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대학을 말한다-31]

미래 사회와 아이들의 진로
여러 해 전부터 기업들은 대학이 불량품을 자기들에게 떠넘긴다고 불평하고 있다. 대학은 대학대로, 책 읽어내는 능력도 없고 글도 제대로 못 쓰는 학생들을 길러내는 중등교육에 대한 불만이 높다. 말하자면 공교육 시스템 전체가 불량품 생산 라인이 된 셈이다.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로 바뀐 2000년대 들어 불량 비율이 더 높아졌으니, 인간교육이 아닌 인력교육에 올인한 결과가 참담한 셈이다.
십여 년 전 이른바 ‘학교붕괴’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부와 교사집단이 한 목소리로 ‘공교육 정상화’를 부르짖고 있지만, 그 주장의 핵심은 근대적 의미의 학교 정상화에 가깝다. 말 잘 듣는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실제적인 교육 목표였던 근대 학교체제를 유지하면서, 세계화·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는 창의력 있는 인적자원을 양성하고자 하는 모순된 정책 속에서 헤매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육정책의 현주소이다.
최근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교육의 실패를 들었다. 무한성장을 추구하는 기업가의 시각에서 볼 때 불량자원을 생산해내는 학교교육은 사회악에 가까울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천재 한 명이 몇 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그의 지론대로 우리 교육이 바뀐다면 앞으로 20대 80의 사회는 더욱 공고해질 따름이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정보화, 세계화 물결로 국가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고,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지구촌을 양극화 사회로 몰아가고 있다. 한국 사회는 십여 년 전 IMF 사태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 흐름이 속도를 더해가면서 빠르게 중남미형 사회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의 몇 년이 우리 사회의 미래에 중대한 갈림길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20대의 실업과 빈곤화 문제는 사회불안의 뇌관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생산시설의 해외이전, 사무자동화와 저임금 외국인노동자의 유입으로 갈수록 취업문은 좁아지고 노동시장이 유연화되어 가고 있다.
지금 십대들이 맞닥뜨릴 사회,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평생학습사회로 접어들면 일생 동안 새로운 분야의 일을 위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찾아올 것이다. 대학졸업장을 우려먹을 수 있는 사회는 빠르게 저물고 있다. 진로교육을 대학진학 요령을 가르치는 것쯤으로 여기는 제도권 교육은 아이들의 미래를 무책임하게 방기하는 것이다. 세상을 읽는 힘,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진로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지난해 <녹색평론>에서는 앞으로 ‘농촌 자녀 대학 보내지 않기’ 운동을 펼치겠다고 했다. 대학진학률이 80퍼센트를 웃도는 상황에서, 이제 웬만한 대학을 나와 봐야 살아가는 데 아무런 보탬도 안 될 게 뻔한데, 대학에 목매달면서 부모와 아이들의 삶을 희생하는 일을 더 이상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도시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살고 있는 지역의 대학을 다닌다면 숙식비가 따로 들지 않아 조금 유리하긴 하지만, 많은 경우 대학진학은 삶을 유예하는 것일 따름이다. 공교육이든 대안교육이든 아이들의 삶을 진정으로 염려한다면 더 이상 속보이는 대학진학률 높이기에 앞장서지 말아야 한다.
전공부를 제안하며
최근 중등 대안학교 현장 중심으로 포스트 중등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초등학교 출신들이 자라나면서 고등부 과정에 대한 고민과 함께 진로문제가 논의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출범한 대안교육학부모연대도 인턴십이나 멘토 네트워크를 만들어 아이들의 진로에 도움이 되고자 준비하고 있다.
대안교육 출신 아이들의 진로문제와 관련해서 각 현장 별로 특성을 살려 전문과정을 만드는 방안을 연구해볼 일이다. 풀무학교 전공부처럼, 여력이 되는 학교부터 특성을 살린 전공부를 하나씩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전공부들이 생겨나고 이들이 서로 연계되면 네트워크형 대안대학이 될 수 있다.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공부는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실무 능력은 혼자 익히려면 몇 배로 힘이 든다. 인문학적 소양과 실무 능력을 함께 기르는 전공부는 일종의 네트워크형 평생학습센터 같은 곳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친구들과 고등부 과정 아이들이 함께할 수도 있고, 어른들도 같이할 수 있다.
이를 테면 공간민들레에서는 언론출판 관련 전공부를 만들어 글로써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울 수 있다. 일간 신문사나 방송사가 아닌 대부분의 출판사나 잡지사는 학력을 문제 삼지 않는다. 글쓰기의 기초가 되어 있으면 일 년 정도만 훈련하면 굳이 대학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얼마든지 실무를 감당할 수 있다.
한겨레문화센터 출판과정, 서울출판인학교, 오마이뉴스 기자학교 같은 기존 과정을 선택해서 밟을 수도 있고, 20명 정도가 되면 독자적인 과정을 만들 수도 있다. 언론출판계의 미래를 감당할 인재를 길러내는 일은 제도권 학교보다 대안학교가 더 잘 할 수 있다고 본다. 어린이책 전문 기획사인 ‘햇살과 나무꾼’과 같은 기획사를 창업해 회사를 겸한 학교를 만들 수도 있다. 실전 속에서 길러지는 실력이 진짜 실력이다.
