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터키 여행기-6]

2012년에 연재를 시작한 <한상봉의 터키 여행기>를 다시 이어갑니다. 지난 연재물은 하단의 관련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피아 성당이 있는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여행이란 좀더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보면서, 전혀 다른 풍광에 놀라고 부러운 시선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 도시를 떠나 인구 10만명에 그리스도인은 고작해야 50여 명 남짓 남아있다는 안티오키아를 찾아 비행기에 올랐다.

안티오키아는 33년경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리스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대표격인 스테파노가 성전과 율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순교한 뒤에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피신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도시다. 이방인과 유다인으로 구성된 이 교회가 커지면서, 키프로스 태생의 바르나바가 활동했으며, 일손이 부족하자 타르수스에 있던 바울로까지 데려와야 했다.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1차 선교여행을 떠난 곳도 이곳 안티오키아였는데, 예루살렘 사도회의 후에 베드로가 방문한 곳도 안티오키아였다.

▲ 성 베드로 성당으로 오르는 길목에 서 있는 올리브 나무 ⓒ한상봉 기자


팔레스티나와 시리아에 인접한 안티오키아는 예수 전승이 퍼져서, 이 근방에서 <예수 어록>과 <마태오 복음서>가 쓰여지고, <디다케>가 편집되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 때부터 그리스도교 도시가 된 이후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방문해 12월 25일을 예수 성탄 대축일로 기념한 곳도 안티오키아였다.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 교구의 서열을 확정했는데, 로마 다음에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이었고, 이 교구의 교구장을 ‘총대주교’로 불렀다. 그만큼 안티오키아는 동방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티오키아는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중 하나였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기원전 358/354~281)가 301년 오론테스 강변에 수도를 건설하면서 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케이아’라고 이름붙였다. 기원전 64년 시리아가 로마의 속주가 되면서, 안티오키아는 역대 총독들이 머무는 도시가 되었고, 황제 직속의 화폐주조소가 만들어졌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를 팔아넘기고 받았다는 은전 서른 닢도 안티오키아나 티로에서 만든 은전이었을 것이다. 안티오키아는 내내 동로마제국의 영토였다가 540년에는 페르시아에 점령당하고, 635년에 다시 이슬람 군대에 점령당하기도 하다가, 십자군 전쟁으로 안티오키아 공국이 세워졌지만, 1268년부터는 이집트와 터키에 강점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프랑스의 신탁통치를 받다가 1939년 주민투표를 거쳐 이슬람 국가인 터키에 귀속되었다.

1천년 이상 동로마제국이 장악했지만 이슬람의 침공을 받으면서, 다른 터키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안티오키아 역시 바오로 시대와 교부 시대의 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바울로와 바르나바, 베드로가 몰래 미사를 봉헌했다고 전해지는 ‘성 베드로 동굴 성당’이 시가지 동쪽 산기슭에 남아있다. 그러나 이 동굴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적 신빙성이 거의 없으며, 동굴 성당의 일부 벽면만은 안티오키아 공국이 세워질 때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 성 베드로 동굴 성당 ⓒ한상봉 기자

▲ 성 베드로 동굴 성당 ⓒ한상봉 기자

▲ 성 베드로 동굴 성당 ⓒ한상봉 기자

▲ 베드로 사도가 앉았다는 성 베드로 동굴 성당의 돌의자 ⓒ한상봉 기자

▲ 동굴 성당 내부 정면에 놓인 성 베드로 사도의 상 ⓒ한상봉 기자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 사용한 안티오키아 교회

안티오키아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예수의 추종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신약성서에 세 번 나오는데, 사도행전 11장 26절, 26장 28절, 그리고 베드로 전서 4장 16절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를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받아들이면서, 교회 안에서 전면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집안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한때 안티오키아와 터키 전역에 걸쳐 융성했으나, 이슬람의 발흥으로 사실상 이 지역에서 궤멸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대한 도전은 터키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유럽처럼 그리스도교가 오랫동안 장악한 곳에서도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영토로 치부되던 유럽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내가 보기엔 그리스도교에 매달려온 사람들이 대부분 사악했다”고 비판했다. 누구나 그리스도교를 믿었던 신앙의 시대에 고문기구를 갖춘 종교재판소가 있었으며, 수백만의 불운한 여인들이 마녀로 몰려 불태워졌다고 고발했다. 인간의 정서적 발전, 전쟁의 감소, 유색 인종에 대한 처우개선, 노예제도의 완화를 포함해 “이 세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도덕적 발전이 이뤄질 때마다 세계적으로 조직화된 교회 세력의 끈덕진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던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개인의 선행에 온 기대를 걸고 있는 고루한 교회는 “오늘날까지도 뇌물을 받는 정치가보다 간음한 여자를 더 사악하게 여긴다”고 러셀은 비난했다. 타락한 정치인이 음탕한 여인보다 우리 사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해온 게 교회였다. 또한 교회는 어느 누가 국가재정이나 형법이나 사법제도를 개혁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성자로 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인류 복지에 기여하는 것보다 단순히 개인적 성덕만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러셀은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17세기 말까지 쉼없이 이어진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박해가 과거 로마황제들의 박해보다 훨씬 더 혹독했다고 비판하며 “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보다 덜 사나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 덕분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부끄럽게 만들어온 수세기에 걸친 자유사상가들의 덕분”이라고 말했다. 최근까지도 비오 10세 교황의 ‘오류목록’에서 드러나듯이, 교회는 100년 전까지도 이 자유사상가들을 단죄해 왔다. 심지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었던 요한 23세 교황조차도 사제 시절에는 ‘근대주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교황청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었다.

