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신부의 복음과 세상 이야기]

어느 종교에나 반드시 의례가 있다. 무속에는 굿이 있고 불교에는 염불이 있으며 유교에는 관혼상제가 있다. 천주교에도 여러 가지 의례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곱 가지 의례를 가려내어 성사(聖事)라고 한다. 성사는 행위예술 비슷한 것이다. 성사는 마음속 깊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상징행위이다.

그러나 성사에는 신심의 표현 기능만 있는 게 아니고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발심(發心) 기능 또한 있다. 사실 세례성사나 혼인 성사를 받은 이들 중에는 크나큰 감동과 환희를 체험하고 일생 그 순간을 되새기면서 신앙생활, 부부생활을 꾸려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으레 상징은 다의적이듯이 성사의 의미 또한 논리로 정리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오묘하다. 또한 성사를 받는 사람마다 체험과 이해의 깊이와 부피가 다르게 마련이다.

일곱 가지 성사는 두 부류로 대별할 수 있다. 우선, 수혜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상태, 새로운 신분으로 옮겨가게 하는 통과의례(通過儀禮)의 성격을 지닌 성사들이 있다. 세례 · 견진 · 혼배 · 서품 · 병자성사가 여기에 속한다. 인생의 주요 고비에서 받는 성사들이다. 이와는 달리 나날을 살아가면서 거듭거듭 반복해서 받는 일상적 성사들이 있으니, 곧 성체 · 고백성사이다. 이제 일곱 가지 성사들을 내 나름대로 살펴본다.

통과의례 1 : 세례성사

▲ 성루피노대성당 세례대 ⓒ김용길 기자

거의 모든 성사가 그렇듯이 세례성사도 일정한 행위(洗禮礼節)와 그 행위의 뜻을 밝히는 일정한 말씀(洗禮定言)으로 짜여 있다. 우선 행위부터 살펴보자. 요즘은 수세자의 이마에 세 번 물을 붓지만, 초기 교회에서는 수세자의 머리 꼭대기까지 물속에 잠그고 치켜 올렸던 같다. 이는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상징행위였다.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비의(秘儀)를 표현하는 상징행위였다(로마 6,4-5). 요즘도 침례교회에선 본래의 세례동작을 소중히 여겨 수세자를 물속에 푹 잠근다. 교단 명칭 그대로 침수세례(浸禮)를 베푼다.

그럼 세례를 베푸는 부세자가 물을 붓거나 물에 잠그면서 무슨 말을 했나? 원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라고 하였다 (갈라 3,27; 1코린 6,11; 로마 6,3; 사도 2,38; 8,16; 10,48; 19,15 참조). 그런데 세월이 흘러 80-100년경 시리아 교회들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라고 확대하였다(마태 28,19; 열두 사도의 가르침 7,1-3). 후자의 영향으로 오늘날 천주교회에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한다.

세례는 수세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밀착시키는 성사이다. 묵은 삶을 정리하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향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삶을 꾸려가게 하는 행위이다. 영원하신 분의 사랑을 목숨 바쳐 이룩하고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써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성사이다. 한 마디로 세례는 그리스도인을 창조하는 성사이다. 그러니 세례는 태초의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새로운 창조인 것이다(갈라 6,15; 2코린 5,17).

통과의례 2 : 견진성사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까닭에 출생 후 곧 세례를 받은 태생 교우는 중학생 시절에, 어른이 되어 세례를 받은 성인 입교자는 세례 후 일 년쯤 지나서 주교에게서 견진성사를 받는다. 견진은 일종의 관례(冠禮), 성인의식(成人儀式)이다. 물론 그리스도 신앙의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견진을 받는 이는 세례 때 전해 받은 그리스도 신앙을 다시 한 번 연마하고, 아울러 그 신앙을 능동적으로 실천하기로 작심해 마땅하다. 그리스도 신앙을 연마하려면 신앙 연수 기회를 선용하고 신앙 서적들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신앙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를 끼치는 연수나 서적들이 적지 않으니 잘 살피고 택할 일이다.

