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 3]

국정원 개혁을 위한 평신도, 수도자, 사제들의 시국선언과 시국미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9월 23일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서울광장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했고, 오는 10월 16일에는 천주교 평신도들 주최로 2차 시국기도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연대는 9월 30일 출범 2주년을 맞아 생명평화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대한문에서는 쌍용차 사태 해결을 위한 매일 미사가 어느새 200번째 봉헌을 앞두고 있지요. 또, 765㎸ 송전탑이 들어설 밀양, 무자비한 진압 현장 속 할매, 할배들과 함께하고 있는 신자들의 소식도 들립니다.

몸이 멀리 있는 탓에 뉴스를 통해 소식만 전해 듣는 저는, 위의 어느 현장에도 달려가 함께할 수 없는 물리적 거리가 아쉽고 야속하긴 하지만, 이곳 미국, 제가 일하는 대학의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우리 한국 교회의 활동에 대해 자랑할 수 있어 한편 뿌듯하기도 합니다. 가까운 동료 교수 한 사람은 사회정의와 교회의 역할에 관한 글을 쓰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예를 인용하고 싶다고 제게 위 활동들의 배경을 물어 오기도 하고, 사진을 청하기도 했지요.

▲ 지난 9월 26일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이 칼럼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훌륭한 가톨릭 신자는 정치에 개입한다’는 발언에 대해 “끝까지 읽어 보면 그 정치 개입이라는 것은 정치가들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들이 사악한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좋은 통치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진 / 동아닷컴 갈무리)
그런 와중에, “민주주의와 친하지도 않은 성부나 성자나 성령을 들먹이면서 정의 운운하지 말라”는 대범한 ‘권고’를 하신 한 일간지 논설위원의 글이 눈에 띕니다. 하도 황당한 논리를 펼치시는 덕에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긴 해도, 아마도 그분은 (교황의 말씀을 인용하여) “‘기도는 최고의 정치 개입’이니 교회는 나서지 말고 기도나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주위에도 천주교의 최근 활동에 대해 마뜩치 않게 생각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분들은 “기도를 통해 모범을 보여야 할 사제, 수도자들이 왜 정치꾼처럼 저러고 다니나” 하고 탄식하십니다. 서울광장, 강정마을, 대한문, 밀양에서의 활동은 기도가 아니고, 종교 활동도 아니라는 생각이 아마도 그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신자 본연의 모습은 ‘기도’라는 것인데요.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기도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중 두 가지만 짚어 본다면, “기도는 은밀하게 드리는 것”이라는 가르침과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4편은 기도의 본질과 내용과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리서가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모범인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또 몸소 보여주신 기도이지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되도록 밤에, 홀로, 산으로 물러가서 기도하셨고, 또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6,6).

기도는 “구별된 장소”에서 하느님과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지극히 “사적인 만남,” 그리고 “일상과 차별되는 거룩한 시간”이라는 생각은 아마도 예수님의 기도 습관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인 것 같습니다. 분명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깊고 내밀하고 성스러운 대화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삶으로 가르쳐주신 기도는 세상과 격리된 골방에서, 마치 주문을 외우듯 하느님께 복을 청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마태오 복음서 6장 6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골방”이란 헬라어로 “타미온(tamieion)”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바로 앞 구절에 등장하는 “회당”, “한길 모퉁이”와 대조를 이룬 단어로 ‘혼자 있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의미합니다. 즉,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란 말씀은 공간적 도피의 장소, 격리된 곳을 찾아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하라는 뜻이기보다는, 기도한다고 남에게 과시하지 말고 나의 가장 은밀한 곳, 비밀스러운 공간을 찾아, 하느님의 마음에 나의 마음을 조율하라는 뜻이지요.

