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5]
신앙의 실천적 성격을 알아듣기 위해 우리는 ‘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놀이라는 말로 흔히 생각하기 쉬운, 여가 선용의 천박한 수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놀이들로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학생 생활, 부모 노릇, 자식 노릇, 결혼 생활, 직장 생활 등 모두가 각각 일련의 인간 마음가짐과 실천을 요구한다.
우리는 요구된 그 일련의 실천을 놀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묵은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사람이 새것이 되었다는 말은 그 사람이 과거와 다른 새로운 실천, 곧 새로운 놀이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놀이가 올바른 것이 되기 위해 우리가 전제해야 할 것들이 있다. 놀이는 진지하게 또한 자유롭게 해야 한다. 놀이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 사람은 그 놀이를 망가트리는 훼방꾼이다. 놀이를 하는 사람은 그 놀이가 지닌 구조를 존중하고 자기 주관에 얽매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놀이에 열중하여 자기 스스로를 잃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놀이의 의미, 곧 상징성(象徵性)을 살렸다고 말한다. 놀이의 상징성이 살아나면, 그 놀이가 지닌 삶의 의미와 보람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실재(實在)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 반면, 놀이를 하는 사람이 그것에 열중하여 스스로를 잃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을 과시하기 위해 놀이를 하면, 그 놀이는 가상적(假想的)인 것이 되고 만다. 놀이가 지닌 실재, 곧 삶의 의미와 보람을 생산하지 못하고, 놀이하는 사람만 보여 줄 것이다. 신앙인에게 요구된 놀이가 가상적인 것이 되면, 그 놀이를 하는 사람의 유아독존(唯我獨尊)적 자세를 나타내게 된다. 불교가 말하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이 그런 놀이의 결말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나 그리스도 신앙이 말하는 사랑은 인간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놀이이다.
놀이는 놀이하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 놀이는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스스로를 쇄신한다. 놀이는 인간의 창의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놀이에는 항상 위험 부담이 있기에 그것은 모험이기도 하다. 놀이는 관중(觀衆)에게 개방되어 있다. 관중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관중이 함께 호흡할 수 있을 때, 그 놀이는 성공한 것이다. 복음서는 말한다. “여러분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치어, 그들이 여러분의 좋은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시오”(마태 5,16).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신앙은 관중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놀이를 하게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놀이를 하는 사람이 관중만을 의식하고 놀이를 하면, 그것은 흥행(興行)이 되고 만다.

우리는 삶의 변화, 운동, 실천 혹은 실존론적 범주(範疇) 등으로 표현하던 것을 ‘놀이’라는 쉬운 개념을 사용하여 표현하고자 한다. ‘놀이’ 개념은 과거 형이상학적 신학의 이원론(二元論)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가시적(可視的)인 것을 불가시적인 것으로, 낮은 것을 높은 것으로, 물질을 정신으로, 육신을 영혼으로, 자연을 초자연으로, 다양함을 불변하고 영원한 단일함으로 설명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 10,38-42)를 이원론적 관점으로 이해하면, 마르타는 활동하는 사람이 되고, 마리아는 관상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한 사람의 놀이와 예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놀이를 대조해 보이는 것이다.
현대인은 사물의 존재 의미를 묻지 않고, 그 사물이 다른 사물과의 관계 안에서 어떤 실효성(實效性)을 지니는지를 묻는다. 오늘은 사람의 신분(귀족, 천민, 수품자, 수도자 등)을 묻지 않고, 그 사람의 놀이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한다. 현대 과학이 사물들의 상호 관계로 발생하는 과정(過程)을 관찰하고, 그것을 모방하여 우리 생활에 필요한 기기(器機)들을 생산 하듯이, 현대인은 인간이 상호 관계로 발생시키는 역사, 곧 과정을 중요시한다.
현대인은 과거의 교리언어도 그것이 전달하는 놀이가 어떤 것인지를 관찰하여, 그 언어가 발생 단계에서 어떤 놀이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보려 한다. 니케아 공의회가 “아버지와 아들은 실체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하였을 때, 현대 신앙인은 예수라는 사람 안에 하느님이 하시는 놀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듣고, 예수의 삶을 배워 자기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려 한다. 그런 전통적 교의 앞에 현대인은 그것이 말하는 원초의 놀이를 찾아서 오늘의 문화권 안에서 같은 놀이를 발생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과거의 교의 표현만 반복하지 않고, 그것이 어떤 놀이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알아듣고, 그 알아들은 바를 전달하는 우리의 언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설명할 때, 그 언어가 현대인에게 이해되고, 오늘을 위한 새로운 놀이를 발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하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양식으로 복음서는 예수의 입을 빌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고 답한다. 이 말에 담긴 뜻은 유대교의 계명 준수와 성전 제사의례의 강요에 짓눌린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과 실천으로 대단한 해방감과 기쁨을 맛보았다는 사실이다. 악의에 찬 반대자들의 눈에 예수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벗”(마태 11,19)으로 보일 정도로 그분은 유대교가 강요하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하였다. 예수는 유대교 기득권층이 하느님을 빙자하여, 하느님이 버린 죄인이라며 소외시킨 사람들과 어울렸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과도 함께 계시며,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분이었다. 예수가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과 가진 관계, 제자들과 가진 관계들을 관찰하여, 예수에 대한 초기 신앙공동체의 신앙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신약성서 언어는 결코 이원론적이 아니다. 먼저 예수로 말미암은 놀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놀이를 반영하는 언어가 발생하였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마태 7,21)라는 말씀을 비롯하여,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마태 7,24)는 말씀은 실천이 믿음이고 진리라는 말이다. 실천을 담은 신앙언어이며, 실천을 발생시키는 신앙언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요한 1,14)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이 삶, 곧 놀이를 발생시켰다는 말이다. “그분은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셨다”(요한 1,12)는 말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자녀의 놀이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뜻이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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