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터키 여행기-3]

▲ 성 소피아 성당 내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늘 붐빈다. 성당으로 이슬람 사원으로 종교적 기능을 하던 성당이 이제는 제국의 힘을 건축물로 알아보는 사례로만 남아 있는 듯 해서 보는 이의 마음이 서늘했다. ⓒ한상봉 기자

가톨릭신자로서 이스탄불을 방문한다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성 소피아 성당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제국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종교행사뿐 아니라 국가행사도 이 자리에서 치러졌다는 점에서 ‘종교건축의 형식을 빌어 제국의 위용을 드러낸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 소피아’란 이름은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에게 봉헌한 세 가지 의미 가운데 ‘지혜’를 상징한다. 하느님은 ‘하기야 소피아’ 거룩한 지혜의 원천이며, ‘하기야 이레네’ 거룩한 평화를 주시며, ‘하기야 디나미스’ 거룩한 힘을 지닌 분으로 흠숭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이면서 동시에 ‘종교권력의 상징’이듯이, 성 소피아 성당은 정치권력의 지배하에 놓인 교회가 복음적 긴장을 시험받던 장소이기도 했다. 현존하는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에서 같은 이름으로 그 자리에 세워진 세 번째 성당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360년 2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으나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다스리던 404년에 반란이 일어나 시민들이 불태웠다. 이어 두 번째 성당이 415년에 세워졌으나 이 또한 532년 1월 니카의 반란 때 화재로 무너졌다. 지금 세워져 있는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32년 2월에 착공해 537년 12월 26일에 완공한 것이다.

▲중앙 돔과 그 주변의 가브리엘 천사. 중앙 돔 주변에는 40개의 광창을 두었다. ⓒ한상봉 기자

그러면 그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사건들이 종교와 정치가 만나는 지점인 성 소피아 성당을 둘러싸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까? 궁금하다. 그 열쇠 가운데 하나는 첫 번째 성 소피아 성당이 불타버린 아르카디우스 황제 시절에 활동한 요한 크리소스토모(349년경–407년)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제37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그는 탁월한 설교로 ‘황금의 입을 가진’이라는 뜻의 ‘크리소스토모’라는 별칭이 붙었다. 고대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교리를 옹호하며 복음적 확신 속에서 부자들을 탄핵했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성공회 모두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 [ICON] JOHN CHRYSTOSTOM.Chrysostom receiving Gospel from Apostle Matthew.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세상 부귀와 명예가 자신의 복음적 열망을 채워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372년에 세례를 받고 수도생활을 했으며,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386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요한은 12년 동안 사제 생활을 하면서 깊은 성서묵상으로 얻은 성찰을 강론 때마다 신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는데, 요한은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득권층의 고삐 풀린 사치와 부자들의 탐욕을 끊임없이 고발했다.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가난한 사람)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배고픈 이들을 충족히 채워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 것으로 제단을 장식 하십시오. 여러분은 성전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살로 된 성전이 돌로 된 성전보다 훨씬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부자들이 ‘불법으로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약탈하지 않는다면 죄가 없다’고 믿는 데 반대하며, “부자들의 죄는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 데 있으며, 이는 일종의 강도질”이라고 단언했다. 요한은 우리가 언제든지 죽어서 이승을 떠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 땅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착각한다고 말하며, “지금 몸담아 살고 있는 집을 자랑하며 온갖 장식을 하지만, 우리는 잠시 땅에 머물다 가는 나그네”라고 말했다. 요한에게 “우리가 사는 집이란 사실 영생으로 가는 길목의 ‘여관’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벽이나 머리 위의 지붕에서 평화와 안전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스런 은총의 벽에 둘러싸이고 하늘로 지붕을 삼고자 합니다. 사랑으로 이루는 선한 행실이야말로 우리의 살림살이 가구들입니다.”

바로 이 사람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398년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면서 ‘복음과 권력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요한은 제국교회에 기대어 살던 부패하고 타락한 주교들과 사제들을 면직시켰다. 대신에 요한은 병원과 학교를 늘리고, 교구청의 쓸데없는 장식품과 가구들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구제했다. 이 요한 크리소스토모에게 제국의 힘으로 웅장하게 지은 성 소피아 성당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 총대주교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냈지만, 요한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몇몇 주교들과 적대자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당시 요한은 설교 때마다 로마제국 황실의 허례허식과 사치를 준엄하게 꾸짖었는데, 이런 태도는 황제권력이 종교마저 장악하고 있던 비잔틴제국에서 용납되기 힘든 도전이었다.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통치자들이 하느님께서 뽑아 세운 자들입니까? 그렇다면 저들이 제정한 모든 법률과 규정이 선한 것이요 따라서 이의 없이 복종해야 할 텐데, 과연 그렇습니까? 대답은 ‘아니’올시다. 많은 통치자들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여 거대한 재산을 모으느라 백성을 착취하고, 저들의 악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처벌하며, 이웃나라와 불의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저들의 법이 그릇되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에 불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는 땅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입니다. 만일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중앙의 돔과 이를 떠받치는 반원형 돔이 어우러져 있다. ⓒ한상봉 기자

