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터키여행-9]

이코니온이라고 불리던 콘야는 지중해에서 250킬로미터, 흑해에서 500킬로미터, 수도인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250킬로미터 떨어져 내륙에 위치한 해발고도 1030미터의 고원도시다. 로마제국 당시 시리아에서 에페소와 로마에 이르는 대로가 지나가는 바람에 상업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고, 풍광이 아름답고 비옥한 땅이었다. 피시디아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강물로 비옥한 토지를 가질 수 있어서, 곡식과 과일 산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바울로 사도는 바르나바와 함께 제1차 선교여행 때(45-49년)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어 120킬로미터나 이어지는 먼지 가득한 사막 길을 걸어 이코니온에 찾아갔다.(사도 14,1-7). 제2차, 제3차 선교여행 때도 다시 이코니온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사도 15,41-16,1 참조).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이곳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이코니온에서 신앙을 돌아선 이들도 있었으나, 격하게 배척하는 유다인들도 많아서 순교자가 나오기도 했다. 바울로도 돌에 맞아 죽을 뻔했고, 테클라(Thecla)는 이 지역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그리스정교회는 9월 24일에, 가톨릭교회는 9월 23일에 테클라 성인을 기념하고 있다.

▲ 콘야 시내에 있는 성 바오로 기념성당. 2012년 방문 당시 외관 공사중이었다. ⓒ한상봉 기자

바울로 사도는 이 지역에서 만난 티모테오를 매우 높이 평가해서 나중에 에페소 교회를 그에게 맡겼다. 바울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예언에 힘입어 훌륭한 전투를 수행하라”(1티모 1,18)고 권하고, 부자들을 향한 지침도 내려주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 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 6,17-19)

11세기에는 셀주크투르크인들이 콘야를 수도로 삼아 셀주크투르크 제국을 세웠다. 셀주크투르크의 궁성 옛터(지금의 알라딘 파르키) 인근 시내에 1910년에 지은 성 바오로 기념성당이 있다. 이 성당에는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녀 두 분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콘야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거의 없다.

▲ 성당은 수녀 두 분이 성당을 지키고 있었다. 이따금 찾아오는 순례객을 위한 성당일뿐, 터키인들은 그리스도 신앙을 지니기 힘든 상황이었다. ⓒ한상봉 기자

▲ 성당 제단화. 미사가 가진 공동식사의 의미가 듬뿍 배어 나왔다. ⓒ한상봉 기자

▲ 수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순례객들. ⓒ한상봉 기자

▲ 바울로 사도의 이콘이 제단 오른편에 놓여 있었다. ⓒ한상봉 기자

▲ 성녀 테클라는 이 지역 최초의 순교자다. ⓒ한상봉 기자

▲ 성당 안의 성모 마리아상 ⓒ한상봉 기자

▲ 이콘 ⓒ한상봉 기자

▲ 이 성당에 머무시는 수녀님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한상봉 기자

이슬람 수피,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

콘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메블라나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는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를 창시한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Mevlana Celaleddin Rumi, 1207-1273)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궁전의 장미 정원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왕이 메블라나의 아버지 바하틴 벨레디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터키 정부가 1927년 이곳을 박물관으로 개장했다.

입구로 들어서면 단상 위에는 금박으로 수를 놓은 천으로 덮인 관(棺)들이 있는데, 맨 안쪽에 있는 가장 크고 중후한 관이 메블라나 루미의 관이다. 박물관에는 루미의 옷과 애용품, 악기와 공예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중앙 유리관에는 마호메트의 턱수염을 넣은 조그만 상자가 있고, 별채에는 수행자들의 생활을 표현한 인형과 카펫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그가 쓴 시집과 코란의 사본, 친필 서적이 진열되어 터키의 이슬람신비주의 문화를 만날 수 있다.

▲ 루미의 묘가 있는 메블라나 박물관 ⓒ한상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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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란 사본 ⓒ한상봉 기자

▲ 루미에 관한 책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13세기 중엽 셀주크투르크 제국은 십자군 전쟁과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 수많은 사상과 철학이 난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슬람 내부의 분파적 모습과 현학적인 논쟁에 염증을 느낀 뜻있는 무슬림들은 아예 현실을 회피하고 수행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들은 ‘적게 먹고 적게 마시며 아무렇게나 옷을 걸치고’ 기존의 권위와 형식에 저항했다. 13세기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들을 ‘수피’(Sufi)라고 부른다. 이들은 명상과 기도를 통해 이슬람의 가르침에 다가가려고 애썼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였다.

