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성과 불확정성으로 보는 하느님 백성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교과서에서 ‘만유인력’이라고 배웠다. 이를 법칙으로 만든 뉴턴 이후 인류는 300여 년 동안 서구 문명의 영향 아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수학적 인과론에 지배를 받아 왔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거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나 일리야 프리고진의 ‘진화의 우연성’에 이르는 현대 과학의 성취는, ‘이성으로 간파되는 그러한 명증한 세계는 없다’며 근대 서구의 기계론적 과학을 뿌리에서 흔들어 버렸다. 한국에는 1990년대 초반 김재희 선생이 "신과학 산책"에 이런 이론들을 소개했고 그 뒤 ‘신과학 전도사’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이 번역되어 나왔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미 약 한 세대 전에 서구적 근대는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종말을 고해야 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웬 과학 타령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평신도 등의 주제를 다루는 이 칼럼과 거리가 먼 듯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의식하지 못할 뿐 그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미 지척 간이다. (이 사실도 그 복잡성의 이면을 보여 주는 생생한 하나의 예다.)

코로나로 더욱 가속화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세상은 점점 더 명증하고 확실함보다는 복잡함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를 평신도와 교회를 논하는 마당에 마땅히 불러들여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로도 보인다. 지난 칼럼과 연결해 말한다면, ‘하느님 백성 전체는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공의회의 선언은 바로 이러한 복잡하고도 불확실한 세상, 얽히고설켜서 선이 악이고 또 그 반대와도 혼재되어 있는 세상, 그럼에도 쉴 틈 없이 진화해 나가는 그 한복판에서 성찰돼야 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믿음에 있어 오류 없음이 전체 하느님 백성에 속한다’는 맥락에 놓을 때, 이 전체 백성이 과연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만을 말하는, 그렇게 우리만의 알뜰하고 간단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런저런 자리에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을 때. 이를 ‘주교에서 평신도까지’만이 아니라 아시아 맥락에서 더 넓은 지평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체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 안에는 더 많고, 다양하며 복잡하고 진화하는 변화무쌍한 세계가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신학적 상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뜻에서 이는 ‘전체성(wholeness)을 이뤄야 거룩해진다’는 의미를 수학적 인과론이 아니라 복잡성과 불확정성에서 상상해 보자는 초대이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아시아의 종교문화적 다원주의와 평신도 신학

아시아 신학자 펠릭스 윌프레드는 ‘가톨릭성(Catholicity)은 과정이자 열린 결말로서의 전체성의 문제’라고 단언한다. 그는 아시아 주교들이 1974년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첫 총회에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대화,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라는 ‘삼중대화’를 정립한 것을 통해 전체성의 길에 들어섰다고 평가한다. ‘보편성’으로도 번역되는 이 가톨릭성은 모든 인간과 나아가 모든 창조계에 주어진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을 드러내며, 같은 맥락에서 풍요로운 다양성을 간직한 아시아 문화는 하느님의 창조성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이 문화적 다양성이야말로 하느님의 숨겨진 보물이며 이것이 없다면 전체성도 구원도 없다”1)고 단언한다. 이렇듯 다양하기 그지없는 아시아의 종교문화적 맥락이야말로 아시아 신학이 보편 교회에 공헌할 큰 자산이다. 바로 여기가 그간의 평신도 신학과 갈리면서 한걸음 더 내딛는 지점이기도 하다.

고전적으로 평신도 신학은 하느님 백성 전체의 거룩함과 전체성의 전제이자 원천으로서 세례를 강조한다. 물론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근본이고 정체성의 출발이자 평신도 신학의 든든한 기반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마존 지역이나 아시아와 같이 지극한 종교적 다원성을 일상의 삶과 문화로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 타종교인의 구원 문제나 그리스도교의 존재와 역할을 묻는 물음에 직면했을 때, 이미 준비된 ‘세례라는 답’이 능사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그리스도인은 매우 곤혹스럽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종교문화적 다원주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인의 정체성을 묻는 물음이면서, 나아가 세례의 재해석과 그것의 창조적 변용이나 확장 가능성을 모색하라’는 시대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다행하게도 공의회 교부들은 종교다원주의 사회를 고려하면서 이런 문제의식에 공명하고 일정한 시각을 제시했다. 곧 '교회헌장'은 “교회는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1항)라고 선언함으로써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하나됨은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온 인류를 포함한다고 본다. 이와 비슷하게 '사목헌장'도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1항)라면서 인류 전체와의 강한 일치를 선언한다. 이제 그리스도인, 특히 평신도는 자신의 신원과 정체성을 위해 세례 성사를 강조하면서도 그것에 그치지 않고 흘러 세상 전체를 감싸 안을 수 있는 수원지를 찾은 것이다.