▲ 아래에서 올려다 본 천정 돔. ⓒ한상봉 기자

그리스도인이며 주교의 한 사람으로서 요한 총대주교는 ‘복음의 힘으로’ 정치권력을 상대로 예언직을 수행했던 것이다. 요한 총대주교는 특히 에우독시아 황후의 허영심과 탐욕을 비판하고 나섰는데, 평소 요한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주교는 황실과 결탁해 36명의 주교들만 참석한 403년 ‘참나무 주교회의’에서 요한의 주교직을 박탈했다. 결국 요한은 부활전야 미사를 거행하다가 군인들에게 연행당해 아르메니아의 작은 마을로 유배당했다. 그 다음해인 404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성 소피아 성당이 잿더미가 되었다.

결국 요한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반대자들이 황제를 부추겨 요한을 흑해 동쪽 해안 피티우스에 있는 한 요새에 유배시키도록 했다. 요한은 넝마를 걸치고 맨발로 유배지로 가다가 탈진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다. 407년 9월 14일, 향년 60세였다. 요한 죽기 전에 전한 마지막 강론은 이러하다.

“머잖아,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형제들과 누이들을 떠나야 할 것 같군요. 하느님이 주신 일터에서 나쁜 사람들이 나를 데려갈 겁니다. 나는 지금 슬픕니다. 비통합니다. 화가 납니다. 하지만 절망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희망을 느낍니다. 이 희망의 원천은, 비록 내가 육신으로 형제와 누이들과 이별하지만 영으로는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입증하십니다.

...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 비로소 사도들은 깊은 가슴으로 그분을 알게 되었지요. 마찬가지로 내 육신이 형제와 누이들을 떠날 때 나는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게 그들을 알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느끼는 이 슬픔은 녹아내리고, 비통한 감정은 달콤하게 바뀌고, 분노에 찬 이 가슴 또한 어루만져지겠지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린 사랑을 깨뜨려 부술 수 없습니다.”


404년 반란과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죽음 이후에도 불행은 계속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532년에 경마장이 있는 히드포럼에서 ‘니카’(승리라는 뜻)의 반란이 일어나 8일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다. 이들은 온 도시의 공공건물을 부수고, 성 소피아 성당에 불을 질렀다. 두 번째 성당이 시민의 반란으로 불타 없어지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집권 5년째 되는 532년에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고 황제의 자존심을 걸고 성 소피아 성당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제국 각처에서 자재를 운반해 왔으며, 지난 화재로 없어진 성당보다 더 크고, 화재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성당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당시 교회 건축은 민심(民心)과 상관없이 황제의 기호에 따라 결정되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한상봉 기자

▲ 성모자 모자이크를 이층에서 좀더 가까이 가서 카메라에 담았다. ⓒ한상봉 기자

▲성당을 알라신과 모하메드, 그의 후계자들의 이름을 아랍어로 쓴 7개의 원판이 둘러싸고 있다. ⓒ한상봉 기자

5년 10개월만에 성 소피아 성당 낙성식을 열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성당의 위용에 감탄해 “예루살렘 대성전을 지은 솔로몬, 당신을 내가 능가했소!”라고 외치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고 전한다. 어찌 보면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추구했던 “성스런 은총의 벽”과 “하늘 지붕”을 걷어내고, “단단한 벽”을 치고 머리에 “돌로 된 지붕”을 덮어놓은 격이다. 이로부터 가난한 백성들이 수시로 얻어 누리던 하느님의 은총이 이제부터는 성 소피아 성당의 주인인 황제와 주교를 통해 내려오게 된 셈이다. 거기서 교리도 정해지고, 교회법도 정비되고, 종교예식과 대관식도 열릴 참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안테미우스와 기하학자인 이시도루스의 합작품이다. 성당은 중앙에 ‘영원’을 상징하는 직경 32.5m의 둥근 돔이 있고, 바닥은 ‘세상’(땅)을 상징하는 사각평면에 네 개의 기둥을 두었다. 15층 건물 높이의 성당은 커다란 돔을 무게를 받치기 위해 서쪽과 동쪽에 반원형 돔을, 북쪽과 남쪽에 육중한 버팀벽을 세웠다. 성당의 총면적은 7,570㎡이며, 중앙 돔 정점까지 높이는 바닥에서 56.6m이다.

중앙 돔에 있는 40개의 창을 통해 햇빛이 성당 안에 들어오게 하고, 창유리 대신에 대리석 투조판(透彫板)을 사용했다. 성당 안은 기둥을 많이 쓰지 않아서 엄청나게 넓어 보이며,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면 거대한 규모의 돔 때문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아마도 동시대 사람들은 이 천정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엄청난 권위(하기야 디나미스, 거룩한 힘)과 황제의 위용을 감당하며 다른 인간 생애의 보잘 것 없음을 맛보았을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발생하는 감정적 반응이 ‘복종’이다.

