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신부의 복음과 세상 이야기]

예수께서는 때때로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보시고 복되도다 하셨다. 행복선언 단문은 네 복음서에 제법 많이 나온다. 그러나 줄줄이 행복선언을 하신 사례는 산상 수훈에 딱 한 번 전해 온다(마태 5,3-12=루카 6,20-23). 이 연속적 행복선언문 가운데 마태 5,3에 실린 첫 번째 행복선언문이 늘 말썽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공동번역) 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성경전서 표준 새번역)라고 번역하는데, 이게 오역이란 말이다. 우선 연속적 행복선언문의 전승과 편집 과정부터 살펴보자.

1. 예수의 행복선언

▲ Andrei Rublev (c. 1360/70-1430)Christ in MajestyTempera on wood, 1408314 × 220 cm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갈릴래아는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모든 면에서 낙후된 시골지방이었다. 예수께서는 가난과 설움과 굶주림으로 실의에 빠진 갈릴래아 민중을 향하여 삼중 행복을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재구성하면 대충 이렇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니.
복되어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대들은 위로를 받으리니.
복되어라, 굶주린 사람들! 그대들은 배부르게 되리니.”
(마태 5,3.4.6 = 루가 6,20-21)

그 뜻인즉 분명하다. 갈릴래아 민초들이 지금은 비록 가난하고 슬퍼하고 굶주린 형편이지만 가까운 장래에 신국을 차지하고 위로를 받으며 배부르게 될 것이므로 복되다는 것이다. 결코 현실이 비참하니까 복되다는 그 무슨 역설이 아니라, 비록 현실은 불행하지만 밝은 미래가 동트므로 복되다는 희망의 약속이다. 희망찬 미래 때문에 복되다는 힘찬 선언이다.

2. 예수 어록의 행복선언

기원후 50-60년경 시리아 지방의 어느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말씀 70여 편을 모아 <예수 어록>이란 소책자를 펴냈다. 지금은 예수 어록이 없지만, 80-90년경 마태오와 루가는 제각기 복음서를 쓸 때 그 소책자를 구해서 부지런히 베껴 썼기 때문에 그 형태와 내용을 대충이나마 알 수 있다. 예수 어록에는 예수 친히 선포하신 삼중 행복선언 끝에다 또 한 가지 행복선언이 덧붙여 있었으니, 곧 예수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도 복되다는 말씀이다.

“그대들은 복되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그대들을 모욕하고 박해하며 그대들을 반대하여 온갖 사악한 말을 할 때! 기뻐하고 신명내시오. 그대들이 받을 상이 하늘에는 많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대들에 앞서 간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했습니다.” (마태 5,11-12 = 루가 6,22-23)

그럼 어록 편찬자는 이 행복선언문을 어디서 따왔을까? 기원후 30년 5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교가 창립된 때부터 50-60년경 어록이 씌어지기까지 교우들이 겪은 가장 큰 고초는 뭐니뭐니해도 박해였다. 유대인들과 관리들로부터 쫓기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삼중 행복 선언을 듣고 자기네도 복된 사람들 반열에 끼이고 싶은 생각에서, 예수 믿다가 박해받는 사람들은 복되다는 행복선언문을 만들어 달았다. 어록 작가는 이것을 어록에 채록했다.

3. 마태오의 행복선언

마태오는 어록에 실린 네 가지 행복선언문을 옮겨 쓰는 기회에 스스로 다섯 가지 행복선언문을 가필하여(온유한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 아홉 가지 행복선언문을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행복한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에서 그랬을까? 모를 일이다. 노름 좋아하는 우리네 식으로 풀이한다면 죽을 4자보다 갑오 9자가 바람직해서 그랬다고 하겠으나, 마태오야 동양화를 감상할 줄 알았겠는가.

또한 마태오는 도덕군자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윤리적으로 윤색했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깨끗한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하면 혹시 아둔한 독자들이 곡해할 세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의로움에 굶주린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고쳐 썼다. 곧, 윤리적으로 건전한 사람들만이 복되다는 것이다. 누가 마태오를 말리랴. 걱정도 팔자다. 그리하여 갈릴래아의 민초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킨 예수님의 참신한 행복선언을 마태오는 밋밋한 윤리덕목으로 탈바꿈시켰다.

