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가을이 왔다. 지난달에 907 기후정의행진에 갔다가 폭염에 며칠을 누워 있다가 다시 살아나서 뻘뻘거리며 밖으로 다니고 있다.

어느 날은 동료의 재판, 세종 환경부 앞 거리 미사, 금강 세종보 천막에 다녀왔다. 재판정 앞에서 전국 여기저기서 동료들이 모였다. ‘푸른 하늘의 날’에 환경부 앞에서 ‘누운 죄’가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약식 기소된 봄봄은 생긋 웃고 있었지만, 우리는 미안한 마음에 “아이고 오랜만이야!”, “이게 뭔 일이여!” 하며 더 시끌시끌했다. 법정에서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또박또박 읽는 그의 진술을 들으며 나는 속이 미어졌다. 우리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문제를 말하면서도 희망을 노래하는구나. 폭우로 천막이 떠내려가서 새 천막을 친 세종보에서 녹색연합 활동가 성중 님이 망가진 물건들을 수리하고 있었다. “비싼 것만 골라서 떠내려갔어요” 하면서 허허 웃는 모습을 보며 나는 ‘자주 못 와서 미안하구먼요’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고 가져간 김밥 하나를 슬쩍 밀었다.

금강을 살리고자 세종보 재가동 중단 및 물정책 정상화를 위한 천막농성. ©오현화
금강을 살리고자 세종보 재가동 중단 및 물정책 정상화를 위한 천막농성. ©오현화

올해 창조 시기의 마지막은 삼척으로 달려갔다. 아이들 둘과 부지런히 삼척을 가는데 대관령 터널을 지나자마자 하늘이 깜깜해지더니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삼척에 다 와서 비가 좀 그치는가 싶더니 바다에 거대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세상은 깜깜해지고 있는데, 한창 항만 건설 중인 바다 위에 고고히 선 거대한 무지개를 보며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삼척 우체국 앞에는 가톨릭기후행동 동료들이 이미 서 있었다. 때마침 내리는 비를 피하면 우산 속을 쏙 들어가서 “잘 지내요?” 하면서 인사했다. 나는 삼척에 제시간에 도착한 적이 없건만, 올 때마다 잘 왔다, 수고했다는 소리만 들었다.

그날 저녁 숙소에 꽁치 최아숙 작가님이 찾아와 나무로 된 꽁치 책갈피에 다 같이 색칠했다. 색색의 개성 있는 꽁치들을 보며 “아이고 곱다!”며 서로 칭찬하기에 바쁘다. 꽁치 작가 일 너무 많이 한다고 다들 걱정이다. 같은 날 다른 일정으로 삼척에 온 팔당식생활연구소의 미선 님을 만나야 한다면서 삼척평화님과 티나 선생님이 의기투합해서 다음 날 새벽 ‘번개시장’을 가기로 했다. (최아숙 작가님 소개 보기)

함께 색칠한 나무 꽁치 책갈피. ©삼척평화
함께 색칠한 나무 꽁치 책갈피. ©삼척평화

번개시장은 삼척역 앞에 열리는 새벽 시장이다. 나는 새벽 미사도 잘 못 가는 사람인데, 그냥 “네, 네” 하고 같이 가겠노라 했다. “젊은 사람이 힘들지 않겠어” 하고 걱정하시길래 “저 안 젊어요”라고 말해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 새벽 어스름에 도착한 번개시장은 작지만 얼마나 다채로운지 눈으로만 보기 미안할 정도였다. “사진만 찍지 말고 좀 사라고!!” 시장 어머니들이 작게 타박하시는데, 운전만 하는 줄 알고 아무것도 안 가져와서 이 가게 저 가게 구경만 했다. 미선 님과 일행을 만나자 다들 또 까르르 웃는다. 동해안 쪽 식재료를 보러 오신 미선 님이 동행한 ‘집밥본능’ 고은정 선생님(유튜브 채널 보기)을 소개해 주셨는데 만나자마자 다들 친해졌다. 그렇게 다 같이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벤치에서 메밀전을 먹었다. 바로 뒤에서 마른 고추를 다듬던 최원희 작가님을 보고 삼척평화 님이 반갑게 인사한다. 어쩜 삼척에서는 이렇게 인연이 곶감처럼 엮이는지 모르겠다. 번개시장의 모습은 웃음도 말간 최원희 작가님 작품으로 보는 게 더 생생할 듯하다.(작품 보기)

번개시장 ©오현화
번개시장 ©오현화

그다음 주에는 한일탈핵평화순례에 다녀왔다. 바로 전까지 다른 일정이 있어서 부산 일정에만 합류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온 고운 사람들을 잔뜩 만났다. 처음 뵙는 분한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니 “오하이오” 하고 생긋 웃으신다. 행사를 위해 뒤에서 바지런히 뛰어다니던 유미 선생님은 알고 보니 독일에 우리 동네 살던 분이셨다! 우리 가족이랑 두 달 엇갈리는 바람에 그동안 몰랐던 것이다.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는가 보아요! 밤에 식당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오하라 선생님 통역으로 일본에서 온 와타나베 선생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에 있던 삼척평화 님이 “이분이 1945년생이야. 그러니 안젤라도 그때까지 운동해야지!” 하신다. 아.. 그전까지 세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나요.

다음 날 강의를 듣고 점심 식사 후 고리 지역으로 이동했다. 언주 님과 세현 님을 보며 여기서 봐서 반갑다며 깔깔깔 웃으며 인사했다. 10월인데도 체감 온도 29도가 실화냐 투덜거리며 핵발전소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송전탑들을 지나 공사 중인 도로의 먼지를 온몸으로 맞으며 걸었다. 바다는 이토록 아름다운데 우리나라는 송전탑이 이렇게나 많구나. 강원도도 부산과 울산도 송전탑이 너무 많다. 이 전기는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고리를 마지막으로 일정을 마무리하는 나와 딸아이를 마침 오신 장영식 선생님께서 울산역으로 태워 주셨다. 고마워요. 덕분에 에너지 한 줌 남기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그래요. 이 장영식 선생님이십니다. 자랑해야지. 장영식 선생님 보기)

고리 핵발전소를 향해 가고 있는 한일탈핵순례단. ©삼척평화
고리 핵발전소를 향해 가고 있는 한일탈핵순례단. ©삼척평화

비루한 체력으로 가끔 돌아다니는 나는 길 위에서 많은 환대와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러니 혹시 현장에 가는 것이 주저된다면, 그 마음은 잠시 내려놓으시고 첫발을 떼시기를 초대한다. 한 번 가고 두 번 가다 보면 사람도 산도 강도 벗이 된다. 거저 주고 거저 받는 벗. 이 글의 사진들도 삼척평화 님의 배려로 받은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지나면서 나는 산에 꽂힌 수많은 송전탑과 흐르는 강들, 무한한 바다를 만났다. 그 존재들은 우리를 이어 주면서 우리가 “희망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인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찬미하며 다시 나는 길에 오른다. Laudato Si!(찬미받으소서)

오현화

가톨릭기후행동 공동대표, 마을 활동가, 세 아이 엄마.
매일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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