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대학을 말한다-16]

교수란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사람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겠지만, 연구와 강의를 주로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학생들과의 상담을 통해 그들에게 참된 인생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직업인이라고 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교수는 대개 최소 매년 학술진흥재단이라는 기관에서 인정하는 학술지에 1편 이상의 논문을 쓴다거나 아니면 최소 3~5년 정도의 기간 동안에 연구한 성과를 책이나 다른 형태의 결과물로 생산해낸다. 강의는 보통 1주일에 9시간 이상, 일주일에 나흘 정도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1년에 4개월의 방학을 갖지만 대개의 교수는 또 다른 연구나 새로운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그 시간을 사용한다.
운 좋은 경우이겠지만, 스물다섯이나 여섯 정도부터 대학원에 가서 연구를 하고 서른다섯에서 마흔을 전후로 하는 나이에 정규 교수로 부임한다. 교수가 된 후 5년 정도가 지나면 4천만 원, 10년 정도가 지나면 6천만 원의 급여를 받다가 60세 정도가 되면 1억원 정도의 급여를 받으니 대기업이나 공기업보다는 적지만 웬만한 기업 이상의 대우는 받는다. 그래서 교수로서 먹고 살고 자식 교육 시키는 데에는 큰 지장을 느끼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신이 내린 직업이라고까지는 말을 할 수 는 없지만 그에 버금가는 것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정말 신이 내린 직업인으로서의 교수가 있다. 요즘 신임 교수가 되는 경우는 조금 다른 경우이겠지만, 2002년 이전에 교수 임용을 받은 자들 가운데는 정말 부끄럽고 처참한 행태를 일삼는 교수가 많다. 특히 임용 후 5~6년 정도가 지나면 거의 자동으로 오르는 부교수 혹은 정교수 같은 정년 보장 교수 가운데 이런 경우가 많은데, 교수로 부임한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논문 하나 쓰지 않거나 흔한 책 한 권 내지 않고 완전 무위도식으로 일관하는 교수가 각 대학마다 부지기수다. 논문 하나를 내면 제목만 바꾸어 서너개로 뻥튀기를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고, 심한 경우는 그걸로 수 천만 원에서 수 억의 프로젝트를 따 내는 경우도 많다. 그런 교수 가운데 연구를 하지 않고 강의라도 열심히 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강의에도 무성의하다.
그들이 갖는 관심의 대분은 학교 보직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주로 떼거리로 몰려다닌다. 동료 교수 경조사에는 빠지지 않고, 각종 동문회나 향우회 모임에도 항상 얼굴을 내민다. 대개 집에 돈이 많거나 고등학교나 대학 동문 가운데 돈 꽤나 있는 친구들을 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연구나 강의 준비에 시간을 쓰지 않고 그 시간에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호탕하고 대범하게 돈을 뿌린다. 세계관에는 원칙이라는 것은 없고, 항상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를 보고 사람들은 대개 원만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고하고’인지 ‘그렇기 때문에’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연구도 하지 않고, 실력도 없지만 대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히 탄탄하다. 그들에게 대학 교수는 신이 내린 직업일 수밖에 없다.
그런 교수들은 주로 처장이나 학장 혹은 원장 혹은 나아가 총장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대학 밖에 있는 시민들이 대학의 총장 선거판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면 웬만한 비위 좋은 사람도 구역질 나오는 것을 참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가관인 것은 그렇게 해서 대학 총장에 당선되었다거나 그 밑에서 무슨 처장이나 원장직을 따낸 교수들을 사회에서는 매우 존경한다는 사실이다.
더욱 슬픈 것은 그런 교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더 큰 권력을 탐하여 정계를 기웃거린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대학 교수라는 지위는 이미 갖추었고 거기에 무슨 총장이니 학장이니 하는 직함까지 갖추었으니 정치로 나갈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을 갖춘 셈이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서 존경 받고, 정치판을 좌지우지 하니 한국 정치가 잘 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이다.
그렇지만 대학에 그런 교수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소수지만 50이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도시락을 둘 싸가지고 다니면서 연구실과 강의실만 왔다 갔다 하는 교수도 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은 물론이고 방학 기간 내내 연구실 불은 꺼지지 않는다. 책상 앞에 너무나 오래 앉아 연구만 하다 보니 몸에 허리 디스크 병을 앓거나 더 큰 병으로 고통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교수들은 대부분 학생들의 미래를 염려하고 그들을 위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학생들과 상담하기 위해서라면 시간을 아끼지 않고, 학생들이 실력을 쌓기 위해 방학 중에도 특별 교육을 시키며 심지어는 졸업 후에도 수시로 불러 모아 공부를 봐주는 경우도 많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고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어 그들의 세계관을 일률적으로 뭐라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교수로서는 부끄럽지 않게 연구와 강의 그리고 학생 상당과 사회 봉사의 부문에서 원칙적이고 양심적인 자세를 견지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학문의 물질에 대한 독립을 견지하게 위해 프로젝트로부터도 애써 멀리 떨어져 연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들은 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연구를 위해 사재를 털어 가며 후학들과 공동 연구를 하거나 소수 학문을 위해 저널이나 연구소를 만들어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려 애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변변한 재산조차 남긴 게 없어 은퇴 후 쓸쓸히 여생을 살아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들은 회갑이나 정년을 맞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논문 하나씩 모아 논문집을 봉정하는 것조차도 후학들에게 신세를 진다 하여 고사하는 딸깍발이다. 그들은 정년을 앞두고 마지막 몇 년 간 혼신의 힘을 다 해 홀로 연구에 몰두해 책을 써 학계에 바치고 떠나는 이 시대의 스승이자 어른이다.
대학은 대개 이와 같은 두 부류의 교수와 그 사이에 낀 다수의 교수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전자 즉 전혀 교수답지 못하는 자들이 후자 즉 양심적인 교수와 대다수의 교수를 압도하는 게 한국 대학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전자는 권력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권력을 잡은 후 그 행하는 행태가 동네 양아치들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보다 큰 권력과 결탁하여 교수 임용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니 시간이 갈수록 그 주변은 불나방 같은 교수와 교수 지망생이 들끓는다. 그리고 그 패거리의 힘은 갈수록 막강해진다. 물론 그 패거리에 포섭되는 대상으로 학생이라고 빠질 수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입바른 소리 좀 하는 교수는 대학 당국이나 부패한 일부 학생 집단으로부터 협박이나 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적잖이 생기며 그러면 결국 유약하지만 정상적 사고를 지닌 교수들은 입 닫고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가 많다.
역사를 업으로 삼은 역사학자는 많고, 철학을 업으로 삼은 철학자는 많지만, 시대의 옳고 그름에 고민하는 역사가나 철학가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난, 그러한 사실을 보고 슬피 목 놓아 울 수는 없다. 죽은 지식이라도 좋고 무의미한 논문이라도 좋다. 유약하고 비겁해도 좋다. 최소한의 연구물이라도 생산해내고, 정해진 수업 일수만이라도 잘 지켜 강의에 충실하고, 최소한의 따뜻한 마음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가는 교수들이, 최소한의 양식과 양심만이라도 갖춘 보통의 교수들이 내는 목소리가 상식으로 통용될 수 있는 대학이 되었으면 여한이 없겠다.
그렇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 줌도 안 되는 패거리들이 모여 권력을 탐하고, 상식을 유린하고 그들이 내는 목소리가 그 번지르르한 직함을 타고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양이 오늘 한국의 대학이다. 난, 그것에 목 놓아 울 뿐이다.
글/사진 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이 기획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와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 http://stip.or.kr/가 함께 진행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