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연대 단체로는 처음
현장 부스에 수도자, 사제 등 대거 참여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제23회 서울퀴어문화축제(이하 퀴어축제) 퍼레이드의 맨 앞자리에 그리스도인들이 섰다. 가톨릭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도 그 가운데에 함께했다.

퍼포먼스 트럭을 앞세워 단위별로 행진하는 퍼레이드에서 이번에 무지개예수가 1번 트럭에 선정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전체 행렬의 선두에 서게 된 것이다. 무지개예수는 성소수자 그리스도인 및 성소수자와 함께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다.

이날 가톨릭 평신도들로 이뤄진 가톨릭독서포럼, 가톨릭앨라이 아르쿠스, 알파오메가 세 단체가 공동으로 현장에 부스를 마련했다. 가톨릭 관련 단체들이 퀴어축제에 공식 참여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지만 평신도 단체들이 현장 부스를 열고 행진에 공식 참여한 것은 처음이다.

온라인으로 열렸던 2020년과 2021년까지만 해도 당사자 단체(가톨릭 여성 성소수자 공동체 알파오메가)와 천주교 공식 인권 단체(천주교인권위원회)가 연대하고 신자들이 개별로 참여했다면, 이날은 부스 주관 단체를 비롯해 수도자, 사제, 평신도들의 참여로 성소수자 및 차별금지법 등 관련 이슈에 대한 교회 내 물밑 여론이 변화하고 저변이 확대되는 모양새다.

갑작스러운 폭우 속에서도 서울퀴어퍼레이드 행진의 맨 앞에 가톨릭 신자들이 섰다. ⓒ김수나 기자 
갑작스러운 폭우 속에서도 서울퀴어퍼레이드 행진의 맨 앞에 가톨릭 신자들이 섰다. ⓒ김수나 기자 
서울퀴어퍼레이드에서 선두에선 단위별 트럭 모습. ⓒ김수나 기자 
서울퀴어퍼레이드에서 선두에선 단위별 트럭 모습. ⓒ김수나 기자 
"동성애의 죄악을 회개하라"는 보수 개신교 단체의 시위 모습. ⓒ김수나 기자
"동성애의 죄악을 회개하라"는 보수 개신교 단체의 시위 모습. ⓒ김수나 기자

이날 성가소비녀회에서는 조진선 수녀 등 수도자 10명이 연대 방문 및 부스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무지개 띠를 매어 주고 격려해 주는 등 활동에 참여했다. 예수회 김정대 신부와 박상훈 신부, 원동일 신부(의정부교구)도 부스 방문과 퍼레이드까지 함께 했으며, <가톨릭평론> 편집진과 우리신학연구소 인사 등 평신도들도 대거 방문했다.

가톨릭 앨라이 아르쿠스는 지난 5월 가톨릭 평신도들이 한국 천주교회 내 성소수자와 연대하기 위해 만든 공동체다. 협력자라는 뜻의 앨라이(Ally)는 성소수자 편에 서서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날 가톨릭 부스를 찾은 성소수자 방문객들에게서는 “천주교 신자다. 천주교에도 이런 것(성소수자 연대 단체나 활동)이 있는 줄 몰랐다”, “수녀님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줄은 몰랐는데, 너무 좋다” 같은 반응이 이어졌다.

반가움에 웃다가도 교회 내에서 겪은 상처 때문에 끝내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한 청년은 “성당에서 신부님이 성소수자에 대해 나쁘게 말해서 모태 신앙인데도 성당을 못 나가고 있었는데, 가톨릭에서 이런 걸 하니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난다”며 한참을 울었다.

수녀들은 이들의 어깨를 안아주고, 손을 잡아 주며 한참을 위로하고 응원했다.

부스를 찾아온 성소수자들을 응원하는 수녀들과 사제. ⓒ김수나 기자
부스를 찾아온 성소수자들을 응원하는 수녀들과 사제. ⓒ김수나 기자
부스를 찾아온 성소수자들을 응원하는 수녀들. ⓒ김수나 기자&nbsp;<br>
부스를 찾아온 성소수자들을 응원하는 수녀들. ⓒ김수나 기자 
가톨릭 부스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수녀들이 무지개 띠를 매 주고 있다. ⓒ김수나 기자
가톨릭 부스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수녀들이 무지개 띠를 매 주고 있다. ⓒ김수나 기자

이날 부스에 마련된 가톨릭교회와 성소수자의 관계 맺기를 다룬 책 “다리 놓기” 50권도 모두 판매됐다. 수익금은 성소수자부모모임과 아르쿠스의 활동비로 지원될 예정이다.

가톨릭교회는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되 차별만은 절대 안 된다고 가르친다. 차별금지법 제정도 공식적으로는 우려하고 있다. 반면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의식 수준은 크게 높아지고 있어 혼란스러워하는 신자들이 많은 상태다.