하자작업장학교나 스스로넷미디어스쿨 같은 도시형 대안학교들이 연대해 영상 관련 전공부를 만드는 것도 검토해볼 일이다. 한예종 같은 기존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진학의 기회를 놓치거나 그 길이 맞지 않아 홀로 탐색하는 이들에게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문자보다 영상에 더 익숙한 미래세대와 소통하는 데는 영상언어가 유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마이클 무어 영화 같이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나 다큐멘터리 한 편이 수백만 수천만 명을 움직일 수 있다. 전공부에서 영상물을 통한 학습과정을 만들어 초등이나 중등 현장에 제공할 수도 있겠다.
NGO 활동가를 기르는 일도 대안교육 진영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이다. 활동가의 몇 년치 월급을 털어넣으면서 굳이 대학의 NGO 학과를 다녀야 할까. 몇몇 시민단체와 연계해서 NGO 전공부를 만들어보자. 시민단체들은 유능한 일꾼을 길러낼 수 있어 좋고, 대안교육 진영은 교육과 사회문제를 더 긴밀히 연계시킬 수 있게 된다. NGO 전공부는 활동무대를 국제적으로 넓힐 수도 있다.(키노쿠니의 국제고등전수학교가 이와 유사한 모델이기도 하다.)
전원형 학교라면 건축 관련 전공부를 생각해볼 일이다. 생태건축에 관심이 있거나 그냥 집짓기나 인테리어에 관심 있는 아이들이 모여 실제로 집을 지으면서 공부하면 된다. 실제적인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건축만큼 중요한 분야도 없다. 건축 분야는 설계와 시공으로 나뉘는데, 시공 분야는 대학 졸업장과 무관하므로 집을 직접 짓는 데 관심 있는 이들은 시공 분야로 나가면 된다. 집 짓는 일을 하다 설계사가 되고 싶거나 대학공부의 필요성을 느끼면 그때 대학에 들어가도 늦지 않다. 확실한 동기가 있으면 늦공부도 어렵지 않다.
의사가 되고 싶은 아이나 대안학교 교사와 부모들을 위해 침구학 강좌를 개설하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 의사의 길을 생각한다면 양의학과 한의학의 특징을 알고 자신의 기질을 감안해서 길을 정할 일이다. 꼭 한의학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사람 몸에 관심이 있다면 침구학 공부는 해볼 만하다.(중국에서는 양의사도 침구학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한의학의 본령인 침구학은 대학에 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공부를 해보면 의사의 길이 자기 길인지 아닌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필요하다면 나중에라도 의대나 한의대를 갈 수 있다. 침구사 제도가 부활한다면 굳이 대학을 가지 않고도 명의가 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제도권 의료계가 침구사 제도 부활을 막고 있어 대학을 거치지 않고는 합법적인 의료활동이 불가능하다.(언젠가 의료법이 바뀌겠지만, 그런 날을 하루빨리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국외로 눈을 돌릴 필요도 있다. 침구학을 배워서 중국이나 미국, 호주 같은 곳으로 진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이들의 진로문제를 국제적으로 풀어가는 상상력도 필요하다. 대안교육판의 부모와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모아야 한다. 학부모들이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알고 있는 정보와 지식을 나눈다면 수많은 길들이 열릴 것이다. 다양한 정보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작업은 대안교육 출신 아이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다양한 전공부가 있다 해서 제도권 대학을 굳이 마다할 일은 아니다. 관심사에 따라 전공부를 거쳐 사회에서 일을 하다가 더 깊은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면 그때 대학진학을 할 수도 있고, 바로 대학 진학을 선택할 수도 있다. 대학을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게 된 직업 영역들도 적지 않다. 현행 제도가 바람직하진 않지만, 의사나 변호사가 되고자 한다면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는 일이다. 대안 운운하며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길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대안적인 진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나 건강한 삶을 살면 되는 것 아닌가. 대학 진학에 목을 매도 안 되지만, 대학을 도외시해서도 안 될 일이다.
하지만 갈수록 대학 학비가 치솟고, 졸업장은 예전처럼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굳이 대학을 택하지 않고도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는 것은 대안교육 진영의 당면 과제이다. 예능 쪽도 굳이 제도권 학교를 통하지 않고도 가능한 길을 열어야 한다. 베네수엘라의 청소년 오케스트라처럼 소외 계층도 예술을 통해 삶을 고양시킬 수 있는 길을 우리도 열어가보자. 문제 해결의 열쇠는 돈이 아니라 상상력과 열정이다. 세상에 널려 있는 자원을 어떻게 끌어내고 연결할지 상상력을 펼치자. 세상에 충만한 선한 의지와 아이들 속의 잠재력이 융합하여 핵융합이 일어날 수 있도록 창의력과 열정을 발휘할 때다.
글 현병호(격월간 『민들레』 발행인)
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와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가 함께 진행합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