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실천운동’으로서 평신도 신학운동

올해는 우리신학연구소(이하 우신연)가 창립 30주년이 되는 해다. 삶의 숭고한 목적 중의 하나가 ‘생존’하는 데에 있는 것이라면 지나온 한 세대, 한국 천주교회에서 평신도 신학자 또는 활동가로 살아남은 것은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값진 일이었다고 느낀다. 갈등과 고뇌와 슬픔의 시간이었고 동시에 은혜와 기쁨과 감사의 시간이었다. 그 생존을 가능케 한 생명선(lifeline)을 찾는다면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무게가 많이 실린다. 이 자리를 빌어 우신연을 지지하고 후원해 준 하느님의 백성 모두께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 본격적인 평가와 전망은 다른 자리에서 마련되리라 보고, 여기서는 좀 더 편안하고 가볍게(?) ‘연구자 운동’으로 출발한 우신연의 족적을, 필요하다면 거두절미하여 부분만을 이리저리 뜯어도 보고 붙여도 보고 함으로써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말머리로 삼고자 한다. 그렇기에 이 글은 집단으로서의 우신연을 말하고 있지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며, 따라서 그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 혹은 찬사가 있다면 그것도 오로지 내 몫임을 밝힌다.

내가 생각하는 평신도 (신학) 운동은 무엇보다도 ‘신앙실천운동’이다. 물론 주관적인 판단이요 규정이다. 여기서 신앙은 개인과 사회의 구원을 염원하고 이를 구현하고자 하는 활동 전반을 방향 짓는 세계관, 혹은 그것의 기반이라 말할 수 있다. 개인의 실존은 동시에 사회 및 역사적 실존이므로 우신연의 신앙실천은 그러한 인간 실존과 신앙의 동시성에 바탕을 두기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 성격을 띤다. 그것을 얼마나 잘해 왔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나는 신앙 체험이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며 또 그것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한 경쟁과 상품화를 태생적 자기 논리로 삼음으로써 구조적으로 ‘죄를 필연화하고 양산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우신연이 신앙적, 실천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이를 ‘신학운동’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해 왔다는 사실이다. 우신연이 ‘운동’의 성격을 잃지 않고 지켜 왔다면 이 방향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이는 ‘하느님나라의 실현’을 대망하고 추구해 온 성서적 전통, 복음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는 신학적 수사를 덧붙일 수도 있겠다. 미약하나마 다른 교파나 타 종교, 때로 시민사회와 연대를 통해 시민사회운동의 일부로서 참여해 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사실 가톨릭교회 안에서 다른 운동 조직이나 단체들과는 그리 연대가 활발하지 못했다. 교회 내 많은 운동 단체가 ‘교회 안에서 사회운동을 한다’는 의식은 강했지만, ‘교회 쇄신과 개혁’이라는 우신연의 주요 관심사와는 잘 섞이지 못했다. 시기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기에 이 단체나 조직들은 대개가 ‘사회운동을 하기 위해 교회를 활용하는’ 측면이 강했던 반면, 정작 ‘교회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들에게 우신연은 아마도 정확히 그 반대로 보였을 법도 하다.) 이는 당시 천주교 운동 단체들의 성명서만 일별해도 금방 드러난다. 단체들은 상황에 따라 자기 운동의 정치적 아젠다의 변화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종교 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은 한 세대 동안 줄곧 성명서 맨 앞에 성서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반군사독재 민주화 투쟁에 이어 노동자 농민 계급이 주도하는 민중민주주의 운동이라는 시대적 요구는, 어쩌면 그러한 정체성 논의를 ‘한가한 것’으로 치부할 만큼 급박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것의 원인이자 결과로서 ‘교회(신앙)’와 ‘사회(운동)’가 이원화하여 따로 떨어지게 되었고 그럼에도 이를 크게 의식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곧 ‘신앙 따로 운동 따로’인 채 신앙과 운동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조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그런 의미에서 종교 운동으로서의 내적 기반은 취약했다. 거꾸로 이는 끊임없이 정체성 문제에 부딪히는 원인이 되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본격적, 지속적 모색은 이뤄지지 않았다. 신앙과 운동을 연결시키지 못한 문제는 교회 대중을 설득할 언어, 문법, 정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결국 교회 대중을 운동의 주체로 세워 내지 못하고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인다. 이런 이원론적 신앙의 영향은 여전하며 따라서 이를 내파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쇄신으로서 신앙실천운동의 핵심 중 하나라고 믿는다.

1994년 4월 13일 인천시 송림동 소재 신협 건물에서 열린 우리신학연구소 인천 연구실 개소식 장면. 당시 우신연은 서울과 인천 연구실 두 곳을 운영했다. (사진 제공 = 우리신학연구소)
1994년 4월 13일 인천시 송림동 소재 신협 건물에서 열린 우리신학연구소 인천 연구실 개소식 장면. 당시 우신연은 서울과 인천 연구실 두 곳을 운영했다. (사진 제공 = 우리신학연구소)
우리신학연구소 홈페이지 메뉴와 소개 글 일부. (이미지 출처 = 우리신학연구소 홈페이지 갈무리)
우리신학연구소 홈페이지 메뉴와 소개 글 일부. (이미지 출처 = 우리신학연구소 홈페이지 갈무리)