명동 대성당에서 미사 드리고 있는 평신도들. (이미지 출처 = Flickr)
명동 대성당에서 미사 드리고 있는 평신도들. (이미지 출처 = Flickr)

프란치스코 교황의 ‘민중의 신학’과 교회의 미래

이와 관련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의회의 이러한 장대한 비전을 라틴아메리카 신학의 또 다른 진화에 힘입어 ‘민중의 신학’(theology of the people or populi)을 선보인다. 이는 공동체 중심의 사회문화적 구원, 곧 “민중이 민중을 복음화하는”2) 민중의 신학 또는 ‘민중의 감각’(sensus populi)이 강조된다. 교황은 민중의 신심을 민중의 신비주의(people’s mysticism)라고 부르면서 신앙의 모범으로 민중의 신앙을 이렇게 소개한다. “사랑이 낳는 애정 어린 공통의 본성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교 민중의 신심 안에, 특히 가난한 이들 안에 현존하는 신학적 생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경 구절을 거의 못 외우지만 묵주 기도에 매달리며 병든 아이를 간호하는 어머니들의 굳건한 신앙을 저는 생각합니다.”('복음의 기쁨' 125항) 공의회 문헌뿐 아니라 이를 계승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민중의 신학에서 하느님 백성은 교회 울타리를 넘어 모든 민족과 인류 전체로 확대된다. 여기에 전체로서의 가톨릭성이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는 ‘진화’의 관점이 들어오고 유지될 때야 비로소 평신도의 신원과 정체성은 확립되고 온전해진다. 이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내 형제요 부모’라는 새로운 미래, 새롭고 변화된 세상, 평등과 포용성이 가득한 ‘새 가정’(kin-dom of God)을 이루라고 명한 데서 힘을 얻는다. 이 새 가정은 유대인, 이방인, 부자와 빈자, 세금징수원, 죄인, 여성, 아이들, 주부, 랍비, 변호인 등과 심지어 길가의 한 포기 풀이나 돌멩이까지도 정의와 자비, 평화에서 하나가 되는 ‘새로운 우주 가족’으로서 분열됨 없이 전체성을 이루어가는 늘 변화하는 하느님의 새 가정이다.3) 우주의 모든 존재가 형제애로 이 새 가정의 성원이 된다.

그러나 평신도의 신원의식은 단지 이러한 우주론적 형제애를 찬양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추상화된 우주론을 땅으로 끌어내려 이를 비판적으로 구체화하는 데에 있다. 이를 교회 내로 한정한다면, ‘현재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계급적이며 성직 중심적인 불평등의 극치인 현 교회 구조에 대한 신학적 재성찰도 없고, 또 이를 해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몇몇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을 것’4)임을 일깨우는 역할에 있음을 자각하는 데에서 찾아져야 한다. 공의회의 지역적, 문화적 발화, 그 꽃피움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바로 전 세계적으로 그러한 사명을 자각하고 실현하고자 헌신하는 평신도가 있기 때문이며, 이들이 있는 한 그리스도교가 동터 오는 새 시대를 위해 아직 해야 할 많은 일들이 남아 있다고 보아도 좋겠다. 그러나 글 서두에서 말했듯이, 그 새 시대는 일직선이거나 혹은 분명하고 명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며 때로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복잡화해가는 중층적이고 다면적인 차원의 세계가 될 것이며, 그 안에서 평신도는 성찰적인 ‘전술적 불가지론’의 태도를 취할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무기물조차, 땅속의 균들조차 포용하는 ‘새 가정’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그 방향으로 교회가 가고자 할 때 평신도는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만큼 우리 교회는 여전히 가야 할 길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1) Felix Wilfred, Asian Public Theology: Critical Concerns in Challenging Times, ISPCK, 2010, 283.
2) Rafael Luciani, Pope Francis and the Theology of the People, Orbis Books, 2017, 16-17.
3) Ilia Delio, Making ALL Things New: Catholicity, Cosmology, Consciousness, Orbis Books, 2015, 73-76.
4) Ilia Delio, “‘Fratelli Tutti’: Papal dreams or Vatican diversion?” National Catholic Reporter, 2020.10.19.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아시아평화연대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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