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시아나케이오 김계월 지부장
부당 해고에 맞선 800일의 싸움 끝에 최근 복직한 김계월 지부장(공공운수노조 공항항만운송본부 아시아나케이오지부)을 만났다. 연대 배지들이 줄줄이 달린 노조 조끼 대신 도시락통과 작업복이 든 배낭을 메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7월 18일 복직 첫 출근부터 주 5일씩 꼬박 2주째 일한 날이었다.
늘 하던 일인데도 첫차를 타고 오전 7시부터 시작된 근무는 무척 고되다. 2년여 만의 출근인데다 공항 출입증이 나오지 않아 전처럼 3일 일하고 하루 쉬는 순환제 근무가 아니라 더 그렇다. 그는 ‘스페셜 청소’를 맡고 있다. 일반 청소 뒤에 고급 좌석인 퍼스트, 비즈니스 클래스를 더 꼼꼼히 청소하고, 겔리(Galley, 기내에서 음료와 음식을 준비하는 곳) 바닥을 물과 솔로 문질러 닦는 작업이다. 일반 기내 청소보다 노동 강도가 더 세다. 비행시간이 촉박하면 기내 청소에도 투입된다.
회사와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부당해고 중 정년을 맞은 이들의 명예 복직과 보상 문제가 남았고, 부당해고 여부를 가리는 행정소송 2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서울, 인천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 행정소송 1심은 잇달아 부당해고라고 했지만 회사는 인정하지 않고 항소했다. 일상 회복과 함께 항공 수요가 빠르게 늘자 일손이 급한 회사는 부당해고 문제와는 별개로 김 지부장을 복직시켰다. 정년자 문제는 판결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김 지부장이 복직했지만 ‘반쪽 승리’라고 말하는 이유다.
쓰고 버리는 휴지 조각 아니야.... 노동자의 자존 건 싸움
아시아나케이오는 아시아나항공의 수화물을 분류하고 기내를 청소하는 회사로, 아시아나항공의 제2차 하청업체다. 회사 지분은 100퍼센트 금호아시아나 재단 소유다. 2년 전 봄 코로나19 사태로 항공 수요가 급감하자 노사는 임금의 70퍼센트를 6달 동안 지원하는 유급 휴가에 합의했지만 회사는 이를 3일 만에 깨버렸다. 노동자들은 단 일주일 동안 무기한 무급 휴가나 희망퇴직을 선택해야 했고 이를 거부하면 해고였다.
김 지부장은 그 일주일을 “초상집 같은 분위기”로 기억했다. 선택의 여지 없는 상황에서 시름에 잠긴 동료들, 모든 비행기가 활주로에 멈춰 서 있던 모습에 눈물만 쏟아졌다. “10년 이상 케이오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노동자들인데, 어느 날 회사가 아무 대책도 없이 너희들 지금 필요 없으니 나가라고 한다는 것이 아무리 자본주의 세상이라고 하지만 너무하다 싶었다.”
회사는 해고를 막는 노력의 하나인 정부 고용유지지원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민주노조가 제기해 진행 중이던 체불임금 고발 건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결국 아무 대책도 없이 아시아나케이오는 ‘코로나19 1호 해고사업장’이 됐다. 노동자 김계월은 갑작스러운 해고에 굽히지 않고 동료들을 모았고 길 위의 800일이 시작됐다. “슬프고 분한 해고였지만 1963년생 김계월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800일, 그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자본이 민주노조와 노동자를 탄압해 시작한 싸움이지만 우리만의 싸움은 아니었어요. 케이오의 싸움이 코로나19로 해고되거나 불이익을 당한 노동자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해고는 이미 지방, 중앙노동위에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어요. 우리가 싸움으로써 앞으로도 자본가들이 휴지 조각처럼 노동자를 필요에 따라 쓰고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회에 알렸죠.”
