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2]

신비체험이란 경지가 깊은 관상가들, 혹은 선택된 소수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게다가 설명하기 힘든 현상들과 기적, 치유 등이 신비체험에 동반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오로지 신비체험만 동경하고 유별난 사건들을 통해서만 성령이 하시는 일을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자들도 많지요. 그런가 하면 또 바로 그런 이유로 신비주의를 극단적인 분리, 도피주의, 기복과 미신으로 폄하하며 아예 입에 올리기 꺼려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신비체험의 대가들, 역사 속 이름 높은 관상가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지난 9월 17일은 독일 빙엔의 성인인 힐데가르트(1098-1179)가 선종한 날입니다. 힐데가르트는 2012년 시성과 동시에 교회박사로 공인되었지요. 그녀는 전례음악, 약학과 의학 등 여러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베네딕도수도회의 수도자이자 관상가, 예언자입니다. 특히 글과 그림으로도 남겨진 힐데가르트의 환시체험은 세대를 초월하여 두루 읽히고 연구되고 있는 영성의 고전이지요. 친구였던 수도사 볼마르를 통해 기록된 그녀의 환시체험 첫번째 책에는 <쉬비아스Scivias>(Scito vias Domini, 길을 알라)라는 제목이 붙여졌는데요, 책 서문에서 힐데가르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신 후 1141년이 되던 해, 내가 마흔 두 살하고도 일곱 달이 더 지났을 때, 하늘이 열리고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빛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머리로 쏟아졌습니다. 그 빛은 나의 뇌와 심장 그리고 가슴을 뚫고 흘러내려 내 마음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러나 나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지 않고 태양이 제 빛을 퍼뜨려 한 사물을 따뜻하게 해 주듯 그저 온화하게 불타올랐습니다.”

힐데가르트의 환시체험은 극적이고도 놀라운 심상들로 묘사되어 있어,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동 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환시체험을 꿈속이나 정신적인 혼란 상태에서가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에서 천진한 마음을 다하고 내면의 눈과 귀를 통해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가운데, 그리고 하느님이 늘 거기 계셨던 듯 보통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에서”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뼈와 신경과 혈관이 충분히 성장되기 전인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해 일흔이 넘어서까지 계속 체험했다지요. 하늘의 개벽을 목도하고 불덩이를 맞은 사람의 술회치고는 참으로 담담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소리없는 아우성: 신비주의와 저항> (The Silent Cry: Mysticism and Resistance) 이라는 저서에서, “선택된 소수의 극적이고 비밀스런 체험”으로 이해되었던 신비주의의 기존 관념에 도전합니다. 죌레에 의하면 신비주의는 차별 없으신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향해 열어 놓으신 초대입니다. 신비체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단단한 “나”의 껍질을 부수고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과 직접 만나는 거죠. 어느 누구도 그 만남의 순간을 다 담아낼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신비주의는 가장 명확한 듯 하지만 가장 설명하기 어렵고, 모든 이들이 겪을 수 있으나 모든 이들이 알아차리지는 못하며,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또 일상을 전복 시킬 수 있는, 세상의 논리로 보자면 어쩌면 모순적이고도 역설적인 체험입니다.

죌레는 그런 신비체험의 예로 우리의 어린시절을 상기시킵니다. 살기 위해 채워야 할 온갖 ‘필요’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이전, 이렇다 할 것도 없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새롭고, 아무 말도 없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공명하던 어린 시절의 매일 매일이 신비체험이 아닐 이유가 없다는 거죠. 하느님은 세상 어디에나 어느 때나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런 유년의 나날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억지겠지요. 죌레는 그런 어린 날의 체험을 ‘묻혀버린 유년의 신비주의’(the buried mysticism of childhood)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연모하고 존경하는 힐데가르트와 같은 신비가들은 그 어린 시절의 신비주의를 채 묻어 버리지 않고 가슴에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았던 사람들이라 볼 수 있겠네요.

