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어떤 사전적 의미를 가질까? 단어를 풀어 보면 국민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념 혹은 사상이다. 사전에서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지는 정치 제도"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정치를 구현하는 세력이 ‘민주주의’ 세력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런 곡해와 참칭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뻔한 거짓말이 드러날 정치 세력이 국민 다수의 이익을 침해하면서도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국에서는 그 결과 지난 수십 년간 새롭게 쓰는 단어로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를 활용한다. 그런데 이 단어를 쓰는 것도 기괴하긴 매한가지다.

우선 ‘자유민주주의’도 ‘민주주의’가 아닌가? 최소한 국민 주권을 인정하는 정치 제도여야 민주주의란 단어를 쓸 수 있다. 그래서 '자유'를 붙여도 고전적 의미의 ‘자유민주주의’는 온데간데없고, 민주주의는 구색 맞추고 ‘자유’만 주구장창 주장하는 의미로 변색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자유’란 의미도 협소하고 왜곡투성이다. 애초에 ‘자유’는 마음대로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 의미인 ‘자유(liberal)’와 억압과 차별에 대한 반발인 ‘자유(freedom)’가 중의적으로 섞여 있는 한자어다. 일본에서 시작된 번역어 ‘자유’가 아닌 한자어 ‘자유(自由)’의 뜻은 동양에서는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방조되어 있다는 의미의 부정적 상징성이 컸다. 이 부정적 단어를 긍정적으로 활용한 경우는 대부분 서구 계몽철학의 이념 체계(소위 자유주의)에 기초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에 대한 맥락적 이해 없는 ‘자유’ 주장들, 특히 맘대로 하겠다는 식의 ‘자유’는 애초부터 ‘민주주의’란 단어에 결합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물론 이런 번역의 한계와 서구 정치 제도 발전 맥락에 대한 몰이해를 차치하더라도, 사회적 개념의 ‘자유(liberty)’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해선 안 된다(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는 전제하에 있다는 점은 어찌 보면 이젠 시민 상식이다. 내 자유를 무한 인정하는 것은 상대를 무한 억압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정치, 사상, 표현, 결사의 자유 같은 자유주의의 기본권과 민주주의가 결합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 혹은 ‘자유’를 주장하는 세력은 진짜 이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전복시키고 유통한다. 대표적으로 윤석열이 말한 ‘자유’는 대체로 상대방이나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할 자유다. 그 최후는 쿠데타 시도인 계엄령 선포였다. '계몽 차원에서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시도가 본인의 자유(권한)란 주장이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한을 ‘자유롭게’ 쓰는 것이니 문제가 없다는 식이다. 극우파 지도자 전광훈 목사는 ‘자유마을’을 만들어 극우 운동의 지역 조직으로 쓰고 있다. 여기서 이들이 사용하는 ‘자유’는 정치적 좌파, 진보에 대항하는 의미다. 민주주의를 파괴할 자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는 상대를 혐오하고 차별할 ‘극우파’의 ‘자유’다.

이 극우파들은 공교육과 같은 민주주의 시민 교육에도 반발하면서 ‘대안 교육’으로 자주성과 선택권을 달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극우파들과 복음주의 개신교계가 만든 수많은 대안 학교는 지금 극우파 양성소로 전락한 지 오래다. ‘대안’이란 단어도 비슷한 극우파의 편향적 단어로 역시 개편되고 있다.

지난 3월 15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극우 집회에서 전광훈 목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전광훈TV Pastor Jun TV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대안 학교의 변화와 ‘대안’이란 단어 전복

대안 학교는 원래 기존의 입시 중심, 줄세우기 교육을 비판하는 긍정적 대안의 의미로 시작되었다. 학교 운영, 교과 선택, 선생님과 학생의 민주적 관계 등을 개선하는 실험적이지만 교육의 큰 변화를 일으키려는 진보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당수 대안 학교는 이런 민주주의와 줄세우기 교육에 대한 비판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대안’은 권위주의, 비민주성, 획일성에 대한 대안이 아니다. 공교육이 가르치는 역사관, 과학 시간에 다루는 진화론 등에 대한 극우파적 ‘대안’이다.

이런 대안 본보기는 이미 미국에서 복음주의 교회 주도로 지난 30여 년간 확대된 바 있다. 1기 트럼프 정부의 교육부 장관 벳시 드보스는 미국식 공적 대안 학교(차터스쿨)를 신봉했는데, 이는 교육 재정 삭감을 위한 측면도 있었다. ‘대안’ 교육이 공교육을 와해하거나 역사나 과학에 대한 극우 사상이나 음모론을 주입하는 것이라면 그 ‘대안’은 진정한 대안일까? 지구는 평평하고, 기후 위기는 없으며, 518 민주화 항쟁은 북괴의 폭동이라고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 대안 학교라는 뜻이라면 그도 형해화되었다고 봐야 한다.

