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의 교회상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제안
지난 칼럼에서는 식민지를 겪은 나라의 그리스도교 신자가 신앙과 역사, 또 그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신축교안’을 매개로 제도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이라는 ‘인간’, 특히 평신도의 정체성과 관련해 생각해 보았다. 평신도 신원의식 가운데 '교회헌장'의 “교회 안에서 모든 이가 똑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통된 품위와 활동에서는 참으로 모두 평등하다”(32항)는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고 그것의 바탕이 됨을 직무가 아니라 ‘세례’에서 찾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기조는 평신도 신학을 기초한 이브 콩가르나 피터 판에게서 확인되며 이 두 ‘성직자’ 평신도 신학자뿐 아니라 현재 활약 중인 ‘평신도’ 신학자인 폴 래크랜드나 마시모 파졸리에게서도 이어진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 백성이 된 이들이 갖는 평등성에 대한 강조다. 비록 성서에서 ‘아무에게나 반말하는’ 예수로 채색되어 예수와 맺는 인간관계가 평등하기보다는 수직적인 모습이 두드러지고, 그것의 역사적 구현태로서 분명한 계급적 질서를 갖는 교계 제도가 2000년을 지속해 오고 있지만, 예수 당시나 초기 교회의 평등한 공동체로 돌아가려는 쇄신 의지는 2차 바티칸공의회 이래 중단 없이 추구되어 오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본당-교구-대륙-세계’ 시노드 제안은 ‘공의회를 실천하는 하느님 백성의 참여 시노드’로서 교회쇄신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쇄신이 ‘불평등한 구조의 변화’까지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한계 많은 인간 제도로서의 교회’는, 아무리 현란한 신학적 수사로 무장한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쇄신되거나 개혁될 수 없다.
‘공동합의적 교회상’이 깨진 본당 사례
최근 의정부의 한 본당에서 사목평의회 회장을 비롯한 임원이 ‘공동합의성 구현 불가능’을 이유로 총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1) 이들은 ‘사퇴의 변’을 통해 “본당 사목평의회는 공동합의성의 바탕 위에 구성된 조직이지만, 우리 본당은 유독 구성원의 의사와 무관하게 모든 결정이 주임 사제에게 집중돼, 공동합의성 구현이 불가하고, 사목평의회 존재 이유와 가치를 상실했다”고 사퇴 이유를 밝혔다. 이들은 좀 더 구체적으로 ‘본당 재정, 협력사제의 부적절한 언행, 사목위원의 대표성 부인, 사목회장 선출과 임명 건의안 부결’이라는 네 가지 문제를 꼽았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들이 말하는 ‘공동합의성’은 본당 재정 및 그 운영뿐 아니라 의사 결정에서 사제의 파행적, 독단적 결정, 또 사제의 품성과 리더십 문제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으로 보인다. 외부 후원금과 타 본당 신설 지원금 결정 등이 정해진 협의구조를 무시하고 사제 단독 또는 일부의 결정으로 이뤄진 점이나, 4개월간의 준비를 통해 다수결 방식과 사제 임명 방식을 보완해 본당 사제에게 상정한 ‘사목회장 선출과 임명 건의안’을 정당한 이유없이 거부한 점을 적시했다. 또한 협력사제의 태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상습적 반말과 비하, 조롱하는 말투로 신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와 사목평의회와 단체 간 갈등 조장’ 등의 문제를 꼽았다.
한마디로 하면, 사제들의 독단적 결정 및 운영과 품성 및 태도를 포함한 지도력 문제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러나 ‘기획기사’의 이름 아래 쓰인 이 보도는 이 본당 사제들의 직, 간접 해명이나 이유를 결하고 있어서 일방적이고 자칫 보도의 객관성마저 위태롭게 한다. 기사가 지적하는 대로 비록 이런 문제가 오랫동안 존재해 온 것이고 “사목위원과 본당 구성원, 사제 간 다양한 갈등, 사목평의회 해체, 그리고 사목평의회 인적 구성의 어려움 등 다양한 상황과 층위의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특정 사태가 ‘그 어디쯤에 걸려 있는 문제’라고 대충 넘겨짚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뒤에 두 논평자를 등장시켜 코멘트를 달고 있지만, 그것은 ‘의견’일 뿐이기에 사태파악과는 거리가 있다. 다행히 이 기획기사가 시리즈로서 다음 보도를 기획하고 있다고 보이니, 이번에는 공동합의적 교회상을 구현하는 데 실패했다는 ‘결과’만을 얘기한 것으로 이해하기로 하자.
'교회헌장'에 보이는 상반된 평신도관
위 본당과 비슷한 사태는 ‘모든 하느님 백성 하나하나가 평등하다’는 공의회 정신을 정면으로 거스르지만 낯설지 않은, 오히려 자주 접해 익숙한 문제로 보인다. 공의회의 가르침 따로 현실 따로인, 이론과 현실이 맞지 않는 대목이다. 심지어 '교회헌장'도 해석에 따라 이런 불평등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하여 혼란스럽다. 이를테면, 31항은 “여기에서는 성품의 구성원과 교회가 인정한 수도 신분의 구성원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이해된다”고 말한다. 곧 ‘성품의 구성원’인 성직자와 ‘교회가 인정한 수도 신분의 구성원’인 수도자가 명확한 정체성과 지위가 공식적으로 언표된 반면, 평신도는 ‘(이 두 신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그리스도인’으로 익명화하여 처리되고 있다. 이같은 규정은 성직자의 직무 사제직과 세례에 의한 보편 사제직의 차별성을 명시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10항과 더불어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 직무 또는 교계 사제직은,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하느님 백성 전체는 전적으로 평등한 하나’(32항)라는 주장과 평신도는 익명으로 처리되는 존재이고 그 직무에 있어서도 성직자의 직무와 ‘정도(degree)만이 아니라 본질(essence)에서 다르다’는 규정과 극명하게 차이가 나며 따라서 쉽게 화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듯 상반되고 모순돼 보이는 구절을 평신도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에 대해 과연 교계는 어떤 독법을 제시할 수 있는가? 다행히도 '교회헌장'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Sensus Fidei)이라는 또 다른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느님 백성과 ‘신앙감각’
“성령께 도유를 받는 신자 전체는 (1요한 2,20.27 참조)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온 백성의 초자연적 신앙 감각의 중개로 이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 실제로 진리의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고 지탱하여 주시는 저 신앙 감각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거룩한 교도권의 인도를 받는다.”(12항, 강조 필자)
하느님 백성 전체가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신앙 감각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성령의 권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믿음에 있어 오류 없음’(unerring quality)이 전체 하느님 백성에 속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아니라 ‘전체 하느님의 백성이라야 성령의 지혜를 식별하는 하는 데서 오류가 없다’는 말이다. 이를 좀 더 신학적으로 부연하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권고하듯이 구원은 ‘개인으로 또는 개인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다양한 인간관계 중심의 인간 공동체로서 실현된다’(113항)는 구원론적 전망 아래 ‘하나의 하느님 백성 전체’라는 신학적 의미를 새겨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하느님 백성 전체가 전체성을 이룸으로써 하느님의 활동하심을 식별하는 데에서 오류가 없다’는 의미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떻게 이해해야 합당하며 실감나게 느낄 수 있을까.
(계속)
1) 정현진, “공동합의적 사목평의회, ‘함께 간다는 것은 서로 견디는 것’”,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21.0805.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아시아평화연대센터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