그리스도 신앙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각자 물려받은 소질, 곧 은사(카리스마)를 잘 살려 사회와 교회에 봉사하는 길을 모색할 일이다. 권력이든 재력이든 학력이든 체력이든 남보다 많은 힘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일수록 더더욱 사회와 교회에 봉사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땅의 소금 세상의 빛(마태 5,13-16)구실을 하는 이들에게 축복 있으라.

통과의례 3 : 혼인성사

사람의 일생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들은 출생 · 혼인 · 사망이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이 세 가지 일을 일컬어 인륜대사라 했다. 그런데 출생과 사망은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아무래도 운명이요 팔자이다. 혼인 역시 숙명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사람이 자유로이 결단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인류대사로서, 결단을 잘 내리면 행불행을 넘어 크나큰 축복이요, 잘못 내리면 엄청난 저주가 된다.

성서에서는 부부를 일컬어 “둘이 한 몸이 된다”고 했다(마르 10,8). 이는 부부의 성적 결합을 가리킬 뿐 아니라, 남자와 여자라는 독자적인 두 인격이 제 삼의 인격, 곧 부부인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린 선현들도 부부일신(夫婦一身)이라 하지 않았던가. 옷깃만 스쳐도 삼세의 인연이라 했거든 하물며 부부관계랴. 세상에 부부 인연만큼 자연스럽고 질기고 넉넉한 인연은 또 다시 없을 것이다. 신앙인의 견지에서 볼 때 부부간의 사랑이야말로 자연스레 하느님의 가이 없는 사랑,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리키고 이룩하는 성사이다. 혼인이야말로 무상의 은총을 가장 자연스레 드러내는 상징이니 만큼 여러 성사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성사라 하겠다.

누구나 그렇듯이 부부도 크고 작은 시련들을 겪게 마련이다. 그런 때일수록 혼인성사 때 서로 주고받은 서약을 상기할 일이다. “나(아무)는 당신을 내 아내/ 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쳐봄직도 하다. “하느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주소서. 아울러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요즘 많은 부부들은 부부일신운동(M. E.)에 참가하여 부부관계를 새롭게 하는 활력을 얻고 있으니 선용할 일이다.

▲ 사제서품식 ⓒ최종수

통과의례 4 : 서품성사

안수로써 주교 · 사제 · 부제를 정하는 의례를 서품성사라 한다. 역사적으로 교계제도는 많은 변천을 겪었다. 서기 58년경 사도 바울로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될 무렵에는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가 이끄는 원로단이 예루살렘 교회를 돌보았다(사도 21,18).

바울로가 설립한 여러 교회에는 원로는 없고 그 대신 다른 부류의 교직자들이 교회들을 보살폈다. 예로, 바울로가 제삼차 전도여행중(53-58년경)에 쓴 필립비서(1,1)를 보면 필립비 교회에는 감독들과 봉사자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비슷한 시기에 써 보낸 코린토 전서(12,28)를 보면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교사들을 비롯하여, 제각기 다양한 은사들을 받은 이들이 교회에서 활동하였다.

80-90년경 시리아 지방에 자리 잡은, 마태오가 소속한 교회에선 그리스도교 계통 율사들과 예언자들이 크게 활약했다. 오늘날엔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해서 주교들과 사제들과 부제들이 우리 교회를 보살핀다. 현행 교계제도는 2세기서부터 점진적으로 발전 · 확정된 것이다.

서품성사는 서품자 개인의 사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도대중의 공익을 위한 것이다. 신도대중에게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도들을 받들어 섬기기 위한 것이다(마르 10,45; 마태 23,8-12; 요한 13,14-15 참조). 주교 · 사제 · 부제가 되면 마치 품계가 올라가는 것처럼, 마치 신분이 격상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수가 있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봉건주의 시대에는 어울릴지언정 오늘날의 민주주의 감각에는 전혀 걸맞지 않다. 신분이 격상되는 게 아니고 신도들에게 봉사하는 역할을 부여받는 것이다.

서품자들이 주로 하는 일은 복음선포와 성사집전이다. 복음선포에는 설교 · 성경공부 · 교리교수 · 상담 · 집필 등이 있다. 그럼 복음선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현실에서 출발하라. 그렇지 않으면 허공에 메아리치는 허언이 되기 십상이다. 아울러 그리스도 신앙으로 현실을 조명하라. 그렇지 않으면 십중팔구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린 농언이 된다.