이에 대해 조진선 수녀(성가소비녀회)는 “성직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간 교회가 신자들에게 하느님을 매우 편협한 분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크게 왜곡되게 가르쳐 왔다”면서, “또 신자들은 너무 성직자 의존적이다. 실은 모든 존재가 동등한 자격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인데,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만든 병폐 중 하나”라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조 수녀는 “저희가 여기에 온 이유는 저희 수도회뿐 아니라 가톨릭교회를 포함한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영성 자체가 가장 힘없고 가난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내려오신다는 것이라 그 영성으로 함께하기 위해”라며, “하느님이 모두 소중하게 만들어 주신 존재인데 누가 누구를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나. 울부짖을 필요가 없는데도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당당하게 힘을 주고 싶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가톨릭 부스에 진열된 기념 굿즈들. &nbsp;ⓒ김수나 기자&nbsp;<br>
가톨릭 부스에 진열된 기념 굿즈들.  ⓒ김수나 기자 
이날 가톨릭 부스는 뭇 매체들의 집중 관심을 받았다.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조진선 수녀.&nbsp;ⓒ김수나 기자&nbsp;
이날 가톨릭 부스는 뭇 매체들의 집중 관심을 받았다.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조진선 수녀. ⓒ김수나 기자 
부스 방문객들의 참여 활동판. ⓒ김수나 기자<br>
부스 방문객들의 참여 활동판. ⓒ김수나 기자

서희 씨(라파엘라)는 “다양하고 수많은 이들이 하나돼 즐기는 모습이 마치 천국에 가면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면서, “여러 가톨릭의 높으신 분들, 많은 신자가 아직도 성소수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수용하지 않는데, 조금 다를 뿐 저희도 똑같은 사람이고 예수님께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품으시기 위해 노력하셨다는 점을 기억해 달라”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서희 씨는 알파오메가 회원으로 이날 부스 활동에 참여했으며, 얼마 전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위해 진행된 서울대교구 시노드에도 참여한 바 있다.

한편 전날 진행된 주한뉴질랜드대사관 주최 ‘프라이드 리셉션’에도 가톨릭 쪽 인사들이 개별 자격으로 참여했다. 프라이드는 성소수자들의 자긍심을 높인다는 뜻으로 쓰이며, 필립 터너 주한뉴질랜드대사가 마련한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인권 향상을 기원하며 관계자들을 초대해 대화하고 교류한 자리다. 

다음 날 서울퀴어퍼레이드에는 노르웨이, 뉴질랜드, 덴마크, 독일, 미국, 스페인,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호주, 주한유럽연합대표부 등이 공식 참여했다. 

현장 부스 모습. ⓒ김수나 기자&nbsp;<br>
현장 부스 모습. ⓒ김수나 기자 
(왼쪽에서 세 번째) 원동일 신부(의정부교구)와 신자들. ⓒ김수나 기자&nbsp;<br>
(왼쪽에서 세 번째) 원동일 신부(의정부교구)와 신자들. ⓒ김수나 기자 
부스를 찾은 예수회 김정대 신부, 박상훈 신부, 성가소비녀회 수녀들, 성소수자부모모임, '가톨릭평론' 박문수 편집위원장. ⓒ김수나 기자
부스를 찾은 예수회 김정대 신부, 박상훈 신부, 성가소비녀회 수녀들, 성소수자부모모임, '가톨릭평론' 박문수 편집위원장. ⓒ김수나 기자
종이에 적은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었다는 부스 방문자. ⓒ김수나 기자&nbsp;<br>
종이에 적은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었다는 부스 방문자. ⓒ김수나 기자 

이 자리에 참여한 홍정선 대표(세실리아, 성소수자부모모임)는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는 가톨릭교회가 사회적 차별과 배제로 목숨을 잃어 가는 청소년과 청년 성소수자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성소수자 이슈를 포함해 모든 차별과 배제는 존엄한 생명뿐 아니라 온전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다”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아르쿠스는 지난 6월 비온뒤무지개재단(성소수자 인권운동 단체) 상시 지원 사업 가운데 앨라이 활동 부문에 선정됐으며, 앞으로 교회 내 성소수자 인권 증진을 위해 활동할 계획이다. 올해 하반기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교회 내 성소수자들을 위한 추모기도회를 연다.

이번 서울퀴어퍼레이드는 “세상이 우리를 죄라 해도 우리는 존재 자체로 아름답다”는 양선우 씨(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의 개막사로 시작됐다. 퀴어축제 전체 일정은 오는 31일까지 17일 동안 진행되며 퍼레이드에 이어 한국퀴어영화제, 레인보우 굿즈전 등이 열린다.

이 축제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비롯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어우러져 즐기는 장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2000년부터 매년 여름 서울에서 진행돼 왔으며 올해 축제의 슬로건은 “살자 함께하자 나아가자”이다.

제23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살자 함께하자 나아가자”를 슬로건으로 이달 31일까지 열린다. ⓒ김수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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