9월 28일 부당해고 여부에 대한 2심 판결이 나온다. 각급 노동위원회, 1심 재판부와 같이 부당해고라는 판결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그 어떤 사용자도 노동자를 상황에 따라 쉽게 해고할 수 없다는 기준점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감염병이 올 때마다 노동자들은 피해 보고 해고돼야 하나라는 점에서 우리가 부당해고였다는 판례는 큰 의미가 있어요. 코로나19 1호 해고사업장이라 끝까지 싸우는 것이죠. 이번 판결에 따라 회사가 대법원까지 갈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겠다, 김계월의 자존심, 노동자의 자존심, 또 다른 노동자의 빛이 되고 희망이 되는 이 싸움을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의지와 신념이 있었어요. 포기할 수 없었고, 처음부터 한 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어요.”
“일한 만큼 받고 노동자의 권리 찾고 싶다”
2015년 아시아나케이오에 민주노조가 생긴 뒤 이번과 같은 장기 투쟁은 처음이지만 그동안 노조 활동으로 에어컨 없이 속옷까지 흠뻑 젖고 숨 막혔던 기내 청소에 에어컨이 가동됐다. 무게 때문에 청소 노동자들이 감당하기 힘들었던 모포 수거도 작업 인력이 따로 배치됐고, 순환 근무로 생겨나는 체불임금도 받아냈다. 김 지부장은 이를 “민주노조의 힘”이라고 했다.
2014년 그가 입사할 때 근무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기본급은 최저임금 범위에서 법에 저촉되지 않는 만큼이었고, 순환근무로 인해 1달에 1일을 무보수로 일하게 되는 등 월급 체계에도 문제가 많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조에 들고 싶었지만 입사하던 해에는 노조가 없었다. 노조를 직접 만들까 했지만 “드러나면 잘릴 수도 있으니 조용히 일 좀 하다 만들라”는 친구의 조언을 따랐다. 그는 20대 때 이미 노조를 만든 경험이 있었다. 1년 뒤 다리를 다쳐 4주 병가를 쓰는 동안 바라던 노조가 생겼다. “너무 좋았다. 즉시 당당하게 노조에 가입했다. 노조에 바라는 점을 가입서에 적는데 일한 만큼 받고 싶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고 싶다고 썼다.”
지난 7년 동안 민주노조가 자리 잡기까지 탈도 많았다. 노조에 대한 이해와 인식 부족, 노동자끼리의 갈등 같은 내부 문제부터 노조의 결속력을 흩어버리거나 노조원을 진급에서 배제하는 등 차별하는 회사의 탄압도 컸다. 한때 케이오 노동자의 90퍼센트 이상, 140여 명에 이르던 조합원 수도 이 가운데 부침을 겪었다.
1963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서울에 올라온 김 지부장은 20대인 1987년 친구들 따라 입사했던 모토로라에서 노조를 만들었다. 당시는 노조의 노자만 꺼내도 ‘빨갱이’ 소리를 듣던 때였지만, 일찍부터 노동과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이는 케이오에서 노조 활동으로 이어졌다.
“다국적 기업이라 월급이 적거나 하진 않았지만 미국인 사장은 회사가 어려우면 보너스를 깎기도 해서 빼앗긴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노조 만드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우리 권리이기도 하고요. 저까지 발기인 12명이 백일 넘게 싸워 노조 사무실을 얻고 현판 달고 했어요. 천막 치고 농성하는 지금은 그때 비하면 호텔이죠. 그때는 한데서 비닐 하나 쳐놓고 이불 뒤집어쓰고 드럼통에 장작 갖다 놓고 농성했어요. 하루 지나면 얼굴이랑 콧구멍이 새카매졌어요. 결혼해서 퇴사했어도 노동 관련은 항상 관심이 많았어요.”