비슷한 언어의 전복적 오용 때문에 ‘대안’이란 단어도 이제 긍정적 뜻을 잃어 가고 있다. 이번 2월 독일 총선에서 2위로 급상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최근 유럽에서 확장되는 극우파 정당이다. 신나치와는 조금 맥락이 다르지만 결국 그 극우 정당이 말하는 대안의 배후에는 이주민 공격, 인종 차별, 기업하기 좋은 자유 등이 포함된다. 서구 극우파와 음모론에 대한 한국 극우파의 친화력으로 볼 때, 향후 한국에서도 ‘대안’이란 말이 기이하게 포섭되어 더 많이 쓰일 가능성이 크다. 서구에서 ‘대안 우파’ 운동이 주류 보수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 극우 운동이란 점에서, 이 단어 사용도 향후 한국에서 주목할 만하다.

'필수 의료'는 어떻게 변질되었나?

일전에 몇 번 설명했지만, ‘필수 의료’란 단어도 마찬가지로 왜곡되었다. 우선 '필수'라는 단어의 절실함만큼 그 범주가 구체적이지 않고, 기본 서비스의 구체성만큼의 수준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예시로 몇 가지 이야기만 나열한다. 아마 ‘필수 의료’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의료는 아프면 받아야 하는 서비스인데, 아파도 제공받지 않아도 될 '비필수'가 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의료' 범주와 관련해 건강보험이나 공공 의료 같은 구체적으로 포괄해야 하는 범위를 규정하고자 만든 단어와 달리, '필수 의료'는 실제로 해외에도 없는 개념이다. 한국에서 '필수 의료' 이야기가 크게 시작된 이유는 의료 체계가 지나치게 시장 의존적이고 선택적 의료 영역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피부 미용이나 외래 진료 기반의 통증 치료, 건강 기능 식품 시장이 과다하게 팽창해 있다 보니 '필수 의료'란 구획이 조금씩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이 필수 의료를 더 좁은 범위로 축소시켰다. 중증, 외상, 응급 같은 경우에 한정하는 개념으로 차용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용어를 정책 방향에 녹여 냈다는 점인데, 대표적으로 ‘필수 의료 패키지’를 발표했다. "필수 의료는 더 두텁게 보장하겠다"는 말이 이에 해당된다. 언뜻 들어 보면 틀린 이야기도 아니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필수 의료'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니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필수 의료’가 강화 대상이라면 '비필수 의료'는 방치해야 된다는 뜻인가? 그리고 여타 국가에서는 필수인데, 한국에서는 필수가 아닌 영역은 어떠한가? 고혈압, 당뇨 관리 같은 만성질환 관리 및 치료, 단순 골절 치료 등은 ‘필수 의료’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런 영역은 각자 알아서 사적인 의료 서비스에서 해결해야 된다는 것인가?

즉 이런 변용을 거쳐 현재 '필수 의료'는 애초에 용어의 시작 지점에서 논의된 수준에서 협소해지고,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 대부분의 건강보험 진료를 개인 책임으로 전가하는 단어로 전락하고 있다. 물론 이 단어를 처음 쓴 전문가들이나 학자들은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름 선의를 가지고 조합된 언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정치적 목적을 가진 자들이 이 언어를 쓰는 순간부터 이런 단어의 오용과 왜곡이 시작되고 만 것이다. 특히 건강보험을 축소하고 공공 의료를 포기한 정치 세력에게 ‘필수 의료’란 단어가 활용되는 순간부터 정상적 보건 정책 논의는 중단되고 말았다. 국가 책임이 아닌 모든 의료는 '비필수'로 규정되면 책임 회피가 가능해진 덕이다.

사실 실제 중요한 과제는 언어 전복 현상에 앞서 일어나는 기형적인 정치 세계와 사회 정책 방향이다. 그 기반은 거짓에 기초한 세계관이다. 거짓에 기초한 가짜 뉴스, 가짜 논리, 탈진실 논리는 결국 언어도단과 변질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국가 권력의 정점에서 가짜 뉴스와 가짜 논리를 양산하는 자들을 발본색원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빠른 헌재의 결정을 기대한다. 지연된 판단으로 거짓 언어 사용에 대한 압박이 더 심해지고 있다. 이제 언어도단을 더 악화시켜선 안 된다.

정형준

재활의학과 전문의,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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