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터키 여행기 - 8

광대한 사암 지역에 퍼져있는 카파도키아는 마치 예수가 세례 후 대면해야 했던 광야를 연상시킨다. 그곳에서 예수는 사탄과 세 번의 영적 전쟁을 치르고 고요한 가운데 아침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 아침은 카파도키아에 무슬림이 밀려왔을 때도 길고 오래 유지되었다.

카파도키아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남동쪽으로 280킬로미터 떨어진 네브쉐히르 주 일대의 광활한 고원지대를 일컫는다. 서기 30년 5월경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그 유명한 오순절 설교를 할 때에 카파도키아에서 온 순례자가 있었고(사도 2,9 참조), 베드로 1서에서 카파도키아 그리스도인에게 인사를 전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을 보면, 1세기 말엽에 이미 이곳에도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싹을 틔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 바실리우스, 카파도키아 수도원 운동의 시작

▲ 성 바실리우스의 이콘(17세기 후반, 우크라이나)
카파도키아는 바실리우스 성인으로 대표되는 4세기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의 산실이었다. 바실리우스(329/330~379)는 카이사리아, 콘스탄티노플, 아테네에서 수사학을 배우고 352년경 카파도키아로 돌아와 수도생활에 전념하다가, 370년에 카파도키아의 대주교가 되었다. 주교였던 니사의 그레고리오, 세바스테의 베드로도 바실리우스의 형제였으며, 괴레메 수녀원을 세운 성녀 마크리나는 그의 누이였다.

바실리우스와 그의 형제들은 특히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오리게네스는 260년경 알렉산드리아에 흑사병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오로지 그리스도인들만이 도망가지 않고 병자들을 돌보는 데 감격해 “그리스도께서 스승과 교사 노릇을 하는 하느님의 공동체들은 세상 안에서 천상의 등불처럼 그들 속의 낯선 사람들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바실리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른 가치관에 따라서 복음대로 살아가는 ‘천상의 등불’로 남아 있기를 갈망했다.

바실리우스는 ‘수도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고요한 곳에서 주님을 따르는 생활을 고민하면서 마태오 복음과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중심으로 <규칙서>를 만들었다. 이 규칙서에서 바실리우스는 ‘정말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사랑에 의해 활기를 갖는 믿음”이며, 그리스도처럼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날마다, 매순간마다 깨어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규칙서 80 참조).

바실리우스는 고요하고 평온한 장소에서 수도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말을 할 때에도 절도 있고 겸손해야 하며, 진지하고 겸손한 눈빛을 지니고 검소한 옷과 소박한 음식에 만족하고, 잠은 가볍고 짧아야 하며, 스스로 노동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사막에서 살았던 안토니오 성인처럼 홀로 수행하는 ‘은수자’의 생활에는 거부감을 보였다. 인간은 야생으로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만 그리스도가 전한 ‘사랑의 계명’을 채울 수 있다고 믿었다. 한편 ‘수덕생활’은 비단 수도원 울타리 안에 있는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것으로 여겼다.

▲ 괴레메 수도원 집성촌에 암석을 부드럽게 감싸는 화초가 한창이다. ⓒ한상봉 기자

바위산 위에 새겨진 수도원 집성촌, 괴레메

실제로 카파도키아에는 3천 개가 넘는 ‘동굴성당’이 있는데, 그 가운데 수도원 집성촌인 괴레메(Goreme)의 성당들은 대단한 풍광을 자아냈다. 화산 폭발로 용암이 흘러내리고, 화산재가 식으면서 엉겨 붙어 만들어진 응회암은 오랜 세월동안 침식되고 풍화되어 카파도키아 일대에 바위산을 이루었는데, 수도자들은 연약한 이 암석을 깎아서 동굴을 만들고 성당으로 삼았다.

