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권여선, 문학동네, 2023
단편의 여제. 권여선이 돌아왔다. 그녀의 소설은 한층 더 깊어지고 세련되어졌다. 이번 단편선은 개인적으로 울림이 컸고 감동도 컸다. 특히 "사슴벌레식 문답"은 과거 이념과 체제의 갈등을 겼었던 젊은이들의 삶을 훗날 쓸쓸하게 조망하는 한편, 네 명의 친구들을 통해 인간의 삶과 불가항력적 관계성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슴벌레식 문답은 우리 삶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일과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좌절과 체념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인정과 받아들임, 그로 인한 안타까운 관계의 변절과 쇠락을 쓸쓸히 담아낸다.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싶어.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사슴벌레식 문답.
그것은 때로는 의젓한 멘트로 때로는 무서운 강요와 칼 같은 차단,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표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때로는 내가 인생의 어디쯤을 지나가는지, 또는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풋풋하던 스무 살 시절. 그 시절을 함께하던 친구 넷에게 일어난 사건,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아닌 타인, 나와 다른 너를 이해하고 헤아려 보고픈 주인공 준희의 독백과 사유는 우리 모두에게 작은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킨다. 준희, 부영, 정원, 경애. 이들은 곧 나의 모습인 동시에 너의 모습이기도 하다. 때로는 부영의 모습으로, 정원의 모습으로 경애의 모습으로. 그리고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흘러가는 세월과 멀어진 관계에 속절없이 당하고 끙끙대는 주인공 준희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떻게 그래?
어떻게든 그래.
어쩔 수 없이 그래.
이게 인생이고 이게 인간이야.
그것이 또한 우리들이야.
소설은 마치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 주는 듯하다.
그런 네 명의 주인공이 각자 자신만의 계절을 지나고 있듯 우리 역시도 삶에서 의문과 놀라움, 결연한 의지와 맞붙는 불가항력적인 좌절과 체념을 거치며 각각의 계절을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그 수많은 부딪침과 체념을 통과하며 결국 그게 인생이고 그게 인간인 거지라는 적절한 합의와 당위에 도착하는 시간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합리화를 뒤엎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이해’가 아닐까.
어떻게 그래?
어떻게든 그래.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인간의 나약하고도 정직한 이 고백 앞에 "나 역시도 그래"라고 동의 할수 있는 인정의 언어. 용기의 언어.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내가 경애였다면 어땠을까를 자주 생각했다. 우리는 각자가 생각하는 진실이 있고 그것이 사실과는 다를 수 있다. 주인공 네 명이 생각한 자기 삶의 진실은 모두 달랐을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각자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자기 삶의 진실은 오직 개인의 것이고, 그래서 지극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이기심을 가진 인간의 한계와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잘 보여 준 작품이다.
인간의 관계, 즐겁고 의미 있던 한 시절을 함께 한 이들이 큰 갈등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체험적 사건이기도 하다. 매번 벌어진 일에 대한 후회처럼 남는 말들. 그때 이랬다면 어땠을까... 경애가 그때 다른 말을 했더라면, 정원이 죽지 않았더라면, 준희가 좀 더 일찍 움직였다면, 등등처럼. 우리는 종종 그때 ‘내가 이랬다면, 저랬더라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수없이 세우고 무너뜨리는 모래성 같은 회한의 가루들을 들이마시곤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마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며 각각의 계절처럼 시시각각 다르게 다가오고야 만다.
초록의 계절이 더없이 깊어졌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을 지나가고 있는가.
깊어진 초록만큼 당신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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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각종 매체에 칼럼 및 영화평과 서평을 기고하며 프리랜서 라이터로 활발히 활동. 현재 남편과 중학생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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