오늘날 이 땅에서 복음선포는 제대로 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만 같다. 현실 또는 복음을 소홀히 한 결과, 천주교 개신교 가릴 것 없이 설교가 위기에 처한 지 이미 오래다. 설교를 잘하는 묘안은 따로 없다. 그러나 설교를 잘 준비하는 한 가지 방법은 있다. 사제가 설교 초안을 준비한 다음, 지각 있는 신도들과 의논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만은 피할 수 있다. 성사집전 역시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표현해야만 제 구실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요식행위, 미신행위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통과의례 5 : 병자성사

노쇠하거나 중병을 앓아 생명을 잃을 위험이 있으면 병자성사를 받는다. 일단 건강을 회복했다가 다시 상태가 악화되면 거듭거듭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삶에서 죽음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갈까 저어하는 한계 상황에서 받는 성사이니 만큼 통과의례로 보아 마땅하다.

임종의 다섯 단계 중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의 단계를 극복하고 순응의 단계로 접어들도록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의례가 병자성사이다. 그러니 환자가 생명을 잃을까 염려되면 즉시 사제를 부를 일이다. 사제는 병자의 이마와 두 손에 성유를 바르면서 이렇게 기도한다. “주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주소서. 아멘.”

낯익은 세상과 정든 이들을 영영 떠날 때면 누구나 슬퍼하게 마련이요, 낯설고 깜깜한 저승길로 들어설 때면 누구나 두려워 떨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시간 속에서 영원을 그리워하고 이룩하는 신앙의 비결을 익혀온 그리스도인이라면, 덧없이 흘러가는 듯한 나날이 사실은 영원을 향한 걸음마임을 깨닫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음의 극한 상황에서도 결코 임 향한 일편희망만은 잃지 않을 것이다. 이 희망을 위령미사 감사송에선 다음과 같이 엮었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겨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을 떠난 다음에는 천국에서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리이다.”

▲ 성체성사 ⓒ한상봉 기자

일상의례 1 : 성체성사

서기 30년 4월 6일 목요일 저녁 때 예루살렘 시내 어느 집 이층방에서 예수 일행은 최후만찬을 들었다. 최후만찬에 임해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화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여기 세족(洗足)은 지극한 사랑과 역설적 섬김을 드러내는 상징행위이다. 세족에 이어 내리신 당부의 말씀을 보라. “주님이요 스승인 내가 여러분의 발들을 씻어주었다면 여러분도 서로 발들을 씻어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준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준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행한 대로 여러분도 행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3,14-15).

예수께서는 만찬중에 빵을 나누어주시면서 “이는 내 몸입니다”라고 하시고, 만찬을 마무리할 무렵에는 포도주 잔을 돌리시면서 “이는 내 피입니다. 계약의 피로서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라고 하셨다(마르 14,22-24).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당신 목숨을 바치시겠다는 결의를 드러내는 말씀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주간의례로 만들었다. 곧, 교우들은 매주 한차례 일요일에 모여 성찬(=성만찬=미사)을 행하였다. 일요일이라고 했지만 실은 토요일 저녁 때 모여서 다 함께 만찬 잔치를 벌였다. 적어도 교회 초창기에는 그러했다. 당시 이스라엘에선 토요일 일몰에서부터 일요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성찬은 예수님과 사귀는 잔치요, 교우들끼리 사귀는 잔치이다(1코린 10,16-17). 우선 예수님과 친교를 맺는 예수 잔치이다. ①과거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되새기는 회상제요, ②부활하여 우리와 더불어 현존하시는 오늘의 그리스도를 기리는 찬양제이며, ③장차 환히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제이다. 아울러 성찬을 교우들끼리도 사귀는 교회 잔치이기도 하다. 사귐(친교)은 나눔으로써 구체화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교우들은 성찬 잔치 때 먹거리를 넉넉히 마련해서 가난한 교우들과 나누어 먹었다. 그러기에 성찬을 ‘빵 나눔’(루카 24,35; 사도 2,42)이라고 이름 지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우들을 위해서 헌금을 마련했으며(1코린 16,2), 로마의 교우들은 빈자들을 위해서 희사하곤 하였다(유스티누스, 호교론 1권 67장). 나눔 못지않게 중요한 덕목은 섬김(봉사)이다. 모름지기 교회 지도급 인사들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처신을 본받아 신도들을 받들어 섬겨야 한다. 이렇게만 처신한다면 우리 교회는 바깥 사회화는 질적으로 다른 대조사회, 대척사회, 대안사회가 될 것이다. 땅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마태 5,13-16).

