 보니 함께 먹고 싶었던 거였다니! '나에게도 관심과 사랑이 필요해요'라고 말하고 싶었으면서 오랫동안 감추고 있었다니!

지금이야말로 그 목소리, 그 마음을 잘 들어 줄 때인 것 같다. 나무꾼이나 머슴이 아니라 공주님처럼 조심스럽게 대하고 소중하게 아껴 주면서 말이다.

덧.

말만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거 아니냐고? 아니다! 정말로 공주님처럼 잘 모시고 있다. 공주님 분부하시는 대로 내가 손수 처음으로 쌀 도정도 해 보았고, 뭔가 부탁을 해 오면 즉시 움직여서 들어주고,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실까 노심초사 하면서 지내고 있다. 다울 아빠의 잔소리마저도 사랑스러운 신기한 나날! 올해는 농사고 뭐고 다울 아빠가 몸을 잘 보살피는 데 온 힘을 썼으면 좋겠고, 아이들과 나만 잘 놀게 아니라 다울 아빠와 함께 잘 놀 궁리를 해 봐야겠다.

정청라

인생의 쓴맛 단맛 모르던 20대에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되고 1년도 채 안 되어 좋은 엄마는커녕 그냥 엄마 되기도 몹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좋은 엄마'라는 허상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쭈욱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놓기의 연속.... 이제는 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살아 있음을 만끽하며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산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 길이 된다는 것'임을 떠올리며 노래로 길을 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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