잘랄레딘 루미는 1206년 아프카니스탄의 발흐에서 태어났는데,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가족을 따라 터키의 콘야로 왔으며, 콘야에서 수피즘을 꽃피우고 1273년 콘야에서 죽었다. 그는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영적인 돌파구를 마련해 주고 싶어 했다.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청어출판사, 2011)에서는 “아랍어로 쓴 <꾸란>은 비아랍권인 터키와 이란을 거쳐 가면서 민중들이 이해하기에 너무나 어려워졌다”고 한다. 덧붙여 <꾸란>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막기 위해 <꾸란>을 다른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과 이란인 사이에서 “<꾸란>은 가진 자와 엘리트 지배계층만을 위한 신앙적 도구로 전락했다”고 한다.

이때에 ‘위대한 스승’이라는 뜻의 ‘메블라나’ 수피종파를 창시한 것이 잘랄레딘 루미였다. 루미는 죽을 때까지 인간, 우주, 존재, 사랑 등을 주제로 한 많은 시를 남겼는데, “우리가 죽을 때 이 땅에서 무덤을 찾지 말고 인간의 마음에서 찾자”고 노래했다. 메블라나 종파는 모든 사람은 다 형제이며 신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영혼은 영원하므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사랑 가운데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느냐.
그들이 알라에게 다가가는 길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오라 오라! 당신이 누구이든 간에!
방황하는 자, 우상숭배 하는 자, 불을 섬기는 자,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자도 모두 오라, 내게로 오라!
약속을 어기고 명세를 100번이나 깨드린 사람도 좋다.
오라, 언제든지 다시 오라.
우리의 길은 절망하는 길이 아니라 진리의 길이다.
그리고 용서하라, 또 용서하라.
나의 어머니는 사랑
나의 아버지는 사랑
나의 예언자는 사랑
나의 신도 사랑
나는 사랑의 자식
오로지 사랑을 말하고자 내가 왔음이라”

이희수 교수는 잘랄레딘 루미가 토착종교와 관습을 존중해 ‘관용과 상생’이라는 두 축으로 이슬람을 해석했다고 말한다. 무슬림이든 아니든, 이교도나 무신론자들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펼쳐 인류 공동체가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함께 사는 지혜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정통 이슬람이었던 순니파에 거슬러, 종교적 도그마를 뛰어넘는 교훈을 남겼는데, 일곱가지 교훈으로 요약된다.

“남에게 친절하고 도움을 주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라.
연민과 사랑을 태양처럼 하라
남의 허물을 덮는 것을 밤처럼 하라
분노와 원망을 죽음처럼 하라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기를 땅처럼 하라
너그러움과 용서를 바다처럼 하라
있는 대로 보고, 보는 대로 행하라”

루미가 세운 메블라나 종파는 토착적인 음악과 노래와 춤을 통해 우주와 일체를 이루는 명상춤인 ‘세마’(Sema)를 제안했다. 이 춤을 추는 사람들을 ‘세마젠’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흰색의 긴 치마 위에 ‘에고(ego)의 죽음을 뜻하는 흰색 저고리를 입는다. 그 위에는 무덤을 상징하는 검은 망토를 입는다. 머리에는 묘비를 듯하는 원통형의 모자를 쓴다. 세마는 터키 피리인 네이를 불면서 시작하는데, 이 소리는 신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다고 한다.

▲ 세마춤을 관광객들에게 공연하는 곳이다. 석조로 외벽을 두룬 문을 지나면 정원이 나오고, 정원에서 영상으로 세마춤을 보고, 지하 공연장으로 들어간다. ⓒ한상봉 기자

▲ 세마춤을 담은 영상 ⓒ한상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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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마 공연장 ⓒ한상봉 기자

▲ 공연장 마당에 있는 기념품 가게. 나는 이곳에서 작은 세마춤 인형을 샀다. ⓒ한상봉 기자

세마젠들은 팔을 감싸고 허리를 숙여 몇 차례 서로 인사하고서, 우주를 향해 길을 떠나는 순례객처럼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무덤에서 나오듯이 검정 망토를 벗어던지고 본격적인 춤으로 빠져든다. 팔을 양쪽으로 벌리는 것은 영적 합일을 뜻하며, 신의 은총을 받는다는 뜻으로 오른 팔은 하늘을 향하게 하고, 신의 은총을 전한다는 의미로 왼 팔은 땅을 향하게 한다. 이들은 고개를 23.5도 지구의 자전축만큼 고개를 기울이고, 지구회전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지구 공전과 같이 함께 돌면서 춤을 춘다. 어느 순간 빨라진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무아의 경지에 이르면, 마음 깊은 곳에서 신을 품고, 자신을 비우게 된다. 이는 신 앞에서 하나가 되어 인류와 온 창조물들을 사랑으로 포용한다는 뜻이다.

교리문답보다 신에게 대중을 더 가깝게 가도록 만들어 준 세마 춤은 낮은 곳으로 향한 루미의 사랑이 표현된 것이다. 이희수 교수는 루미의 사상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와 17세기 화가 렘브란트, 18세기 작곡가 베토벤과 19세기 문호 괴테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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