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인생을 살면서 혼자 서 있다고 느낄 때, 자주 보지는 못해도 그저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을 나는 친구라 부른다. 얼마나 좋은 친구를 가졌는가 하는 것은 한 인간의 생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지, 가끔 이제는 연락이 끊어진 옛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함께 영화를 보고, 떡볶이를 먹던 친구들, 카페에서 밤늦는 줄도 모르고 인생을 이야기하던 친구들……. 그럴 때면, 하릴 없이 컴퓨터에 친구 이름을 하나씩 적어 보는데,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친구들은 어찌 그리 모두 조용히 살고 있는지, 컴퓨터는 눈만 껌벅이고, 그 아이들이 어디 살고 있는지, 행복한지, 잘 살고 있는지, 도무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시인 윤동주는 별 헤는 밤, 패, 경, 옥 같은 보고 싶은 친구들의 이름을 고요히 불러 본다고 했는데, 나는 늦은 밤에 옛날 친구들의 이름을 두르려 보곤, 어디서든지 행복하라고 화살 기도를 한다.

사는 이야기, 마음 아픈 이야기 나누며 함께 늙어 가는 든든함
그리고 이럴 때면, 여자의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대학교 때는 친구의 학교만 알면, 학과로 학보나 엽서를 띄우면 되었고, 직장을 가졌을 때는 114에 직장 이름을 물어 찾으면 되었다. 하지만,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고, 어느 순간엔가 직장을 그만두고, 어디론가 남편의 직장 따라 떠나고 하다 보면, 친구들은 어디에 있는지, 쉽게 찾을 수가 없게 된다. 재작년인가 한국에 들어와서 나의 오랜 단짝 친구와 아주 재밌게 본, <써니>라는 영화에서도, 옛 친구를 찾기 위해 흥신소 직원까지 고용해 보지만, 결국 보고 싶은 친구 한 명은 끝내 만나지 못한다.
이렇게 여성들의 경우 옛날 친구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대신 여성들은 동창 모임, 계 모임을 통해 꼼꼼히 친구들을 챙긴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심심찮게 나오는 우리 눈에 익숙한 장면은, 동창 모임에 나가는 중년 여성의 분주한 모습이다. 성공적인 삶임을 보여주기 위해(대부분은 내 남편의 성공 혹은 내 자녀의 성공이지만) 나름 한껏 멋지게 차려입고, 명품 가방을 들고 나가서는, 무언가 서운하여 돌아오는 씁쓸한 마음.
설사 이 씁쓸함이 여성의 쓸데없는 허영이었다 할지라도, 이런 여성들의 모습을 못마땅해 하는 시선에 나는 반대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사실 이렇게 열심히 모임을 챙기는 여성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사회적 지위가 없는 평범한 여자의 경우, 서로 좋아하는 친구들과의 만남마저 없다면, 결국 주위에 삶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어느 날 벼락부자가 된 친구에 대해 배가 조금 아프더라도, 친구들을 만나서 사는 이야기도 하고, 마음 아픈 이야기도 하며 함께 늙어 가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 든든한 일이다. 이 친구들이 소중한 내 인생의 증인들이기에 그렇다. 뭐, 세상에 내로라하는 업적은 남기지 못했어도, 내게 주어진 삶의 신산(辛酸)을 성실히 거두어 낸 나의 일상에 함께 마침표와 느낌표, 그리고 때로는 물음표를 그어 준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특히, 퇴직 후 갈 곳 없이 외로워 하는 남자들을 보면, 여성들이 사는 방식의 아름다움은 더욱 명료해진다.
내가 복 받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친구 복인데, 두 문화 사이를 오가며 사는 사람으로서 내 친구의 범위는 매우 다양하다. 대만, 중국, 이란, 독일, 멕시코 등에서 온 나 같은 외국인들도 있고, 미국 남부 출신의 흑인, 동부에서 온 전형적인 백인, 그리고 여러 인종이 섞인 소위 교포 3세 아시아인 친구들도 있다. 물론 미국에 사는 교포 친구들도 내게는 소중한 벗이다.