마태오 복음서 6장 5-6절은 기도가 남의 눈에 보이기 위한 종교적 의식, 혹은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을 드러내는 행위라는 인식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핑계로 ‘나는 세상과 다른 척, 거룩한 척’ 행동하는 자들을 위선하는 자들이라 하시며 누누이 경계하셨지요. 예수님의 기도는 당신의 가장 깊은 곳, 당신의 생명을 통해 말씀하시는 아빠 하느님께 귀 기울이며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한상봉 기자

예수님의 기도는 또한 하느님과 홀로 대화를 나눈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골방”을 언급한 위의 구절은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주님의 기도와 연결이 되죠. 하느님과 은밀하게 나눈 대화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하며, 이번엔 우리 삶과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조율되기를 원하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기도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구해야 할 것은 33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즉, 하느님의 선하심과 정의로우심이 드러날 하느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기도는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해야 할 바와 살아야 할 도리를 일컫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교리서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 예수님께서는 홀로 기도하시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당신의 형제와 자매들이 겪는 모든 일에 참여하고 함께 겪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은, 그가 은밀하게 드리시던 기도가 표현된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602). 그의 삶과 죽음은 그가 홀로 드리시던 기도의 일부이고 연장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기도를 바쳤으니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시리라’ 하고 손을 놓아 버리는 것을 참된 신심으로 믿고 계신 분들은 예수님의 기도를 반만 이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교리서가 전하고 있는 기도의 정의를 살펴보면 좀 더 명확해지지요. 교리서는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기도란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이며, 하느님께 은혜를 청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559). 즉, 기도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마음을 대신 채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행위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기도”란 따라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기를 바라며 나는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적극적으로 비워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하고 올리시던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는 이러한 기도의 본질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요.

기도의 가장 큰 목적은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세우되, 내 뜻이 아니라 임의 뜻대로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를 통해 마음 깊은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는 임의 마음을 찾아 다시 불을 지피고, 그 불길이 이끄는 대로 우리의 몸을 던지며 또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이 너무도 지극하여 결국 가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들 또한 척박하고 신산하고 어지러운, 언뜻 ‘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삶의 현장에 몸을 던지길 원하십니다. ‘종교적’이라 불리는 곳은 이미 받은 상으로 넘쳐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버려지고 황폐한 땅에 머무르는 이들—밀양 할매, 할배들과 쌍용차 노동자들, 강정 구럼비의 통곡과 몸부림에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그들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괴로워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들의 통곡을 통해 하느님의 통곡이 들리게 하고, 그들의 몸부림을 통해 하느님의 몸부림이 보이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이 말씀하셨던가요.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 밖에는 이 땅에 몸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손과 발 밖에는 손도, 발도 없으십니다”라고요.

▲ 교황 프란치스코 (사진 출처 / 교황청 유튜브 갈무리 youtube.com/vatican)

사족이지만, 최근 교황의 강론과 인터뷰 내용을 두고 “교회가 어느 정도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가”, 단어 하나하나를 따져 그 척도를 가늠하는 분위기가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저도 인용합니다. 미국의 예수회 주간지인 <아메리카(America: The National Catholic Review)>에서 지난 8월 교황이 로마를 방문하던 길에 했던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아래 글은 인터뷰 내용 중 일부입니다.

“항상 규율적 · 규범적 해결책만 찾는 이들, 과장스럽게 교리적 안정성만 추구하는 이들,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만을 고집스럽게 회복하려고 하는 이들—이들은 정적이며 오로지 내면으로만 향한 관점으로 세상을 봅니다. 이러한 시각만 고집한다면, 신앙은 세상의 다른 이념들과 아무 다를 바 없는 이념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제게도 교리적 확신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의 삶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재앙과 같은 삶일지라도, 세상의 악한 것들, 약물과 또 다른 어떤 것들에 의해 심하게 망가진 삶일지라도, 하느님은 그 삶 속에 계십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의 삶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찾을 수 있고 또 찾아야만 합니다.” (* 원문 http://www.americamagazine.org/pope-interview)

“기도는 최고의 정치 개입”이라고요? 맞습니다. 기도는 최고의 정치 개입입니다. 공약 포기도, 번복도, 변절도, 야합도 하지 않고, 아무리 “재앙과 같은 삶”일지라도, 아무리 “망가진 삶”일지라도 그 삶과 함께하며 희망을 찾고 그 희망이 시들지 않게 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정치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 기도니까요.

* 신약성서 헬라어 주석에 도움 주시고 함께 대화 나누어 주신 신약학 박사 이민규 님, 빈스 스켐프(Vincent Skemp) 님께 감사드립니다.
 

 
 
조민아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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