연대의 길에서 만난 새로운 세상
단호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이지만 지부장으로서 800일의 싸움은 숨 막힐 만큼 어려운 눈물의 시간이기도 했다. 숨통을 터주고 마음을 녹여 주며 실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연대자들. 그를 견디게 한 힘이자 그가 더 넓은 세상을 발견하도록 이끈 존재들이다. 연대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끝내 눈물을 쏟고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전에는 사회 분위기에 민감하지 않았고 연대 분위기를 잘 못 느꼈죠. 일하고 나면 집에 가기 바쁘고 현장 사안으로 싸우지 사회적 연대에는 관심이 잘 안 갔어요. 해고에서 시작됐지만 우리 투쟁이 여기 오기까지는 연대가 아니면 이뤄낼 수 없는 것이에요. 수많은 연대자들의 큰 힘을 느꼈어요. 돈도 백도 없는 노동자들에겐 노조가 꼭 필요하고 연대가 힘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제가 더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 너무 좋고, 인생을 다르게 보고 다른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아요.”
지부장 역할은 늘 무거웠다. 생각과 이해관계, 성격 등 서로 다른 이들이 긴 시간 힘겨운 싸움을 함께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각자의 부족함 속에서도 서로를 안고 가는 것은 회사와의 투쟁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그는 800일 동안 투쟁을 접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동료들을 끌어안고 가는 것은 놓고 싶을 만큼 힘들기도 했다.
“동료들에게 지부장으로서 희망을 심어 주고 싶었어요. 그러면서도 속으로 많이 힘들었죠. 지부장으로서 함께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내가 말하기 이전에 동료들 스스로 이 과정을 겪는 것이 당신들의 삶이란 걸 깨우치길 바랐어요. 누가 말해 주는 것보다 자기 스스로 경험하고 깨우쳐 가는 것도 커다란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어요. 노동자들 각자에게도 이 싸움이 헛되지 않고 큰 의미가 되고, 열심히 살았고, 잘 싸웠고 훗날 스스로 자신의 삶이 부끄럽지 않도록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어요. 그것은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것이죠. 그 생각으로 800일을 버텼습니다.”
이들의 싸움에는 개신교, 불교, 천주교 3개 종단도 함께했다.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는 이들이 처음 해고됐을 때 연대를 시작해 명절마다 생필품 등을 지원했고, 투쟁 내내 다른 종단과 함께 기도회로 이들 곁을 지켰다. 인천교구는 해고자들과 무급 휴직 조합원들에게도 생필품을 지원했다. 이 지원은 투쟁하는 해고자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무급 휴직 조합원들을 걱정했던 김 지부장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무급자들도 지원한 것이다. 특히 인천교구가 6달 동안 투쟁하는 해고자들에게 매달 50만 원씩 생계비를 지원한 게 가장 큰 도움이 됐다.
“생계비 100만 원으로 살았는데 힘들었어요. 그런데 생계비 세 달 지원에서 다시 세 달을 연장해 주셔서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3개 종단이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며 기도해 주셨는데, 저는 불교지만 목사님 기도 때도 몇 번을 울었어요. 투쟁하느라 절에 못 가니까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가 오시면 너무 좋았고요. 기도회는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꼭 참여했어요. 지부장이라 하루에 회의나 연대를 여러 곳 다녀 입이 부르트는 날들도 있었지만 기도 시간은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어느 날 회의 다녀오니 끝나서 딱 한 번 빠졌죠. 스스로도 대견해요.”
종교는 무엇보다 이들의 상처를 치유해 줬다. 기도하며 눈물 흘리고 감동받으면서 무언가 이뤄질 것 같다고 느꼈다.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간절한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지 않나”라며 그날이 언제일지 가늠하던 거리의 기도회를 그는 기억한다.
“저는 어디를 가도 작업복 입고, 기내 청소 노동자라고 당당하게 말해요. 노동자가 없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나요? 노동자 스스로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면 좋겠어요. 그래야 노동자의 권리와 인권을 지킬 수 있어요. 당당하고 용기 있게 ‘나는 노동자다’라는 인식을 갖고 살길 바라요. 이런 인식부터 출발하면 모든 것이 달라 보여요. 항상 떳떳하게 생각해야 해요.”
김 지부장은 이번 투쟁이 “반쪽짜리 승리”라고 말하지만 인간 김계월은 이미 승리했다. 삶의 의미를 얻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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