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연 세미나, 사회 광범위한 적대 문화의 뿌리인 민간인 학살 다뤄
한국 사회, 정치, 경제, 종교, 문화에 걸쳐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는 적대 문화는 한국전쟁 시기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민간인 학살의 기억과 깊이 연결된다. 28일 우리신학연구소는 이와 관련해 '전쟁 중에 발견한 인간성의 희망'을 주제로 줌 세미나를 열었다.
이날 발표는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최태육 목사(평화박물관 연구위원)가 맡고, 박문수 소장(우리신학연구소)이 토론했다.
한국전쟁 시기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로 죽은 이는 공식 통계조차 없지만,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기록원에서 집계한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 사망자 13만 7899명, 유엔군 사망자 4만 732명과 비교되지 않는 규모다. 하지만 국가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를 토대로 확인된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5만 8000명뿐이다.
최태육 목사는 마을마다 학살의 광풍이 불었는데도 유독 피해가 없거나 적었던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엔 참 인간과 탄탄한 공동체가 존재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폭력과 개신교를 연구하면서 개신교에 구원이 없다는 생각에 절망하기도 했지만, 20여 년간 민간인 학살 연구를 통해 지속적으로 평화와 치유, 그를 통한 화해를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종교가 유일하고, 그런 점에서 종교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 목사는 1992년부터 8년간 목회하면서 주민들 간 또 교인들 간에 뚜렷한 경계와 냉대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뿌리에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화해와 사랑을 말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웃으로 함께 살며 같은 교회를 나가면서 끝없이 분열과 갈등을 반복하는 현실을 가슴 아프게 목격한 것이다.
그는 2007년 목회를 접은 뒤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관으로 활동하면서 민간인 학살의 참상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최태육 목사는 태안 지역 민간인 학살 희생자 전수조사를 진행하면서, 어떤 마을에 가면 두세 명밖에 안 죽었는데 어떤 마을에 가면 70-80명이 넘게 죽어 마을마다 편차가 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제가 전수조사를 했기 때문에 알아요. 태안에서만 천 명 정도의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씨족 문제나 소작 문제, 종교 문제들로 대대로 갈등이 있었던 마을은 학살의 규모도 굉장히 크고 잔인해요. 반면에 갈등이 별로 없었던 마을의 경우는 학살의 규모가 작았어요.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한이 됐건, 북한이 됐건 국가 권력이 반동이나 빨갱이를 처단하라고 지시를 내려도 그 마을이 어떤 문화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학살의 규모가 커질수도, 작아질 수도 있었던 거지요.”
그는 충남 서산, 태안 지역과 2020년 아산 지역 민간인 학살 현장조사, 2021년 강화도 마리산의 평화마을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산 음봉면 ‘ㄷ’ 마을에서 학살을 막은 사례를 소개했다.
인민군이 아산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동네 어른들은 이장을 불러 모임을 갖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뺨을 때리거나 해서 서로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을 만들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장은 인민군 점령 이후 마을 인민위원장이 되었다. 바로 옆 마을 사람들까지도 ‘궐기 대회’로 끌려가 처형을 당하거나 추방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마을 인민위원장은 단 한 명도 반동으로 지목하지 않았고, 누구도 추방되거나 학살당하지 않았다.
반대로 국군이 다시 수복한 이후 경찰서와 지서는 마을별로 조직한 치안대와 부역자심사위원들에게 인민군 점령기 부역한 사람들에 대한 체포를 지시했다. 다른 마을과 달리 이 마을에서는 단 한 명도 연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최태육 목사는 이 마을이 다른 마을과 달랐던 점은 진영의 경계를 넘어 상호 의논하고 협력해 왔던 마을 문화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학살을 연구하면서 정신질환도 많이 겪었지만, 이러한 사례들을 접하면서 인간 사회에 대한 신뢰가 조금씩 생기게 되었다고 전했다.
박문수 소장은 최태육 목사의 이야기를 이전에 접하고 교우촌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수소문했다며, 서산의 해미면 대곡리라는 교우촌(신자 비율 80퍼센트)에서 음봉면 ‘ㄷ’ 마을과 유사한 마을문화가 있었고, 그로 인해 피해가 적었다고 전했다.
또한 지주 소작 관계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잘 실천한 마을은 피해가 없거나 매우 적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다른 나라 사례와 견주어 볼 때도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이 유독 많았던 이유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전쟁들은 전선이 고정되고 한 군데서만 전쟁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전쟁은 '인천상륙작전'과 '1.4후퇴' 등 남북으로 오르락내리락 왕복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아군, 적군이 교차하면서 피해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 세미나 참여자는 "전쟁이라는 참혹하고 극한 상황에서 종교가 무슨 역할을 했고, 할 수 있었을까?"를 물었고, 최태육 목사는 한국전쟁 시기 종교는 절대적으로 무력했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인 불신과 적대 프레임은, 요즘도 자주 목격할 수 있는 광장의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이들은 상당수가 종교인이고, 개신교인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고 말했다. 이는 개신교 주류 세력의 신앙이 철저하게 기복 신앙이고, 사익을 추구하기에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강한 자의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여순 사건에서 토벌사령관 2명과 서북청년단의 주류가 개신교라는 사실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천주교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가해자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최 목사의 의견에 덧붙여 한 참여자는 개신교와 같은 구체적인 사례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주류 교회가 신축교난 같은 역사적 진실과 화해라는 측면에서 바로잡아야 할 과거가 있지만 그럴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개신교가 같은 형제 교회이니 에큐매니컬 차원에서 이러한 노력이 함께 진행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태육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2015년 목원대학교에서 '남북 분단과 6·25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기독교의 관계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반도 통일역사문화연구소와 성공회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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