이곳에 400여 개의 성당이 있다는데, 대표적으로 바실리우스 성당, 엘말러 킬리세 성당(사과 성당), 성녀 바라바라 성당, 암흑의 성당 등이 있다. 암흑의 성당은 직접 가서 보지는 못하였지만 자료를 찾아보니, 이 성당은 네 개의 원 주위에 하나의 돔이 있는데, 여기에 복음서 이야기를 프레스코화로 그려넣었다고 한다. 안에는 밖으로 난 작은 창이 하나 있을 뿐이고, 8개의 조그만 입구에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이 전부여서, 프레스코화의 색채가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들이 암석을 파고 만들어졌던 젤베(Zelve) 쪽으로 가다보면, 마치 기둥처럼 서 있는 암석 위에 버섯처럼 갓을 쓴 모양의 수도원이 있다. 이곳 파사바아에는 머리가 세 개 달린 수도원이 있는데, 내부에 방이 2개 있고, 그 중 하나는 5세기의 수도자였던 성 시몬이 은둔생활을 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정양모 신부는 그 바위 위에서 수행하는 수도자들을 ‘기둥성자’라고 부른다면서 웃었다. 또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나서, 순교할 기회가 없어진 열심한 신자들은 저 바위 위에 올라가 음식을 받아먹으며 밤낮없이 수행했는데, 높이 올라가 앉을수록 천상에 계신 하느님께 가까이 간다고 생각해, 서로 높은 곳으로 옮겨가려고 애썼다”고 덧붙였다.

한편, 카파도키아는 1174년부터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1515년부터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는데, 무슬림 천하가 되어서도 카파도키아의 그리스도인들은 1923년 로잔느 조약으로 그리스로 이주할 때까지 이곳에서 꿋꿋하게 신앙을 지켰다. 아마도 바실리우스에서 시작된 수도원 전통이 열절한 신앙을 계속 불러 일으켰던 모양이다.

▲ 괴레메 수도원 ⓒ한상봉 기자

▲ 괴레메 수도원 집성촌은 그리스도인 순례자뿐 아니라 터키인들도 찾아와 관광의 명소가 되고 있다. ⓒ한상봉 기자

▲ 수도자들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암석을 파고 들어가 기도했다. 어둠에 스미는 빛이 마음의 바닥에도 고요히 내려앉는 것 같다. ⓒ한상봉 기자

▲ 괴레메의 동굴성당에는 간단한 선으로 그려진 종교적 상징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한상봉 기자

▲ 젤베의 수도원 집성촌 ⓒ한상봉 기자

▲ 파사바아 ⓒ한상봉 기자

▲ 파사바아에는 ‘기둥성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수행하던 버섯 모양의 돌기둥들이 많다. ⓒ한상봉 기자

더 깊은 곳에서 더 오래 머문 신앙, 데린쿠유

데린쿠유(Derinkuyu)에는 무슬림의 박해를 피해 그리스도인들이 숨어살던 지하도시가 있다. 지하 20층(약 180미터) 규모의 지하도시에는 2만 여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주거공간은 물론이고 식수와 곡식 저장소, 수도원, 신학교, 환기시설 등이 갖춰져 있고, 외부 침입시 다른 지하도시인 카이마클리(Kaymakli)로 대피할 수 있는 통로가 9킬로미터에 걸쳐 연결돼 있다.

카파도키아 그리스도인들은 터키의 다른 지역에 비해 물산이 풍부하지 않고 농사도 여의치 않았던 사암 구릉에서, 삶의 희망을 신앙 안에서 건져올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음식물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당 건축에 열을 올리고, 콘스탄티노플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권력과 결탁해 소피아 성당 같은 엄청난 구조물을 쌓아올릴 때, 카파도키아 그리스도인은 동굴을 파고 들어가 자신의 신앙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동굴과 지하도시 바닥에서 이들은 하느님을 만나 뵈었을까.

▲ 데린쿠유 입구 ⓒ한상봉 기자

ⓒ한상봉 기자

▲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하도시의 동굴에는 중간에 돌을 깎아서 닫아걸고 있도록 했다. 이 돌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상봉 기자

▲ 데린쿠유 지하도시에는 지상과 통해 있는 70-85미터 길이의 공기환풍기가 52개나 있다. 동굴 맨 하단에는 우물이 있어 도르래를 이용해 물을 길어올리도록 했다. ⓒ한상봉 기자

▲ 지하도시에는 성당과 신학교 등이 있었는데, 사진 하단에 보이는 세례 터를 지나면 신학교로 들어간다. ⓒ한상봉 기자

▲ 신학교 내부. 박해를 피해 살면서도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학교를 세워 사제를 양성했다. 바닥 가운데를 파서 양편에 학생들이 길게 앉고, 정면에 둔덕을 쌓아 교수가 강의를 했다. ⓒ한상봉 기자

▲ 신학교에서 순례자들이 카파도키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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