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대학을 말한다-37]

과학, 문명과 재앙 사이
현대사회에서 자연과학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자연과학은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 왔고, 계속 만들어 가고 있는 구조물로서 인간 자신을 포함한 전체 우주를 대상으로 연구하면서 “신비로운” 자연 현상의 이해를 추구하는 정신문화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른바 “과학기술”의 바탕으로서 에너지, 컴퓨터와 통신으로 대표되는 전자기술, 병의 진단과 치료, 유전공학 따위 물질문명을 낳았습니다.
물론 이에 따른 부정적 측면으로서 핵무기를 비롯한 군수 산업, 환경오염, 가치의식의 혼란 따위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히 과학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풍요한 사회로 갈 수도 있고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과학은 현대사회 구성원으로서 필수적인 소양이라 할 수 있고, 따라서 현대 대학에서 자연과학의 적절한 교육과 연구는 극히 중요합니다.
바람직한 과학 교육과 연구를 위해서는 과학의 의미와 사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보지요. 먼저 합리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을 들 수 있습니다. 대체로 과학이라면 과학 지식이나 기술적 응용을 연상하기 쉽지만 진정한 과학의 위력은 과학적 사고에 있습니다.
둘째로 인간 자신을 포함한 전체 우주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관과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과학 활동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주체라는 사실에서 과학은 소중한 문화유산의 근간이 됩니다. 사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정신문화이며, 이러한 점에서 실용성을 추구하는 기술보다는 문학, 철학 같은 인문학이나 예술에 가깝습니다. (이에 따라 다른 나라의 대학들은 대체로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회과학을 묶은 문리과대학이 중심을 이룹니다. 우리나라 대부분 대학에서의 자연과학대학이나 이과대학, 심지어 이공대학 체제와는 반대이지요.) 과학에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그 원동력은 실용성이 아니라 호기심입니다. 특히 상상력에 의한 새로운 창조를 통해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물론 논리의 정합성을 유지하는 창조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과학이 물질적 활용에 치우쳐
여기서 과학 활동의 주체는 현실 사회 속의 인간이므로 심리적, 사회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학자가 속한 학문 사회에서 공통으로 신뢰받는 사고와 탐구의 전형, 곧 규범의 존재와 영향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으며, 또한 전체 사회의 관념 체계, 곧 시대정신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온 사실도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18세기부터 과학의 전개 과정과 시대정신, 예컨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혼돈, 통계역학과 복잡계 물리 따위와 부르주아혁명과 절대왕정, 진보사관, 마르크스주의, 근대주의 및 탈근대주의 따위와의 상호작용은 흥미로우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을 활용한 기술의 산업화가 진행된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과학과 사회의 연관성은 더욱 두드러질 것입니다.
기술의 산업화가 풍요롭고 편리한 생활을 준다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부정적 측면이 있을 뿐 아니라 긍정적 측면 자체에도 심각한 의문이 있다는 사실은 보다 본원적이고 전체적인 과학적 고찰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한국에서도 핵에너지 문제나 새만금 사업, 또는 최근에 한반도 대운하 따위가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는데, 현대의 사회구조나 문화수준에서 과학의 물질적 활용에 치중하는 것은 커다란 위험성을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과학과 그 물질적 활용, 곧 기술의 의미가 거의 구분되지 않고 혼동되어 쓰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에서는 별로 쓰지 않는 “과학기술”이라는 용어가 과학과 기술을 동일시하는 의미로 널리 쓰이지요. 물론 현대과학과 기술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만 이를 동일시하면 과학을 단순히 도구적으로 인식해서 풍부한 정신문화를 포기하게 될 뿐 아니라 물질주의에 빠질 위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세계적 추세와 맞물려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극도의 실용주의가 두드러져서 과학의 존재 이유가 실용성으로 왜곡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대학에서도 예외가 아니고 도리어 더 강한 듯합니다. 자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공학을 교육하고 연구하는 경우가 많지요.
과학의 목적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
과학의 목적은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이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삶을 더 의미 있게 하고 질을 높여주는 것이 과학의 사명이지요. 물질적 면을 주로 다루는 것이 기술이라면, 과학은 어느 정도 정신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과학을 통해 우리 삶에 바람직한 지식을 탐구하고, 우리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며, 이러한 자세에서 과학의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과학과 마찬가지로 현대사회의 발전에는 과학적 사고, 곧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와 함께 자유로운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상상력을 통해서 인간의 창조와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지요. 이를 위해서는 인문학과 과학, 예술, 사회와 삶 등에 대한 폭 넓은 공부가 필요하며, 단편적인 과학 지식보다는 과학적 사고, 진정한 과학 정신의 교육이 더 중요합니다.