교회 개혁으로서 평신도 신학 운동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게 무척 새삼스럽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한 부문 운동으로서 천주교 운동이 생존하는 한,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까지 유야무야 넘어왔던 예의 그 문제를 차제에 짚어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우신연은 태동에서부터 ‘사회복음화와 교회쇄신’을 운동의 목표로 표방했고, 특히 후자는 교회 구조의 쇄신과 개혁, 평신도의 교회 내 역할 및 평등성 제고, 신앙운동을 위한 이론으로서의 신학의 쇄신 등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의 교황직 30여 년 동안 교회 구조의 개혁이나 평신도의 역할과 지위 제고는 거의 불가능했다. 더욱이 가부장적이고 전시적 병영 체제로서의 한국적 군대 문화 아래 교회에는 성직자중심주의가 견고하게 교회 삶 구석구석에 뿌리내렸다. 이에 대한 우신연의 교회 문화 및 구조 쇄신을 위한 노력은 심포지엄이나 세미나, 또 각종 언론에 칼럼이나 기고문을 통해 2차 바티칸공의회와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의 권고 사항 이행을 촉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지만 이렇다 할 만한 변화는 없었다. 어쩌면 교황-주교-사제-수도자-평신도의 수직적 위계 질서를 가톨릭의 ‘정체성’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에서 교회구조 개혁은 애당초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가톨릭교회는 피라미드식 구조와 그것을 옹호하는 교리의 ‘표층’이 너무도 두터워서 그 변화 가능성은 정말 희박해 보였다.

그러나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와 그해에 나온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출간 뒤부터 세계 교회 차원에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교황은 ‘더 이상 미룰수 없는 교회 쇄신’(27-33 항)을 강조하면서 ‘야전병원론’(Field Hospital), ‘역피라미드론’(Inverted Pyramid), ‘다면체론’(Polyhedron) 등 교회상과 관련해 다양한 ‘탈중앙집권적’ 쇄신 모델을 제시했다. 동시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러 자의교서를 발표해 교황청 내 주요 직책에 평신도, 특히 여성 평신도 기용 등을 위한 교회법을 지속적으로 개정해 교회 제도 및 구조의 개혁을 단행해 오고 있다. 이를 통해 교회 쇄신과 개혁에 적극 나서고 있는 존재는 교회 수장인 교황이며 많은 권고와 제안을 쏟아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고 있는 것은 한국을 포함한 지역 교계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교황의 각고의 노력에도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무관심을 보노라면 변화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신연은 지나온 30년처럼 앞으로도 계속해서 ‘예언자적 목소리’(whistle-blower)를 내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행하는 방식이 전과 같을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풀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전례 개혁과 평신도 사회운동

종교학 이론에서 종교나 종교성의 범주는 ‘어디에, 어떻게 금을 긋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 특히 의례를 중시하는 종교는, 이를테면 제대 위에 무엇을 어떻게 놓느냐 하는 ‘사소한’ 문제가 그대로 종교의 형식과 내용이 되고 신도의 신앙을 지배하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1988년 파문당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창립한 ‘비오 10세회’의 복권 문제와 라틴 미사 허용 문제를 둘러싼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조적 시각과 조처는 그것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07년과 2009년 두 번의 자의교서를 발표해1) 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혁을 전면적으로 반대한, 특히 트리엔트 양식의 미사를 고집한 르페브르 대주교가 서품한 주교 4명의 파문을 철회하고 라틴어 미사를 주교의 승인 없이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였다. ‘형제의 일치’ 차원에서 내린 조처였다지만 이는 전체 가톨릭교회의 분열을 가속시키고 공의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1년과 2022년 역시 전례에 관한 두 자의교서를 발표해2) 전임 교황의 결정을 뒤집었다. 라틴 미사 집전 권한 및 전례문 사용 권한을 바티칸의 재가 아래 전적으로 주교에게 주는 것으로 제한하고 현대 교회 진리의 기준으로 공의회의 권위를 재천명했다.

이 논란의 핵심은 라틴어 미사 유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신자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벽을 향해 미사를 드리는 트리엔트 양식 미사의 복원, 즉 ‘성과 속’의 이원론적 구분에 따라 선과 악, 영혼과 육체, 성직자와 평신도, 교회와 세상을 철저히 나누고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으로 분리해 낸 데 있다. 악하고 추한 후자는 전자에 의해 정화되고 구원받아야 하므로, 세속에 사는 평신도는 철저히 성직자에 의지해야 하는 만큼 주체적 신앙인으로서의 평신도상은 논리상 거부된다. 당연히 이는 평신도의 시민적 역량의 성숙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며 그 결과 시민사회의 일부로서 천주교 사회운동은 성장하기 어렵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양한 운동 아젠다를 갖고 있는 교회 안의 단체와 조직들 각자에게 적합한 성찰과 식별이 요구된다. ‘신앙실천운동’으로 자신의 운동을 규정하는 한, 다시 말해 운동의 주체요 대상이 신도임을 인정하는 이상, 이 문제는 피해갈 수 없으며 머리를 맞대고 함께 극복할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1) 2007년 '교황들'(Summorum Pontificum) 발표해 트리엔트 미사 양식 허용했으며, 이어 2009년 '교회 일치'(Ecclesiae Unitatem)를 통해 르페브르 대주교가 서품한 주교 4명의 파문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2) 2021년 '전통의 수호자들'(Traditionis Custodes)을 발표해 라틴어 미사 집전 관련해 사제가 아니라 교구장 주교들에게 승인 권한을 주었고, 2022년 '나는 간절히 바랐다'(Desiderio Desideravi)를 발표해 '전통의 수호자들'의 연장선에서 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미사 양식에 따른 미사 거행을 제한하는 한편 공의회의 전례 개혁과 정통성을 재강조했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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