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밝힌 은빛 전사들
공수처가 체포 영장 집행 중지를 발표하고 물러난 뒤에도 “윤석열 체포!”를 외치며 한남동 앞을 지킨 시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1월 4일 밤부터 눈보라가 몰아친 영하 날씨에 은박 비닐을 두르고 대통령 관저 앞에 앉아 밤을 새웠다. 5일 아침 페이스북에 올라온 영상과 사진에서 그분들을 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온통 흰색으로 뒤덮인 흑백 사진 같은 장면마다 수많은 영웅이 성스러운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전쟁터를 지키는 그 모습이 너무 눈부셔서, 너무 웅장해서, 너무 거룩해서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존경’, ‘경외’, ‘추앙’ 등의 단어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몇 시간 후 그분들에게 ‘키세스 단’이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은박으로 감싼 키세스 초콜릿 같다는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 그분들의 업적이 폄하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한에 눈보라를 뒤집어쓴 1박2일 한남동 시위가 귀엽고 예쁜 초콜릿으로 묘사된 것에 대해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참고로, 언론과 누리소통망(SNS)에 많이 공유된 사진 속 하늘색 패딩 여성은 75년생 정혜경 국회의원이다.
여성은 언제나 광장에 있었다
젊은 여성들이 새로운 정치 세력, 새로운 주역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여성 혐오’라고 비판하는 글을 읽고서야 내가 느꼈던 불편함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여성은 민주주의 역사 속에 언제나 정치적 주체로 존재했었다. 일제 시대 만세 운동에도, 4.19 혁명과 5.18 민주항쟁에도, 80년대 민주화 운동에도, 명박 산성과 박근혜 탄핵 때도 최루탄과 물대포를 맞으며 늘 거리에 있었다. 그동안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세력이 아니라 항상 곁에 있던 ‘동지’였다. 응원봉을 흔들고 떼창하는 귀엽고 기특한 소녀들이 아니라 부당한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동료 시민이다.
이렇게 여성 혐오에 기반한 시선도 불편한데, 게다가 20-30 여성과 20-30 남성의 집회 참여율을 비교하면서 여성들의 참여를 팬덤 문화로, 남성들의 비참여를 군대 때문이라는 식으로 가져다 붙이는 기사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이런 식의 갈라치기는 혐오와 차별을 더욱 부추길 뿐이다.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말은 그만!
12월 10일 광화문 광장에서 청소년 시국 선언이 있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이하 지음)이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 ‘비상계엄령’ 이후, 12월 4일부터 9일까지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를 막는 청소년 시국선언'을 모집했는데, 여기에 만 19살 미만 청소년 4만 9052명이 참여했다. 시국 선언 사회를 맡은 지음의 ‘난다’ 활동가는 취재 중인 기자들에게 당부를 전했다. “청소년 관련 기사에는 유독 무슨무슨 양, 무슨무슨 군이라는 호칭이 붙는데 청소년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동등하게 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청소년의 행동에 대해 기특하다, 대견하다는 표현을 많이 하시는데 그건 윗사람에게는 쓰지 않고 아랫사람에게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청소년은 나이가 어릴 뿐이지 아랫사람이 아니잖아요.”
이날 청소년들은 미래를 위해 참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현재를 함께 만드는 동료임을 선언했다.
“윤석열은 그동안에도 여러 차례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청소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퇴진 집회를 이유로 청소년 단체가 표적 수사를 당했고, 고등학생이 그린 ‘윤석열차’ 풍자 만화가 경고를 받았다.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이 직접 학생들의 두발 자유, 표현의 자유 등 내용을 담은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라고 주문했다. 국가인권위원장 자리에는 인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해 온 사람을 앉혔다. 윤석열은 연설 때마다 “자유”를 외쳤지만, 시민의 자유는 물론 청소년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에도 적대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비상계엄 사태로 윤석열에게 민주공화국의 대통령 자격이 없음이 분명해졌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사람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의 최우선적 의무다. 이런 의무를 다하지 않는 대통령, 폭력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무너뜨리고 후퇴시키려 드는 대통령은 우리가 거부한다. 윤석열을 탄핵, 내란죄 처벌 등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몰아내야 한다. 청소년도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시민으로서 행동할 것이며, 우리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되찾을 것이다. 나아가 어린이, 청소년이 시민으로 평등하게 존중받는 사회, 미래를 위해 지금을 유예당하지 않는 사회, 함께 살고 참여하고 행동할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학생 입틀막’은 당연하지 않다
청소년 시국 선언은 전국의 학교 단위에서도 계속 발표됐는데 탄핵안이 가결된 12월 14일, 서울 A 고등학교에서는 학생 273명이 발표한 시국 선언이 학교 측에 의해 삭제됐다. 해당 학교의 학칙(학교생활 규정)에는 ‘정치 관여 행위, 학생 신분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자’는 퇴학 조치까지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고, 이에 근거해 학교 측이 선언문을 삭제한 것이다.('윤석열 탄핵안 통과된 날 “우리학교 시국선언은 삭제됐다”', 2024.12.19. <한겨레>, 박현정 기자)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2020년부터 선거연령이 만 19살에서 만 18살로 낮아졌고, 정당법 개정으로 2022년부터 만 16살 이상이면 정당 가입이 가능해졌지만 학교에는 여전히 구시대의 유물인 학칙들이 남아 있다. 지난해 말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학교규칙 실태조사’를 보면 표본 조사한 전국 중고교 538개교 중 중학교 68곳(23.7퍼센트), 고등학교 40곳(19.9퍼센트)에 학생의 정치 활동을 제한하는 규정이 있었다. 학생들의 입을 틀어막는 시대착오적인 학칙조차 바꾸지 못하면서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의 손으로 뽑아낼 수 있기를
12월 3일 계엄령을 선포한 이유 중 가장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대목이 “미래 세대를 위해서”였다. “그 입 다물라!”는 말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미래가 아닌 지금, 우리 곁에서 혐오와 차별이 없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가는 청소년들이 말한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원한다. 우리는 혐오로부터 안전하고,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히지 않은 사회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을 믿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회를 원한다. 우리는 범죄를 저지른 무도한 이가 적법한 죗값을 받기를 원한다. 우리는 삶을 원한다. 누구로부터 위협받지도, 빼앗길 위험도 없는 우리만의 삶을 원한다.”
“우리의 손으로 뽑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손으로 뽑아낼 수 있기를!”

이윤경
사교육 기업에서 홍보 업무를 담당하다 2011년 여성단체 상근 활동가로 취업한 후 마을공동체 살리기, 차별 반대, 교육개혁 운동 등 활동가의 삶을 살고 있다. 소비자를 설득하는 마케터에서 활동가, 상담가, 조직가로 지나온 시간 속에 언제나 ‘진심’을 다했던 경험들이 자랑이자 자산이다. 공저로 "대한민국 교육트렌드 2024", "한국 교육의 오늘을 읽다", "학교, 회복을 담다", "체벌 거부 선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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