4.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불행한 오역이다

"어쩌다 우리 집이 가난하게 되었지만 우리 가족들 마음만은 넉넉해야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곧잘 입에 담으신 말씀이다. 가세가 곤궁한 터에 가족들 마음조차 구차해 보라, 그 집안은 다시 일어설 가망이 없다. 그러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글귀는 우선 우리말이 아니다. 아울러 이는 오역이다. 주석에 앞서 마태 5,3을 올바로 번역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직역하면 이렇다.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이제 마태 5,3에 대한 수많은 풀이 가운데서 세 가지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동경 상지대학 철학 교수로 일하는 가도와끼 가까지(門脇佳吉) 예수회 신부는 마태 5,3을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라고 옳게 번역하기는 했으나 불행히도 하느님의 성령으로 본 나머지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영으로 가난함은 영의 부추김을 받아 자발적으로 가난을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청빈을 가리킵니다. 가난을 체험하고 감수한다기보다 가난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기는 후련한 경지를 말합니다”(<禪과 聖書> 126쪽, 분도출판사, 1985).

2) 전 연세대 국문과 마광수 교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라는 역문을 따르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야한 사람이라고 풀이 했다(동아일보 1990년 4월 15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의 저자다운 어처구니없는 풀이다.

3) 유가의 영향을 받은 이라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에 이른 유신군자라고 풀이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가톨릭 수도자라면 청빈서원과 관련지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됨됨을 밝히려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마태 5,3을 직역하면 이렇다.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라나,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가리킬까? 신구약 성경에 흔해빠진 낱말들이 ‘영’이요 ‘가난한 사람들’ 이기는 하지만, 이 두 낱말을 붙여 쓴 사례가 전무하니, 그 뜻이 불분명하다 못해 불통일 수밖에. 중구난방, 백가쟁명, 설왕설래 학설은 많으나 좀체로 통설은 생기지 않는 형편이다. 이런 형국에 번거로운 논란은 죄다 접어 두고 단지 내가 생각하는 바를 간결하게 밝히고자 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다”, 蛇品 71항)는 말씀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됨됨을 밝힘에 있어 나는 다음 세 가지 사실에 눈독을 들인다.

1) 마태오의 산상수훈 행복선언문에서는 노상, 윤리적으로 복되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태 5,3의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도 어떤 뜻으로든 윤리적으로 선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2)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영’은 하느님의 성령이 아니고 인간의 영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마태 5,8)에 있어서 ‘마음’이 인간의 마음임이 분명하듯이. 여기 ‘영’은 우리네 말로 해서 인간의 기(氣), 의기(意氣), 기개(氣槪)이다. 그러니까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네 식으로 말하면 객기, 협기, 오기를 버렸다는 뜻으로 기가 약한 사람들, 기를 못 펴는 사람들, 기진맥진한 사람들, 의기소침한 사람들, 곧 기고만장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3) 아랍 유목민 목동들이 1947년 사해 북서변에서 우연히 발견한 쿰란 문헌 가운데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란 표현이 두 번 나온다(詩歌集 1QH 14,3; 終末戰爭記 1QM 14,7). 시가집 단락은 앞뒤문맥이 너무 상해서 번역하기마저 어렵다. 종말전쟁기 단락도 뒷문맥이 손상되기는 했지만 번역과 풀이가 가능하다. 종말전쟁기는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쿰란 수도자들이 중심이 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이 벌이는 대혈전을 묘사한 묵시문학적 글이다.

종말전쟁기 14장 5-7a절에서는 종말전쟁에 나선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이스라엘은 자기네 됨됨 또는 처지를 가리켜 휘청거리는 이들, 의기소침한 마음, 벙어리들, 떨리는 무릎, 꺽인 목덜미라고 한다. 잇달아 나오는 14장 7bc절은 매우 중요하므로 직역할 필요가 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완고한 마음이 [···], 온전하게 걷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모든 사악한 이방인들이 소멸될 것이옵니다.”

종말전쟁기 14장 5-7정을 종합해 볼 때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들이라 하겠다. 따라서 마태 5,3의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는 아주 알아듣기 쉽게 의역하면 이렇다 “복되어라, 겸손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마태오가 스스로 만들어서 끼워 넣은 셋째 행복선언문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상속받으리니”(5,5)도 표현만 조금 다를 뿐 의미는 매한가지다. 사해 북변 메마른 돌산 동굴에서 우연히 발견된 쿰란문헌 덕분에 이런 풀이가 비로소 가능하다. 고마운 지고, 사막이 안겨준 선물이여!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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