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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여명, 다시 바오로 사도를 발견하다[한상봉의 터키 여행기-1]
한상봉 기자  |  isu@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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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7.06  00:4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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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탄불의 아침 햇살이 모스크 첨탑을 비추고 있다. 이미 6백년 전에 무슬림이 장악한 비잔틴 제국의 신령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한상봉 기자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인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 뿐 아니라 바오로 사도가 선교여행의 근거지로 삼은 안티오키아를 비롯해 타르소스, 밀레토스 등이 모두 ‘아시아’에 있었다. 여기서 아시아란 지금의 터키 땅이다. 지금은 그리스도인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무슬림’의 땅이 되었지만, 이곳 터키는 바오로가 그리스도인들을 규합하던 이른바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의 발생지이며,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정통교리에서 벗어난 자들은 무참하게 이단으로 몰리던 ‘그리스도교 제국’을 형성하고, 이 땅이 1453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정복당할 때까지 1천년 넘게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살아왔다.

이제는 그리스정교회마저 자취를 찾기 힘든 이름도 ‘터키’인 나라에서 바오로 사도의 흔적을 더듬거리며 찾아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현지 시간으로 새벽 5시 50분에 도착한 이스탄불 공항에서 새벽 길을 따라서 보스포러스 해안을 끼고 버스가 달렸다. 초승달의 나라, 무슬림의 땅을 밝히고 있는 여명이 자못 ‘종교적’이다. 그러나 무슬림의 성역은 버스의 이동에 따라 곧바로 1천수백년을 거슬러 올라가 로마제국의 권역으로 진입했다. 바오로 사도 사후 200년경으로 가야했다. 일행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이었던 히포드럼(Hippodrome) 광장이었기 때문이다.

   

▲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다. 거대한 화강암 석재를 통째로 잘라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이다. 오벨리스크는 그리스어로 ‘작은 쇠꼬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태양 광선처럼 길쭉한 모양을 가졌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에게 신의 현현으로 여겨졌다. 

한편 로마 포폴로 광장의 오벨리스크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며, 충격적이게도 이탈리아에 있는 가장 큰 오벨리스크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다. 카르낙 신전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가 터키 히포드럼에 있다. ⓒ한상봉 기자

히포드럼 광장은 ‘술탄아흐메트 광장’이라고도 불리는데,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맞은편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비잔틴 시대 전차경주가 이뤄지던 ‘U’자 형의 큰 경기장이었다. 본래 로마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었으나, 330년경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검투 경기를 금지시키면서 대신에 말이 끄는 전차 경기장으로 바꾸었다. 지금은 경기장 흔적이 사라지고, 중앙에 이집트 오벨리스크와 뱀기둥, 콘스탄티누스 기둥, 분수대 등이 남아있다. 

이곳에 있는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원래 기원전 1550년 경에 이집트 파라오가 투트모스 3세가 시리아 원정을 기념해 룩소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 신전에 세웠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인데,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0년경 로마의 힘을 자랑하기 위해 이스탄불로 옮겨와 세운 것이다.

바오로 보다는 '맨발의 예수'에게 매료되다

이번 여행은 바오로 사도를 주보성인으로 모신 정양모 신부와 더불어 떠난 첫 순례였다. 애초에 터키와 그리스를 돌아볼 요량이었지만, 11박12일 동안 두 지역을 돌아다니자니 턱없이 시간이 모자라서, 그리스는 다음으로 남겨두고 터키를 충분히 음미해 보기로 했다.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봉헌한 첫 미사에서, 정양모 신부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며 “그동안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살지 않았는지 성찰해 보자”고 했다. 덧붙여 “여행 중에 타인이 기뻐할만한 일을 한 가지씩은 하자”고 제안했다.

바오로 사도, 내 신앙여정에서 바오로 사도가 존재했던 시절은 군복무 시기뿐이었다. 당시 내무반에서 신참병이 마음 놓고 읽을 수 있는 책은 ‘포켓판 성경’ 뿐이었다. 지금은 돋보기를 써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성경책으로 주로 탐독하고 새겨 읽은 것은 바로 바오로의 편지들과 야고보서, 그리고 요한의 편지였다. 어려운 시기에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는 글이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그러나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면서 상황이 뒤집어졌다. 1987년 봄,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이 개봉되었던 그 해에 이른바 ‘6월 민중항쟁’이 터졌다. 과라니족 원주민들을 위해 포르투갈 군대와 맞서 싸우는 예수회 사제들의 숭고한 투쟁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내세운 해방신학을 낳은 배경이 되었다면, 6월 민중항쟁은 내가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을 접하게 만든 경험적 바탕이 되었다.

내 아버지가 ‘목수’였다는 사실이 그때만큼 다행스럽게 여겨졌던 적은 없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설 자리가 없었다. 타르수스의 유다인 가정에서 태어나 바리사이에 속했으며, 로마의 시민권을 얻고 그 혜택을 받았으며, 유학을 다녀올 만큼 부유했던 바오로. 그가 사도라고는 하지만, 생전에 한번도 예수를 본 적도 없고, 그의 편지 어디서도 예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고 보면, 그야말로 ‘책상물림’이었다고 예단했다. 그가 그리스도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열심히 여행을 다녔다고는 하나, 그가 전한 메시지가 예수의 삶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주목한 것은 오로지 ‘맨발의 예수’였다. 갈릴래아 흙바람 속을 발뒤꿈치에 먼지가 뽀얗게 앉고 딱지가 지도록 걸어다니며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분이 그분이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닌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분은 책상물림일 수 없었다. 바오로처럼 편지를 쓰지도 못했고, 출신성분 자체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동료들이 노동하는 어부이며, 멸시받는 세리이며, 천대받던 여인들이었음은 당연한 노릇이다.

