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터키 여행기-5]

▲ 본당 앞에 놓인 촛대에 기원을 담아 불을 놓고 있는 이들. 뒤로 그리스정교회 사제의 모습이 보인다. ⓒ한상봉 기자

최근 콘스탄티노플의 바로톨로메오 1세 일치 총대주교가 “인종차별, 대량학살, 인종청소, 반유대주의, 경배 장소의 파괴 등은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비난받아야 할 야만적인 행위”라며, 이러한 행위에 “종교의 가면의 가면을 덧씌우는 행위는 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나이지리아와 수단 등지에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고, 시리아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반정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2011년 이후 2만여 명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는 분쟁 해소의 방법으로 ‘대화’를 강조하며 “대화는 상호 이해와 서로에 대한 차이에 대한 관용일뿐 아니라, 화해와 변화의 핵심”이라고 전했다.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는 그리스의 임브로스 섬에서 태어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세계총대주교청 비서실장, 소아시아 필라델피아 고대주교청 대주교 등을 거쳐 1991년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겸 세계총대주교로 서임되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지금도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른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의 수도가 있던 도시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정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세계총대주교를 맡는다. 동방정교회는 그리스,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예루살렘정교회 등 14개의 자립교회가 ‘동등한 형제교회’로 연합체를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의 일치 총대주교의 위치는 가톨릭교회의 ‘교황’과 달리 상징적인 명예직으로 남아 있다. 각 정교회들은 동일한 비잔틴 전례를 통해 일치를 도모하면서도 각 지역의 고유성과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있다.

▲동로마와 러시아의 황실가문 문장이기도 한 쌍독수리 문장. 교권과 세속권력을 양손에 쥐고 있는 형상이다.  ⓒ한상봉 기자

▲ 본당 안에는 수많은 성화가 금박장식 틀 속에 도열하고 있다. 제국의 종교를 보여주는 듯 하다. ⓒ한상봉 기자

▲ 제대를 장식한 쌍독수리 십자가. 이 문장을 통해 정교회는 자신이 로마제국의 법통을 이어받은 정통교회(Orthodoxy Church)임을 과시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이스탄불의 그리스정교회 총대교구좌: 하기오스 게오르기오스 성당

동방정교회의 세계총대주교이면서 동시에 그리스정교회의 수장이 머무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는 현재 이스탄불에 있다. 그러나 1923년 스위스 로잔느에서 터키와 그리스가 맺은 조약으로 터키에 남아 있던 그리스정교회 수도자들과 신자들이 모두 그리스로 이주하면서 무주공산(無主空山)에 떠 있는 섬처럼 총대주교좌만 터키에 남아 있다. 터키에 남아 있는 신자가 거의 없다는 뜻인데, 터키의 정교회 상황을 보여주는 듯이 총대주교좌와 대성당은 주택가 골목을 한참 들어가야 만날 수 있으며, 명성과 달리 서울시내의 일개 본당 차원의 규모에 불과했다. 이번 터키여행단을 인솔한 정양모 신부는 “총대주교를 만나려면 한국정교회의 암브로시오스-아리스토텔리스 조그라포스 대주교(한국교구장)의 추천서가 효험이 있다. 총대주교는 방문객에게 30분 정도 말씀과 강복을 베푼 뒤에 초콜릿을 준다”고 전했다.

1054년 이후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은 소피아 성당이었다. 그러나 1453년 메흐메트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자 사흘만에 소피아 성당은 모스크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제국은 세간의 오해처럼 ‘한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란 말처럼 강압적으로 종교탄압을 행하지 않았으며, 세금을 내는 한 타 종교를 허용했기 때문에 정교회의 존속이 가능했다. 그후 정교회의 총본산은 성 사도교회로 옮겼다가 이듬 해인 1454년에 수녀원이던 판마카리스토스(행복한 성모) 교회로 옮겨져 132년 동안 총대주교좌로 있었다.

그러나 판마카리스토스 교회가 1591년 무라드 2세의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전승을 기념하여 페트히에(승리의) 모스크로 바뀌면서, 1586년 총주교좌는 다시 하기오스 데미토리우스 카나피스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후 1603년에 하기오스 게오르기오스 성당으로 다시 옮겨져 지금까지 세계총대주교좌로 남아 있다.

성당 내부가 온통 금박으로 덮히고, 이콘으로 장식된 성당 정면에는 독수리 형상의 정교회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 문장에 새겨진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수리는 오른발에는 교권을 상징하는 십자가, 왼발에는 세속 권력을 뜻하는 황금구를 들고 있다. 이는 동방정교회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황제권력과 동맹관계에 있던 동방정교회는 그동안 자신을 정치질서와 동일시해 왔으며, 그 결과 사회적 발언을 극히 자제하면서 신자들의 개별적 신앙을 돌보고 제국의 신성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이는 가톨릭교회(서방교회)가 로마 제국이 멸망 이후에 서유럽에서 사회통합 기능을 수행하면서 교황이 그리스도교 국가의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권위로 공식화된 것과 결을 달리 하고 있다.