호미 바바가 <문화의 위치>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포스트 식민주의 담론은 사실 이런 시내 한복판의 카페에서 함께 나누는 대화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친구들과 사는 이야기를 하고, 어려움도 함께 나누다 보면, 어떨 때는 그들의 얼굴이 한국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엉겹결에 한국말로 응답하기도 한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도 예삿일이 된다. 예순이 훨씬 넘은 내 흑인 친구 죠한테 내가 사정없이 마구 반박을 해도, 그는 전혀 섭섭해 하지 않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한국 문화는 말없이 배려하고 참아 주는 것이 미덕인 반면, 미국 문화는 가차없이 표현하고, 대화 하는 것이 미덕이다. 그래서 한국식에 충실한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자기의 의견을 표시하는 미국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좀 힘들 수도 있고, 미국식 친구 사귀기는 한국 문화에서 볼 때는 약간 무례해 보일 수도 있겠다.그러나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 관계가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 자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다.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원칙.. '동등함'과 '신뢰'
친구라 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원칙들이 있는데, 그 첫째는 동등함을 들 수 있겠다. 나는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는 오랜 친구 수녀님이 있다. 나는 언제나 그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주문이 많은 편인데, 그는 내 말을 잘 들어주곤 했다. 언젠가, 아르헨티나에서 선교하는 그가 큰 결정을 해야 하는 때가 왔는데, 나는 평소처럼 호들갑을 떨며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행동강령을 늘어놓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자그마한 강아지가 무언가에게 쫓겨 도망가는 것을 본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 강아지를 안고 한참을 뛰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강아지가 내게 애처로운 눈빛으로, “정은아, 이제 내가 그냥 뛰면 안 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나는 “미안해, 친구야”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다. 내 친구의 인생을 응원할 수는 있어도, 내가 대신 달려 줄 수도 없고, 달려 주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만난 어린 시절부터 내 말을 참 잘 들어준 친구가 너무 고맙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욕심 없이 잘 참으며 열심히 수도생활하는 내 가장 오랜 친구. 그래서 몸무게가 많이 늘어난 내 친구에게 살 빼라고 구박하지 않는다. 다만 그이가 혹시 건강을 해칠까 걱정을 할지언정.
둘째, 믿어 주는 마음, 즉 신뢰다. 내가 미국에서의 삶을 홀로 시작할 때, 내 단짝 동기 수녀님이 나에게 해준 말, “나는 네가 가려는 길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는 너를 믿어. 너는 잘 해낼 거야.” 이 말은 나의 마음을 따스하게 지켜 주고도 남았다. 우리는 종종 이해하고 나서 믿어 주려 하고, 설명해 달라고 주장한다.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없을 때, 너의 행동이 나의 소신에 맞지 않을 때, 화를 내며, 너와 친구로 지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런 건 동지(comrade)지, 친구는 아니다.
어느해였던가, 정초 아침, 내가 존경하는 어른 수녀님께서 덕담으로 “수녀들 올 한 해는 예수님께 사기치지 마세요”라고 하셨다. 내게는 그 말씀이 좀 두렵게 다가왔다. 글쎄, 예수님께 사기치지 않고 살아간다면 무척 좋은 제자이겠으나, 나는 사기치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예수님께 띄운 공수표만도 오만 오천 개가 되고도 남을 것이기에……. 그러나 오히려 내가 사기를 쳐도 늘 새롭게 나를 믿어 주시는 그분이라서 나는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에,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분은 우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친구가 된다는 것, 그것은 그렇게 나의 이해를 넘어 끝없이 믿어 주는 것이다.
우정이 더이상 생명을 주지 않을 때..
마지막으로, 어떤 우정이 내 쪽의 한계 때문이든, 상대 친구의 한계 때문이든, 더이상 생명을 주지 않을 때, 떠나보내는 용기다. 더이상 우정이 아닌데 그 관계를 붙드는 일은 비루하다. 네가 없으면 내가 외로울 것 같아서, 혹은 이 우정을 잃으면 그간 함께 보낸 세월이 아까워서 등등, 이유는 수백 가지가 될 것이나, 죽어 버린 관계를 안고 가는 것은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이다. 그동안 함께 보낸 시간을 감사하며, 더이상 끌어 안을 수 없는 나의 한계 혹은 너의 한계를 인정하며, 조용히 흘려보낼 일이다.
오늘밤에는 이제 더이상 친구일 수 없는, 혹은 떠나보낸 친구들의 안녕을 빌며, 그들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 볼 일이다. 그리고 인생의 한 길목에서 다시 마주치거든 그저 미소 지으며 침묵할 일이다. 그리고 내 삶에 다가와 빛을 나누어 줄 새로운 벗을 위해, 마음의 공간은 남겨 둘 일이다. 나의 인생에 빛을 주고, 그 빛 속에서 함께 길을 걸어 준, 그리고 또 함께 걸어갈 모든 친구들에게, 그 따스한 축복을 향하여,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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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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