   
▲ 터키에서는 어디서나 모스크 첨탑을 볼 수 있다. 터키에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할만큼 이슬람 문화에 젖어서 산다. 실제 천년 이상 지속된 그리스도교 제국이었던 터키에서 얼마 남지 않은 희랍정교회마저 신자들이 모두 그리스로 넘어가 자못 상징적인 숫자만 터키를 지키고 있다.ⓒ한상봉 기자

바오로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의 전달자인가

심지어 어떤 이들은 “유다는 예수의 육신을 죽음에 넘겨주었지만, 바오로는 예수의 정신을 매장해버렸다”고 말했다. 토마스 제퍼슨은 “예수의 가르침을 최초로 오염시킨 자”라고 혹평했다. 니체는 바오로를 “나쁜 소식의 전달자”라고 말했다. 페미니스트들은 “예수가 사랑했던 여인들을 가부장의 권위아래 복속시킨 자”라고 말한다. 실제로 교회권력은 지난 이천년 동안 줄곧 ‘여성혐오’의 근거로 바오로의 편지를 들이댔다. 그리고 정치권력은 억압받는 백성들에게 바오로의 “세속권위에 복종하라”는 말을 많이도 우려먹었다.

실제로 바오로 사도는 예수 생전에 팔레스타인 땅을 밟은 적이 없으며, 예수 역시 팔레스타인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바오로는 회심 이후에도 3년 동안 유다 땅을 밟지 않았고, 3년 후 예루살렘에 가서도 겨우 보름 동안만 머물렀다. 그 후 14년 동안 그는 다시 유다 땅을 방문하지 않았다. 조국 땅을 알지 못하는 바오로는 디아스포라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으니, 그의 관심은 온통 예수의 죽음과 부활뿐이다. 어쩌면 예수를 죽인 땅이 유다였다면, 예수를 살아가는 땅은 아시아(터키와 시리아)와 그리스, 로마 등 디아스포라였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 정양모 신부가 이스탄불에서 맞이한 첫 미사에서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가정교회가 제국교회가 되고, 교황과 주교들이 정치권력에 참여하면서 타락하고, 온통 교회가 교회법으로 범벅이 되어 ‘새로운 바리사이’의 아성이 되어갈 때마다 개혁적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서’로 돌아가자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상 바오로의 편지들은 예수 사후 20년 경에 씌어졌다. 다시 말해, 바오로의 편지들은 예수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 있으며, 복음서보다 먼저 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돋을새김, 2006)라는 책에서 게리 윌스는 “바오로는 이미 존재해 있는 토대 위에서 활동했다”고 적었다. 바오로는 예수가 임명한 사도들에게 배우기도 하고, 그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낯선 도시에 가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활동했다”고 전한다.

바오로는 아직 ‘교회’ ‘그리스도인’ ‘사제’ ‘성례전’과 같은 용어들을 알지 못했으며, 사절(使節, 대사, 사도)로서, 디아스포라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신앙공동체를 옮겨 다녔다. 사절들은 대개 조를 지어 다녔는데, 바오로는 그의 동역자로 남자들만 아니라 여자들도 언급하고 있다. 처음에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더불어 안티오키아에서 파송한 선교 조의 신출내기 협력자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여행 중에 “예수에 대한 믿음이 온 디아스포라에 걸쳐 힘차게 폭발하는 것을 증언”하는 사절로서 보람을 느꼈다.

바오로 사도가 여행 중에 만난 이들 가운데는 베드로나 야고보처럼 생전에 예수를 직접 만난 이도 있었다. 만약 바오로가 예수와 다른 생각을 가진 ‘훼방꾼’이었다면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바오로를 쉽게 받아들였는지 이해할 길이 없다. 실제로 디아스포라에서는 완고한 예루살렘과 달리 예수가 뜻하던 바가 생명력 넘치게 표현되었고, 바오로 역시 그 폭발 가운데 ‘탁월한’ 일부분이었다. 따라서 바오로의 편지들은 이 폭풍같은 활동현장에서 급히 써보낸 공문서인 셈이다.

바오로의 편지는 활성화된 신앙공동체 안에서 날마다 거듭되는 혼란 속에서 급히 적어보낸 것이다. 즉각적인 논쟁의 열기 속에서, 언제나 압박을 받으면서 사유했던 바오로의 편지에서는 뜨거운 언어가 용암처럼 분출되고, 때로 자기변호나 간곡한 권고의 말들이 뒤섞여 쏟아졌다. 이 점에서 바오로는 ‘냉정한 철학자’가 아니라 ‘전투태세를 갖춘 사자(使者)였으며, 수다스러운 길거리 싸움꾼이며 전선을 감당하느라고 분주했던 사도였다. 따라서 차분하게 예수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그의 몫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예수의 행전은 그 뒤를 이은 마르코와 마태오와 루카의 몫이었다. 이제 그의 길을 따라 걸으며, 말보다 ‘글’이 더 격렬했던 한 사도의 그림자를 찾아보기로 하자. 거기서 인간적 갈등도 타협의 묘책도 빼앗을 수 없는 믿음도 발견하겠지.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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