이제 그 제국이 멸망한 상태에서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동방정교회가 자력갱생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도 엄격한 비잔틴전례를 통해서만 종교적 일치를 희구하는 듯이 보이고, ‘동로마 제국’의 문장으로 사용되던 이 문장을 안타깝게 붙잡고 ‘옛 영광’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편 오스만제국의 등장으로 무력화된 그리스정교회 대신에 세력을 확장한 것이 ‘제3의 로마’를 주장하던 러시아의 정교회다.

▲ 본당 안의 샹들리에. ⓒ한상봉 기자

ⓒ한상봉 기자

▲ 그리스정교회는 성화들을 금박 또는 은박 틀 속에 안치해 놓기를 즐겼다. ⓒ한상봉 기자

▲ 정교회는 성모신심이 유별나다. 다만 가톨릭교회의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 교리나 '성모 승천'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상봉 기자

ⓒ한상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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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교회, 러시아정교회에서 그리스정교회로..

동방정교회는 처음부터 ‘지역주의’를 채택해 성경과 전례를 개종한 민족의 모국어로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슬라브 민족들의 토착문화와 통합하면서 급속하게 번져나갔다. 러시아정교회는 그리스 선교사들이 전교해, 988년 성 블라디미르 대공이 통치하는 키예프 공국의 국교가 되었으며, 1037부터 1448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임명한 그리스인 대주교가 통치했다. 이후 1589년 모스크바의 욥(Job) 대주교가 총대주교가 되면서 자치교회가 되어,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 이어 제5위의 정교회가 되었다.

한국의 경우에 서울 아현동에 그리스정교회 니콜라이 성당이 있는데, 이는 본래 러시아정교회 소속이었다. 구한말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이 시작되면서 한국에 파견된 러시아 영사관 직원들에 대한 사목의 필요성에서 러시아정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그들이 1903년 중구 정동에 있는 러시아영사관 인근에 성 니콜라이 성당을 지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분단이 되면서, 소련이 적성국가로 취급되면서 러시아정교회는 한국정교회를 미국의 미트로폴리아 관구의 일본정교회에 맡기려 했으나, 일본정교회 역시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아 갈등하던 중 1955년 12월 25일에 서울 성 니콜라스 성당 신도회의 결의에 따라서 그리스정교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는 한국전쟁 당시 그리스가 연합군으로 참전한 것도 큰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정동에 위치했던 니콜라이 성당은 1968년에 마포구 아현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상봉 기자

동방정교회, 성직주의 약해.. 주교 선출에 평신도 참여

동방정교회는 로마교회가 사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개념에 입각한 교황의 명예상 수위권은 인정하지만 통치권적 수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교황의 교도권적 무류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정교회는 로마와 그리스,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 러시아 등 지역 교회가 정치적 의미와 규모에 따라서 중요성이 결정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교리에 관한 분쟁 역시 일곱 차례에 걸쳐 동방에서 열린 공의회를 통해서 해결하며, 자치적인 국민교회의 최고 의결기관은 시노두스 또는 전국 공의회이며 이 회의에는 평신도도 참석한다.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독립적인 국민교회들의 협의체이며, 1950년에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좌를 전체 동방교회의 중심이라고 콘스탄티노플의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가 선언하였지만 호응이 없었다. 다만 콘스탄티노플은 교회법에 따라 모든 교회의 으뜸이며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위한 상징과 수단이라는 합의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정교회에서 주교는 신앙의 보호자이며, 공동체의 성사를 집행하는 중심이지만 성직주의가 발당하지 않아, 평신도를 주교 선출에 참여하게 했던 초기 교회의 관행이 남아 있다. 정양모 신부는 “가톨릭에서도 평신도가 추기경으로 임명된 사례가 있다. 장 기똥(Jean Guiton, 프랑스 현대 가톨릭신학자)이 바로 평신도 추기경이다. 교회법상 누구나 추기경이 될 수 있지만 교황의 눈에 쏙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수도전통의 영향으로 고위 성직자인 주교들은 결혼하지 않은 성직자들이나 홀아비가 된 사제들 가운데서 선출한다. 그러나 하위 성직자들인 사제들과 부제는 결혼한 남자에게도 허용한다. 단 이미 서품을 받은 상태에서는 결혼할 수 없다. 한편 평신도들은 주교 선출에 참여할 뿐 아니라 교회 행정과 신학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스에서는 거의 모든 직업 신학자들이 평신도들이고 평신도 설교자도 많은 편이다.

교리상으로 정교회는 초기에 동방에서 열린 공의회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등에서 가톨릭교회와 큰 차이가 없으나, 몇 가지 측면에서 표현이나 설명이 다르다. 성령론에서도 가톨릭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발한다’고 가르치지만, 정교회는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한다’고 해석한다. 정교회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두터운 편이지만,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는 배척한다. 정교회는 마리아가 모태에서 성화 된 것이 아니라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서 성화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정교회에서도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사후에 보속을 하는 연옥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정교회의 신앙생활은 미사와 성무일도에 집중되어 있고 대단히 장엄하고 복잡하다. 전례개혁에서 아주 보수적이다. 또한 성모와 성인들, 그리고 성화(icon) 공경이 대단하며, 순례를 즐기고 수도생활(monachism)을 아주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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