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드 교회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교회의 길을 간다는 뜻이다. 말은 간결하나, 그 뜻은 길다.
얼마 전 의정부 교구장인 손희송 주교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분은 시노달리타스(함께 걷기)를 “동행”이라는 말과 닮았다고 말했다. 그 말은 교회의 역사가 이러한 동행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구약에선 하느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셨고, 신약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승천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며 동행을 약속하셨다. 시노달리타스를 이야기하는 또 다른 성경적 근거로 흔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의 동행을 떠올린다.(루카 24,13-32) 손희송 주교님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동행 교회에서 그 누구도 앞서가는 사람 혹은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함께 가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같이 걷고 있는 이웃을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잘 살핀다는 것은 그의 땀을 닦아 주고, 함께 쉬어 주고, 내 보조를 그에게 맞추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쉬운 듯하지만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주에 익숙하지 동행에 익숙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웃을 살핀다는 것은 내가 겸손할 때 가능한 것이다. 함께 걷는 교회의 길, 즉 동행자의 필수 조건은 겸손인 것이다. 겸손해야 내 이웃의 상황을 알고, 거기에 맞추어 동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 대단히 겸손한 왕이 살았다. 그는 왕임에도 낮은 사람들에게 자주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신하가 이 모습을 보고 “왕이시여 당신은 이 나라의 지존이십니다. 머리는 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귀한 부분으로서, 당신은 그런 머리로서의 왕이십니다. 함부로 남에게 머리를 숙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왕에게 간곡히 청원했다. 그러자 왕은 신하에게 ‘고양이 해골’, ‘말 해골’ 그리고 ‘사람 해골’을 하나씩 주면서 시장에 가서 팔아 오라고 일렀다.
그 신하는 영문은 몰랐지만 왕이 시키는대로 시장에 나가 그것들을 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고양이 해골을 집에 걸어 두면 쥐가 없어진다고 사 갔고, 말의 해골은 병마에 시달리지 않는 다고 생각하며 사 갔다. 그러나 사람의 해골은 사 가는 사람이 없어서, 신하는 그것을 들고 왕이 사는 궁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정 이야기를 들은 왕은 신하에게 말했다. “사람의 머리가 귀한 것은 그 머릿속에 선함과 의로움이 들어 있을 때 귀한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빈 해골이라면 고양이나 말의 해골만도 못한 것이라네”라고 말하며 신하에게 겸손의 지혜를 깨우쳐 주었다.
문뜩 예전에 함께 사목했던 인도인 마이클 신부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인도 사회와 교회 안에서도 카스트 문화의 잔재가 여전히 건재하다며, 인도 교회의 발전은 카스트 문화의 위계적 규범의 척결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도 신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태초에 신이 인간을 만들 때, 가장 높은 신분은 신의 머리에서 나왔고, 가장 낮은 신분인 하리잔은 신의 발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사람들 모두가 신의 고귀한 지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갈라 3,27-28) 우리가 함께 동행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고귀한 지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겸손을 갖추고 동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거룩한 하느님의 모습이 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겸손하게 동행하지 않고, 경주를 하려고 하면, 손과 발이 떨어짐으로써 하느님의 온전한 모습이 기괴한 모습으로 세상에 보여질 수도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의 제일 중요한 덕이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겸손”이라고 답해 주었다. 많은 사람은 저마다 높아지려고 무작정 높은 곳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형제자매들과 동행하는 교회의 길에서도 사람들은 경주를 하려고 한다. 경주는 다른 사람보다 가장 먼저 전력을 다해 앞서가는 달리기다. 달리기로 동행을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름값 하는 높은 자리와 남들보다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다.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동행과 경주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그 시간이 다가왔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는 동행하는 시노드의 길을 향해....
최영균 신부(시몬)
수원교구 사제로서 다양한 본당에서 사목하였고,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에서 가톨릭인문종교학을 연구하며 나누는 사목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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