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개인전

1.

인간이 일어나게 한 전 지구적 기후 변화는 자연과학의 대상인가 사회과학의 대상인가?

자연과 사회 영역을 확고히 분리해 왔던 근대적 사유가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된 오늘날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 문제에는 더 넓은 다학제 간 사고가 요청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경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이 공동체의 넓은 이해와 대화가 필요하듯,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도나 해러웨이는 미술과 과학의 연대를 통한 가능성을 강조했다.

2.

이러한 인류세에 대한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아니카 이(1971-)의 전시를 위한 접근 방법은 독특하다. 아니카 이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미생물학자들과 협업하여 박테리아 표본을 얻기 위해 여성 백 명에게 면봉과 비닐 백을 주고 체액을 채취했다. 그리고 이를 수조 모양의 용기에 배양하여 독특한 냄새로 갤러리를 채우는 형태로 전시를 한다. 여기서 작가는 미생물 박테리아나 곰팡이를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인간과 미생물의 경계에서 이들이 이미 서로가 오랜 세월 공존하고 영향을 주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특히, 아니카 이의 작품 제목이 스토리텔링적인데, 이는 비인간 존재들에게 의인화를 통한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이들과 친화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리움미술관은 현재 이러한 아니카 이의 ‘인류세’에 관한 개인전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2024.12.29)을 개최하고 있다. 전시 작품들은 지난 십여 년간 제작된 작가의 독특한 작업 세계를 비롯하여 기술과 생물 사이의 유기체적 감각을 연결하는 실험적인 최근 경향도 보여 준다. 박테리아 향이나 '덴푸라 꽃 튀김' 연작처럼 유동적이고 일시적인 재료를 사용해 인간의 감정과 감각의 유동성을 물질적으로 잘 포착한 작업들이 대표적이다.(그림 1)

(그림 1) '후기 고전파 XVIII', 아니카 이, 2022. (사진 출처 = 글래드스톤 갤러리)
(그림 1) '후기 고전파 XVIII', 아니카 이, 2022. (사진 출처 = 글래드스톤 갤러리)

인간 중심주의에 도전해 온 최근 작업에서는 기계, 균류, 해조류 등을 탐구하는 다양한 전문가들과 협업을 통해 인간(나)과 비인간(타자)의 경계를 오가는 작업으로 이번 전시를 이어 갔다. 바로 '방산충' 연작이다. 최초로 생명체가 지구에 살기 시작했다는 고생대 해파리처럼 혹은, 바다에서 서식하는 세포를 닮은 꼴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많이 보인다. 고생대에 처음 등장한 단세포 동물 방산충류 모형이 기계적 작동으로 살아서 숨을 쉬듯이 움직이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광섬유 표면을 따라 빛이 깜빡일 때마다 드러나는 내부 기계 장치는 인공물과 유기체의 혼합적 잡종의 모형을 하고 있다. 기계의 생물화 과정인 것이다.

대표작인 '덴푸라 꽃 튀김' 연작에서는 한때 향기와 생기를 지니던 꽃들이 밀가루 반죽을 입고 기름에 튀겨지면서 칙칙한 꽃으로 흉물스럽게 남는다. 덕분에 생화의 시들어 가는 자연화 과정은 이를 멈추는 튀김 화석이 되고 만다. 튀김 꽃들과 함께 배치된 쇳덩이 운동 기구와 같은 소재는 우리의 신체 활동을 연상하게 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일차원적이고 물질적인 소화와 배설 활동은 인간만이 가진 우월한 이성에 대한 환상을 접고 신체의 물리적 본질에 집중하게 한다. 이는 초기작에서부터 작가가 강조한 맛, 냄새, 침, 분비, 땀 등의 원초적이고 저급한 물질적 측면의 연장선이다. 이상적인 인간의 우월성은 마치 ‘덴푸라 꽃 튀김’에서처럼 그저 혼합된 물질로 이루어진 호모사피엔스에 불과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박테리아를 사용한 신작 '또 다른 너'(2024)에서는 거울 속 동굴 형태의 끝없는 환영이 그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게 만든다. 동굴 속 깊은 곳에 배양된 박테리아는 해양 유래 형광 단백질이 ‘인공 자연’의 은은한 색을 발한다.(그림2) 세균이 합성되어 해양 생물의 유전을 계승하는 모습은 고대 바다와 현재의 우리를 물질적으로 연결시키면서 다시 한번 지구라는 표면에 자연과 문화를 뒤섞어 놓는다. 이러한 바이오 픽션을 사용해 지구 역사에서 주인공이었던 인간의 뒤에 물러나 있는 비인간 존재들을 현재의 인간과 나란히 놓는 것이다.

(그림 2) '또 다른 너', 아니카 이, 2024. (사진 출처 = 리움미술관)
(그림 2) '또 다른 너', 아니카 이, 2024. (사진 출처 = 리움미술관)

3.

인류세의 변화들은 인간 활동이 지구 시스템의 ‘항상성’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렸기 때문에 초래되었다. 이에 도나 해러웨이는 기술 정보를 대안으로 삼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세계 연구를 통해 인간 아닌 생물들과의 연대로 소동을 일으킨다는 시나리오를 쓴다. "Staying with the Truo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2016)에서 주장한 크툴루세(Chthulucene)가 그것이다. 크툴루는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외계 생물체로 깨어날 경우 지구에 재앙을 가져온다. 이에 해러웨이는 비인간들과의 연대와 앎, 행동을 통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실천을 촉구한다. 과학기술과 인간의 의지로는 자연 환경과 모든 비인간 존재를 통제할 수 있다는 근대주의적 확신은 이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번 리움에서 전시하는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역시, 우리는 이 지구라는 행성에 발을 붙이고 사는 수많은 존재 중 하나일 뿐이며 연약하고 유한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김연희

홍익대학교 예술학 박사(미술 비평 Art Theory and Criticism ph.D)
미술 평론 및 대학에서 예술 이론 강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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