어린 시절 말이 나왔으니 제게도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무척이나 수줍음이 많은 꼬마였습니다. 또래 아이가 말을 걸면 금방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두근거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곤 했지요. 게다가 키도 작고 행동도 굼뜨고 걱정도 많아 동무들과 뛰어다니다 보면 금방 뒤처지기 일쑤여서, 밖에 나가 노는 것 보다 집에 들어 앉아 혼자 책을 읽거나 공상에 빠지는 걸 더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니면 그저 어느 날 오후 동화책을 읽고 깜박 잠이 들었을 때 꾸었던 꿈이 마음에 찍혀 버린 것인지 헷갈리는 기억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죠. 혼자 노는 저를 걱정하셨던 어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강원도 홍천에서 열렸던 YMCA 캠프에 저를 보내셨는데, 그 3박4일이 제겐 무척 힘들었어요. ‘큰아이들’ 사이에 껴서 꼼지락 대며 조장과 조교들을 답답하게 하는 제 자신이 싫었고 면박 주는 그네들이 원망스러웠죠. 급기야는 마지막 날 캠프 파이어 때 혼자 슬쩍 뒤로 빠져 숙소 뒤편에 물끄러미 앉아 시간이 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날이 밝으면 집에 돌아가겠구나, 다행이다, 라고 중얼거리면서요. 그런데 거기서 난생처음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봤던 겁니다. 다들 운동장에 모여 시끌벅적 노느라 정신이 없는데 저 혼자(!) 발견했던 별똥별은 정말 주먹만하게 크고 달처럼 환했습니다. 게다가 휘리릭 눈 깜박할 새 사라져 버린 것도 아니고 마치 저 보란 듯 천천히 꼬리를 드리우며 어딘가로 꽂혀 내리는 거예요. 아니면 제가 그 순간을 그렇게 길게 느꼈던 것일까요? 마치 외계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귀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신기하고 위로가 되었던지요.

그 순간의 느낌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저는 아직도 그 밤의 찹찹한 공기와, 하늘의 검은 빛깔과, 멀리 운동장에서 들려오던 소리, 포근하게 감싸던 풀 냄새, 바람의 촉감을 모두 기억합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밤 저를 둘러 싼 모든 것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고, 어쩌면 지금도 그 일을 겪는 듯, 혹은 꼬마인 나를 멀리서 쳐다 보는 듯, 기억과 저의 경계 또한 불분명하게 느껴져요. 그 벅찬 순간을 담기엔 제 언어는 너무 짧고 비루합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어린 시절, 그 밤, 그 순간에 저는 온전히 ‘거기에’ 있었습니다. 일부러 뭔가 하려 하지도 뭔가 떠올리려 애쓰지도 않고, 그저 보고 있는 것, 겪고 있는 것에 마음도 몸도 온전히 내어 주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일치되어, 온전히 ‘거기에’ 있었습니다. C.S. 루이스의 표현을 빌자면 “I am what I do,” 즉 ‘나’와 ‘내가 하는 것’이 하나 되어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살면서 그런 순간들이 있지요. 삶의 구비구비에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는, 그 경이롭고도 고요한 순간들, 순간이 영원이 되고 영원이 순간이 되는 그런 찰나 말입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 우리는 “때때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수년을 살기도 하지만, 인생의 모든 순간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듯한 단 한 시간, 단 한 순간을 살기도” 하지요. 그런 순간 우리는 오장육부를 떨치고 마음과 혼을 산산이 흩어 그 시간 그 장소의 빛깔과 냄새와 소리의 분자들에 몸을 맡기고 그것들과 일체가 됩니다. 나와 너를 나누고 나와 세상을 나누는 분별심(分別心)이 사라지는 경험이라 해야 할까요?

그런 순간들이 아무리 놀랍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굳이 ‘신비체험’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스승들은 그런 순간들의 아주 작은 징후까지도 포착하여, 아마도 어린아이처럼 놀라워하고 두려워 떨기도 하면서 그것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기를, 그리고 그것을 ‘신비’라 표현하기를 쑥스러워 하지도,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힐데가르트 성인이 그랬듯, 그런 순간들을 통해 피조물의 애통한 탄식을 듣기도 하고, 하느님의 고귀한 광채를 발견하기도 했지요.

신비체험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세상 어디에나 펼쳐져 있으니 우리가 온전히 거기에 있기만 하면, 그렇게 임의 손짓에 응하기만 하면 됩니다. 기적이나 치유 같은 현상들은 그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신비체험이란 그러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 어린아이의 눈으로, 아마도 세상을 빚고 처음 바라보시며 “좋다!” 하시던 하느님의 눈을 가장 많이 닮았을 그 눈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저마다 가장 특별하게 보일 테니까요.
 

 
 
조민아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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