일상의례 2 : 고백성사

예수께서 윤리의 근본을 일컬어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敬天愛人)이라 하셨다. 쌍갈래 사랑을 저버리는 짓, 곧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등을 돌리는 짓거리가 죄이다.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되돌아서는 전향(轉向)이 회개이다. 인간이 죄를 용서받으려 할진대 회개, 참회는 필수 조건이라는 게 그리스도교계의 한결같은 확신이다.

그렇지만 참회제도는 시대에 따라 많은 변천을 거듭했다. 3-5세기에는 공개적으로 참회를 행했다.

①죄인이 주교에게 비밀히 죄를 고백하면 주교는 참회양식(기도, 단식, 희사, 극기, 고행 등)과 참회기간(단기, 장기, 일생)을 정해주었다. 3세기 초에는 흔히 세 가지 죄(배교, 살인, 간통)만 고백했으나, 4세기 이후부터는 고백할 죄목이 자꾸만 불어났다. 죄의 경중과 빈도에 따라 참회양식과 참회기간이 다르게 마련이다. 요즘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참회는 준엄하고 길었다. 참회기간 내내 죄인은 미사중 말씀의 전례에만 참석하고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면 물러갔다. 시한부 참회인 경우 참회기간이 끝나면 주교는 사죄를 선언하고 성찬의 전례 참석과 영성체를 허락했다.

②주교로부터 사죄선언을 받고 나서도 흔히 일생 동안 극기와 고행(결혼 포기, 부부성관계 포기 등)을 해야만 했다.

③공개적 참회도 처음에는 일생에 딱 한 번만, 나중에는 세 번까지만 허용했다. 이상 세 가지 규범 때문에 교우들은 공개적인 참회를 임종 때까지 미루기 일쑤였다. 한 마디로 공개적 참회제도는 사목상 실패작이었다.

공개적 참회제도가 실효성이 없던 차, 6세기에 아일랜드에서 전도하던 수도자들이 새로운 참회제도를 만들어냈다. 곧, 사제에게 비밀히 고백하면 사제는 과히 지키기 어렵지 않은 보속을 은밀히 정해준 다음 사죄경을 염하는 식의 현행 고백성사가 불모의 땅 아일랜드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그 후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에서는 전 세계 신도들이 적어도 매년 한 차례 고백성사를 받도록 규정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우리나라 교우들이 적어도 매년 두 차례, 즉 예수성탄 축일 전과 예수 부활 축일 전에 고백성사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때가 되면 성당에서는 교우들에게 미리 고백성사표를 배부한다. 신도들은 각자 고백성사를 받으러 고해소로 들어갈 때 그 표를 바구니에 넣는다. 그러면 성당 사무실에서는 그 표를 거두어, 고백성사를 받은 사실을 교적부에다 표시한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는 표지를 남기려는 것뿐 전혀 다른 뜻은 없다.

고백성사표를 배부 · 수거하는 일은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전도한 두 지역, 곧 한국 천주교회와 일본 후쿠카 교구에서만 실시한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전 세계 어디서도 그런 별난 처사는 듣도 보도 못했다. 개신교에는 고백성사제도가 없다. 제1세계 가톨릭의 경우 지난 20여 년 사이에, 고백성사를 받는 교우들이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이다. 바야흐로 또다시 새로운 참회제도가 요구된다는, 시대의 징표인가?

어쨌거나 고백성사의 근본취지는 분명하다.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애련하심이 지극하신 하느님의 용서를 선언하는 것이요, 기꺼이 죄인들과 어울리신 그리스도의 자비를 선포하는 것이다.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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