그리스도교에서 인정하는 성인들보다 더 훌륭한 삶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러셀은 무신론자로서 사랑과 지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는 어떤 지방에 페스트가 돌면 성직자들은 그곳 주민들에게 교회에 모여 악령을 쫓아내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 결과, 간청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 사이에 전염병이 엄청난 속도로 퍼졌다. 이것은 지식 없는 사랑의 일례다. 세계대전의 참화는 사랑 없는 지식의 일례다. 어느 경우든 결과는 대규모의 죽음이었다.”(<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사회평론, 2008년 개정판 6쇄, 85쪽)

그러나 러셀은 지식보다 사랑이 근본적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지성인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방법을 찾아낼 목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유능한 의사는 환자에게 헌신적인 친구보다 쓸모 있고, 의학지식의 발전은 박애행위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한다. 그러나 과학적 발견이 부자들에게만 혜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면 ‘자비’가 더 필수적이라는 게 러셀의 생각이다.

▲ 성 베드로 동굴 성당 아래 기슭에서 쉬고 있는 터키 여인들 ⓒ한상봉 기자

▲ 성 베드로 동굴 성당에 소풍 나온 터키 어린이들 ⓒ한상봉 기자

예수를 추종한다는 것, 산상설교의 구체적 적용

신앙이 없이 ‘구원’을 논했던 러셀의 도전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비판적 자기성찰’이 요구된다. 독일 신학자 한스 큉은 <그리스도교―본질과 역사>(분도출판사, 2002)에서 “무엇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가?” 하고 물었다. 한스 큉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삶의 척도로 삼아 그분의 영이 이끄시는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과학이나 철학과 다르게 “실천을 겨냥하는, 먼 길에 나서라고 외치는, 새로운 삶을 선사하고 가능케 해 주는 진리”라고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추종하는 것’이다. 이제는 예수의 제자들처럼 방방곡곡 예수를 따라다닐 수는 없지만, 같은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와 한 몸처럼 복음에 따라 자신의 삶을 가꾸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한스 큉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예수의 복음은 산상설교에 담겨 있다. 내 마음의 지배권을 놓고, 산상설교의 정신이 <바가바드기타>와 경쟁을 벌이고 있다. 내가 예수를 사랑하게 만든 것은 이 설교다”라고 말한 마하트마 간디의 말에 주목했다.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레오 톨스토이나 슈바이처의 마음까지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한스 큉은 “눈이 죄짓게 하거든 빼어던지시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시오! 형제와 먼저 화해하시오!” 등의 요구들을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의 철저한 요구는 개인이나 집단이 쉽게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천 걸음을 함께 가자는 사람이 있거든 2천 걸음을 가는 ‘타자를 위한 자기 포기’,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이 있으면 겉옷마저 벗어주며 ‘자기 손해를 감수하는 힘의 포기’, 오른뺨을 때린 사람에게 왼뺨도 내어주는 ‘대응폭력의 포기’ 등이다.

그러나 한스 큉은 이러한 예수의 요구를 율법적으로 알아들으면 안 되고 말한다. 뺨을 치는 것에는 맞받아쳐서는 안 되지만, 배를 때릴 때는 보복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 요구들은 “인간을 위해,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실현하라는 강력한 호소”라고 말한다. 결국 이 복음적 요청의 바닥에는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는 바울로의 확신이 담겨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을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멋진 말로 표현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새로운 자유’다.

이러한 사랑할 자유를 한스 큉은 저자 불명의 대구(對句)를 통해 보여 주었다.

사랑 없는 의무는 짜증나고 사랑 품은 의무는 끈기있네
사랑 없는 책임은 가차 없고 사랑 품은 책임은 정성스럽네
사랑 없는 정의는 무정하고 사랑 품은 정의는 든든하네
사랑 없는 교육은 대들게 하고 사랑 품은 교육은 너그럽네
사랑 없는 총명은 교활하고 사랑 품은 총명은 참으로 아네
사랑 없는 친절은 역겨웁고 사랑 품은 친절은 자비롭네
사랑 없는 제도는 편협하고 사랑 품은 제도는 관대하네
사랑 없는 지식은 독선적이고 사랑 품은 지식은 믿음직하네
사랑 없는 권력은 난폭하고 사람 품은 권력은 도움주네
사람 없는 명예는 교만하고 사랑 품은 명예는 겸손하네
사랑 없는 소유는 인색하고 사랑 품은 소유는 아끼지 않네
사랑 없는 믿음은 광적이고 사람 품은 믿음은 온화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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