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매달 세 번째 월요일에 '함께 가는 길'을 총 6회 연재합니다. 사목 체험 안에서 묵상한 시노달리타스(함께 걷기)의 가치와 이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최영균 신부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내가 몸담은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는 변화하는 세상의 환경에 맞추어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이해하고 발전시키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목적은 누군가 혼자만의 힘으로 수행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연구소는 학술문화 선교와 사목을 지지하고 동반해 주는 많은 봉사자, 후원자 그리고 교회학자들에 의해 운영된다.
그러나 이곳 연구소 공동체 역시 바람 잘 날 없다. 본당(성당)은 지역 사회라는 동질적인 공간에 대한 기억과 규범이 공유되는 곳이지만, 이곳은 소장의 개인 친분과 우연한 인연으로 모인 서로 이질적인 배경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나는 연구소의 교육과 행사를 실행하면서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갈등으로 인해, 곤란한 상황을 자주 맞이하곤 한다.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 의견 불일치,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적 문제들로 반목하곤 한다. 소장으로서 일일이 관련된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여간 버성긴 일이 아니다. 본당에서라면 자체적으로 해결을 보거나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 문제가 이곳에서는 공동체 전체가 큰 타격을 입는다.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 뜻대로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체 내의 반목과 갈등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던 터에 덥수룩해진 머리를 자르기 위해 주일 오후에 연구소 인근 발안이라는 동네로 나갔다. 화성 지역에는 작은 공장이 많아 외국인 근로자가 많이 살고 있어, 발안 시내는 외국인들로 가득했다. 딱 보아도 같은 인종은 별로 없었다.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서남아시아 그리고 중국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거리에는 신기한 것도 많이 팔고 있었는데, 나는 즉석에서 만들어 주는 사탕수수 주스, 코코넛 음료를 사 마시고 저녁 식사로 터키 케밥을 먹었다. 다양한 얼굴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먹거리도 맛있고, 가격도 착했다. 연구소에서의 단조로운 일과와 고민들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와 사람을 접하니 마음이 훨씬 가볍고 여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가 생각났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 교외의 언덕에 살며 강도를 일삼는 악당이었다. 그는 강도질을 하며 납치한 사람들을 자신이 만든 철제 침대에 누이고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내고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늘여서 죽였다고 한다. 문제는 이 침대의 크기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프로크루스테스만이 알고 있는 장치를 통해 늘었다 줄었다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침대에 키가 들어맞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 결국 프로크루스테스의 기행은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의 귀에 들어가고,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서 침대에 누이고는 똑같은 방법으로 머리와 다리를 잘라 해치웠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자신과 다른 생각과 말을 하는 사람을 공격하여 자신에게 맞추려 하는 모든 행위를 꼬집을 때 쓰기도 한다.
시노달리타스 교회론에서 중요한 개념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천명한 “하느님의 백성”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 평등하게 고귀하며, 모두 주님의 지체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모임, 즉 교회가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창한 시노달리타스 혹은 시노드 교회는 이러한 하느님의 백성 개념에 담지된 의미를 교회의 구체적인 제도와 문화 안에서 구현하자는 개혁 운동의 성격을 띤다. 하느님의 백성은 세상과 인간의 다양성이 갖는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누구를 만났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에 따라 모두 제각기 다르다. 교회 안의 신자들이나 성직자 수도자들 역시 저마다 고유성을 지니고 있어 다양하다. 시노달리타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를 쇄신하자는 것이다. 즉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몫을 다하는 것”이다.
교회의 각 성원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고유한 것이고, 다양한 소명들이 한데 어우러져 하느님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회 생활의 기준을 자신으로 삼아 다른 사람을 자신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거나, 교회의 올바른 전통에 준거한다고 강변하며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과 뜻을 강요하려고 한다. 즉 우리는 자신만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를 준비하여, 다른 사람을 거기에 눕힌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성직주의’라고 한다. 성직주의는 사제들의 권위주의와 독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자신의 기준으로 억압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시노달리타스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 안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를 파괴해야 할 때다.
최영균 신부
수원교구 사제로서 다양한 본당에서 사목하였고,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에서 가톨릭인문종교학을 연구하며 나누는 사목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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