특히 인간이 과학 탐구의 대상이자 과학 활동의 주체임을 생각하면 인문학까지 포함해서 이른바 한 차원 높은 메타적인 수준에서 성찰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대학, 심지어 고등학교 과정에서도 문과, 이과를 구분하는 교육제도는 매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기대하려면 역설적으로 문과를 전공할 학생들이 과학을 공부하고, 과학의 의미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과학을 열려있게 하고 사회 전체의 공유물이 되도록 하는데 필요합니다. 과학 지식 자체는 대중이 판단할 문제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몇 해 전에 물의를 일으켰던 아무개 박사에 대한 지지도가 70%가 되므로 그쪽이 옳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과학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의미와 추구하는 방향인데, 이는 가치의 문제입니다. 과학은 사회가치와 시대정신에 맞물려있으므로 어떠한 방향으로 과학 지식을 추구할 것인가, 곧 연구할 것인가는 가치 판단의 문제이지요. 따라서 과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함께 고민해서 전체 사회가 결정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과학은 열려있어야 하며 사회 전체의 공유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과학 교육과 연구의 기본 전제가 성립하지 않아 보입니다. 우선 대부분 중・고등학교에서 과학 교육이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인데 이는 대학 입학시험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현실적으로 고등학교에서 모든 교육은 대학 입시를 위한 것으로 전락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에 따라 과학 교육은 사실상 이과 학생에게만 주어지면서 빠른 시간에 기계적으로 문제를 푸는 요령과 단편적인 과학지식 및 문제 유형의 암기 훈련이 되어버렸는데 그것은 과학의 본질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과학적 사고를 저해하고 과학에 대한 이해를 역행시키고 있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이러한 모순은 결국 대학 입시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풀 수 없을 듯합니다.
대학에서도 과학 교육은 바람직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편입니다. 대부분 대학에서도 문과계열 학생은 제대로 된 과학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이른바 적당히 “때우는” 교양과목으로서 한 두 과목만 이수하는데 그나마 내용은 자연과학이 아닌 과학사나 잡다한 상식의 나열인 경우가 많습니다. 교양으로서 인문학,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균형 있게 이수해야 하는 다른 나라 대학의 경우와 차이가 많지요. 한편 이과계열에서는 도구적 지식의 성격이 강하게 과학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실용성과 관련된 단편적 지식이나 연습문제를 푸는 기술의 습득을 주로 다루지요. 이에 따라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양자역학의 연습문제는 썩 잘 풀지만 그 의미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사실상 고등학교 과학 교육의 문제점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셈입니다.
대학에서 지식인이 아니라 단순한 기능인만 양성
이러한 과학 교육은 연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언급했듯이 과학으로 분류된 연구의 상당 부분이 실용적 목적 지향으로서 자연과학이라기보다는 공학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경우 회사와 공과대학에서 하는 연구개발을 우리는 각각 공과대학과 자연과학대학(이과대학)에서 주로 한다고 하지요. 이에 따라 과학 교육도 실용적인 공학 성격을 띤 도구적 지식으로서 이루어지며, 심지어 자연과학대학의 학과, 예컨대 물리학과가 공과대학의 학과 비슷하게 이름이 바뀌거나 아예 없어진 경우도 많습니다.
사회의 추세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대학이 도리어 사회의 추세를 이끌어가고 있는 듯도 하며, 이러한 성격은 교육과 연구가 밀접하게 관련된 대학원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과학의 깊은 이해와 관계없이 논문만 빨리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는 현실에서 과학의 의미를 담고 있는 강의는 “쓸모없고” 어렵기만 하므로 수강하려는 학생이 점점 줄어듭니다. 대학에서 지식인이 아니라 단순한 기능인만 양성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멀리 내다보면 과학이 왜곡되고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제대로 된 의미로서 과학적인 사회가 되어서 우리가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핵심은 소통(communication)의 문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문제는 사실 과학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해당됩니다. 요새 철학이나 문학, 역사 같은 인문학을 기피하는 이유가 돈이 안 된다는 것도 있지만, 일반 대중하고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든요. 그것은 소통의 문제를 같이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좀 깊이 있게 생각하면서 대학에서 과학 교육과 연구도 소통의 문제에 초점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과학은 사회전체의 공유물 되어야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류는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산업화, 이들과 사회와의 밀접한 상호작용에 의해 한 차원 높은 세계로 올라갈 수도 있고, 아니면 파멸의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인은 막중한 시대적 사명을 지니고 있으며, 과학에 대한 인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과학의 올바른 활용을 위해서 과학은 사회 전체의 공유물이 되어야 하며,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과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학 지식이 아니라 편협한 실증주의를 넘어서서 진정한 합리주의로서의 과학적 사고를 뜻하는 것이며 최근 우리 사회를 볼 때 더욱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여기에 대학의 책무는 막대하며, 과학 교육과 연구에 대해 근원적인 성찰이 요구됩니다.
글 최무영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이 기획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와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가 함께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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