▲ ⓒ한상봉 기자

▲ 오른쪽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새로운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왼쪽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 소피아 성당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고 있다. 이 사진은 현지에서 구입한 한글판 <이스탄불> 안내책자에 실린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 916년 동안 성당으로, 오스만제국 481년 동안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터키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은 1934년에 성 소피아 성당을 박물관으로 지정해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부르고 있다. 다행히 1453년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도 성 소피아 성당의 위용에 압도되어, 성당을 파괴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자이크로 된 성화들을 회칠하고, 성당 건물 바깥에 네 개의 미나레(이슬람사원의 첨탑)를 세워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했다. 터키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박물관이 되면서, 회칠을 일부 벗겨내 비잔틴 성화를 복원했다.

성 소피아 성당에 남아 있는 성화는 대개 9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레오 3세 황제가 ‘우상숭배’라 하여 궁전 문에 있는 성상을 철거하도록 명령을 내리면서 727년부터 843년까지 성상파괴운동이 비잔틴제국에서 일어났다.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이 분리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림이나 성상으로 표현하면 ‘인성만을’ 표현하게 되고, 더구나 이를 숭배하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행하던 우상숭배를 재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동로마(비잔틴)교회에서는 성당 벽에서 성화들이 사라지고, 벽화나 모자이크가 금지되었다. 당시 동로마교회의 성상파괴령은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서로마(라틴)교회와 동로마교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로마교회는 성화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 성당 이층으로 올라가는 통로는 계단이 아니라 비스듬한 경사로로 되어 있다. 황후가 가마를 타고 올라가서 미사에 참석하던 길이다. ⓒ한상봉 기자

▲ 이층 오른쪽 복도에 있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모자이크. 성모 마리아와 세레자 요한이 예수를 가운데 두고 서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 황제 콤네노스 2세가 황후 이레네와 함께 예수에게 봉헌하고 있는 모자이크. ⓒ한상봉 기자

▲황제 콘스탄티누스 모누마쿠스 4세와 황후 조에가 예수에게 헌금을 봉헌하고 있는 모자이크. 정양모 신부는 예수의 눈동자가 황후에게로 쏠린 것을 지적하며 "예수님도 여성에게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라며 농담을 던졌다. ⓒ한상봉 기자

성 소피아 성당은 오스만제국이 이슬람사원으로 개조하면서 현재 성당 내부에 소형 건축물이 추가되었는데, 성당 중앙 안쪽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성지 메카를 상징하는 ‘미흐랍’이 있고, 오른쪽에는 이슬람 예배시 기도를 안내하는 사람인 ‘무에진’이 사용하는 기도대, 왼쪽에는 오스만 술탄을 위해 1849년에 만든 옥좌가 있다. 또한 성당 위편 사방에는 알라신과 모하메드, 그의 후계자들의 이름을 아랍어로 쓴 7개의 직경 7.5m 원판이 걸려 있다.

성당 안쪽 돔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와 가브리엘 천사의 모자이크가 남아 있다. 이 가브리엘 천사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에게도 신의 계시를 알렸다. 2층에 올라가면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이그나티우스 테오포루스의 모자이크가 있고, 그밖에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 도시모형을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봉헌하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성 소피아 성당 모형을 봉헌하는 모자이크도 있다.

성 소피아 성당에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역설적인 것은 이층 회랑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놓인 ‘HENRICUS DANDOLO’라고 쓰여진 금속판이다. ‘단돌로’는 베네치아 총독으로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 나선 라틴 기사들을 부추겨 같은 무슬림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비잔틴제국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함락시킨 장본인이다. 단돌로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거둬 베네치아로 가져갔으며, 성 소피아 성당에 있던 성물과 성상도 찬탈해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을 꾸미는 데 썼다. 1205년에 죽어서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공로를 인정받아 시신이 성 소피아 성당에 묻혔다. 그러나 1261년에 비잔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탈환해 단돌로의 석관묘를 파헤치고, 그의 유골을 거리의 개에게 던져주었다.

역사적으로 1453년 5월 28일,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기 직전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미사가 봉헌된 곳도 성 소피아 성당이다.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자정에 성당에 입당해 콘스탄티노플의 평화를 간구하는 기도를 올렸다. 평화의 기도는 밤새 올려졌으나, 오스만제국 군대의 함성과 포성에 놀란 시민들이 성당으로 피신해 오고, 5월 29일 동틀 무렵에 성벽이 무너지고 도시가 함락되었다. 그 후 성 소피아 성당에서는 아직까지 단 한 차례도 미사가 봉헌되지 못했다.

▲성 소피아 성당 전경.  ⓒ한상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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