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2]

종교는 인간의 공동체를 구성요소로 하고 있기에, 인류역사가 소중히 생각하는 원리와 질서가 그 안에서도 작동한다. 따라서 종교는 신앙이 마치 그런 원리와 인류의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 있는 듯이, 신앙언어 자체를 왜곡할 수 있다. 종교가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기 위해 흔히 하는 일이다. 종교들의 기복(祈福)적 위장(僞裝)과 아세곡학(阿世曲學)의 현상을 의미한다.

'주님의 기도‘를 기복적 종교언어로 해석하면,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하시어, 저희가 그 이름을 흠숭하게 하시며, 지엄하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어 저희를 다스리시고,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의 뜻이 저희를 지배하여,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오로지 아버지의 뜻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는 하느님이 주시지 않으면, 먹지 못하는 미물이오니 오늘도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가 유혹에 빠져서 헤매는 일이 없도록 하시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악한 일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같은 기도를 신앙언어로 해석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희가 아버지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살아서 이 세상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저희의 삶과 실천이 아버지의 나라가 어떤 것이지를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땅에 사는 저희를 통해서도 그것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는 일용할 양식을 보아도, 베푸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보아도, 저희 죄를 용서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저희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저희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선하신 하느님에게 등을 돌리고 악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해 주소서.

인류역사 안에 당연시되는 원리들과 그것들이 만드는 질서를 예로 들어보자. 인과응보(因果應報), 사필귀정(事必歸正), 명철보신(明哲保身), 입신양명(立身揚名), 부귀영화(富貴榮華), 다다익선(多多益善), 약육강식(弱肉强食) 등을 나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 신앙언어는 그런 인간의 염원을 담은 원리와 인간이 당연시하는 질서 앞에 인간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워질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 신앙언어가 구원으로 제시하는 것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자각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마음이다. 이 자각과 마음가짐은 자비, 헌신, 섬김, 스스로 작은 자가 되는 것, 청빈, 연민과 배려 및 사랑 등의 실천으로 나타난다.

종교가 신앙언어를 시대에 맞게 해석하여 표현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뜻을 인과응보 혹은 사필귀정의 실현에 있는 것으로 왜곡 제시할 수 있다. 인류가 만든 원리들과 질서를 성취해 주는 하느님이라고 왜곡하는 것이다. (사월초파일을 전후해서 길에 붙어 있는 연등들의 대부분이 소원성취(所願成就)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는 종교 공동체 안에서 명철보신과 입신양명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헌신과 섬김이라고 위장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 기도를 잘 하면, 얻을 수 있는 입신양명이고 재물인 양, 사람들을 오도(誤導)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약육강식이 자행되고, 인간 안에 내재하는 증오와 복수를 실천하는 현상을 종교 공동체들 안에서 우리는 본다.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 라파엘로의 작품 ‘포리뇨의 성모’(1512년)
인간 삶의 한계에서 발생하는 하느님이라는 단어이다. 그리스도 신앙언어는 그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해 준다. 그것을 가르친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언어들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발생하면서 박해 시대를 거치고, 313년에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자유롭게 신앙언어를 발생시켰다. 그 시대 지식인들은 모두 그리스 철학에 물들어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언어도 그리스 철학의 언어를 빌려 포장되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와 실체적으로 동일한 분’(325년, 실체(實體)는 사물 안에 있는 인식의 원리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431년, 출생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그 생명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없다는 그 시대 신플라톤 사상의 주장을 비켜가기 위해 채용된 표현이다. 마리아의 정체성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실제 하느님의 일을 본다는 신앙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 언어이다), ‘그리스도는 하나의 위격에 두 개의 본성을 가진 분’(451년, 니체아 공의회가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가 실체적으로 동일하다고 말하자 오해가 발생하였다. 하느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제3의 본성을 지닌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에우티케스(Euthyches)를 반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표현들이다.) 등이며, 하느님과 예수와 성령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 세 분 안에 높고 낮음이 있다는,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언어의 영향을 받은 주장을 극복하기 위해 발생한 삼위일체의 교리이다. 플라톤의 철학적 언어가 통용되던 19세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는 신앙언어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발전한 자연과학의 영향으로 인간은 사물의 생성과정(生成過程)에 민감하게 되고 20세기 실존주의(實存主義) 사상의 등장과 더불어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언어는 후퇴한다. 과거 교회가 사용하던 형이상학적 교리언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언어의 쇄신이 요구되는 오늘이다.

그리스도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기에, 현대인이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발생시킨 과정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신앙언어의 발생 과정에 대한 인식이 올바른 것이라야 한다. 그 인식이 잘못되면, ‘그리스도를 본받는다’, ‘완전한 삶, 곧 완덕을 추구한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 ‘영혼의 구원’ 등의 말이 모두 그 역사적 핵심을 잃고, 과거 그 언어가 발생할 당시의 문화적인 것을 강요하는 언어, 곧 신화(神話)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그리스도 신앙이다. 과거에 발생한 언어, 곧 전례, 교리, 제도 등은 그것이 발생할 당시에 그리스도 신앙을 전달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그것들을 새롭게 해석하여 우리의 삶 안에서 새로운 체험을 일으키게 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시대적 사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언어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은 어떤 분이고, 그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듣게 해야 한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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