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가톨릭평론> 38호(2022년 겨울), '비평-시대의 소리'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부족했던

많은 사람이 “우리 아이는 어디 학교에 다니고 혹은 어떤 회사에 다니고” 이렇게 자기 자식을 소개할 때, 나는 “제 아이는 29살 바이젠더 팬로맨틱 에이섹슈얼로서, 트랜지션(성확정 수술)과 성별정정을 마치고 현재 FTM 남성으로 살아갑니다”라고 소개한다. 저 말을 간단히 풀어 보자면, 본인은 젠더(보통 남녀로 구분)를 2개로 느끼고 있고 특정 성별에 상관없이 로맨틱한 끌림을 느낀다면 좋아할 수 있고, 그럼에도 성적 끌림은 무성애에 가깝다는 뜻이다. 또한 성확정 수술(대개 ‘성전환 수술’이라고 알려져 있다)을 했고, 법적 성별정정도 마쳤으며 현재 남성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나는 내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여자아이한테 연애편지를 꾸준히 써 왔기에 레즈비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모습은 중학교 때까지 이어져 왔기에 아이에게 “너는 레즈비언인 것 같아”라고 말을 건네자 아이도 “나도 그런 것 같아”라고 답했다.

아이와 이렇게 대화를 평온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여성 동성애자인 같은 반 친구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친구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 갔는데, 그 친구를 뒤에서 흉보던 친구를 말리지 못했다. 그것이 가끔 마음에 걸려서였는지, 내 아이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뜻밖이긴 했지만, 그걸 부정하거나 못 견디게 힘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귀는 여자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반갑게 맞이하고, 내 주변의 믿을 만한 지인에게 아이의 성향을 이야기하면서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그 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던 차에 2017년 아이가 대학생 때 나에게 성소수자부모모임에 참석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내 아이가 성소수자임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기에 “그런 자조모임은 위로받기 위해서 나가는 곳인데 나는 슬프지도 않고 별로 궁금한 것도 없으니 나갈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같이 나가자고 권하기에 아이를 생각해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각자 부모는 “저는 게이(혹은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엄마 ○○○입니다” 하며 아이의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말하고 당사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직접 소개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래서 나도 믿어 의심치 않고 “레즈비언 딸을 둔 엄마 정은애입니다”라고 나를 소개했다. 그런데 내 순서가 지나고 내 아이 순서가 되었을 때, 아이는 “엄마는 저를 레즈비언으로 알지만 사실 저는 트랜스젠더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자리는 많은 트렌스젠더와 그들의 부모님들이 참석해 자기소개와 함께 성소수자에 관한 다양한 애환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나는 짧은 시간에 많은 당사자를 만났기에 나의 혼란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놀라움에 가까웠다. 생각해 보니 내 아이는 어릴 때부터 남자아이들과 노는 데 더 익숙했고, 유치원 때도 남자아이들 쪽에서 줄을 서곤 했다. 나는 그것을 단순하게 그냥 보통 여자애들보다 활발하게 노는 걸 좋아하니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게 편한가 보다 하며 생각해 왔던 참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왜 그동안 레즈비언도 괜찮다고 생각해 왔던 엄마에게 트렌스젠더임을 커밍아웃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았다.(커밍아웃이란 “벽장 속에서 나오다”에서 유래된 말로 성소수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을 말한다) 아이가 말하기를 본인도 여자친구를 좋아하는 걸 동성애적 성향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게 무언지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고 그래서 늘 어딘가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리수가 미디어에 등장하고부터 ‘내가 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는 레즈비언은 괜찮다고 생각했던 엄마지만 내 아이가 사춘기 시절에 “엄마, 나는 가슴이 정말 싫어, 여자가 정말 싫어, 남자였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을 때, “이 사회에서 여자로 살기 힘든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야”라고 말했다. 아이가 더는 나에게 어려움을 말하지 못했는데, 자기 신체에 대한 혐오감이 심해 옷을 갈아입을 때도 자신의 몸을 보고 싶지 않아 불을 끄고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 정말 깨발랄이라고 할 만큼 밝았던 아이가 초등학교 어느 즈음부터는 어둡고 캄캄해졌고, 그런 표정이 사진으로도 남아 있어 마음이 아팠다.

나는 레즈비언 친구를 중학교 때 만났던 경험이 있기에 아이가 동성 친구에게 연애편지를 쓸 때 레즈비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트랜스젠더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기에 아이가 젠더 표현을 다른 여자아이와 다르게 할 때 트랜스젠더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못했다. 나름 인권 의식이 있고 깨어 있는 엄마라고 자부했던 나도 결국은 내가 아는 만큼밖에는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너에게 가는 길'의 한 장면. 필자는 주연으로 출연했다.(왼쪽) (이미지 출처 = '너에게 가는 길' 갈무리)<br>
'너에게 가는 길'의 한 장면. 필자는 주연으로 출연했다.(왼쪽) (이미지 출처 = '너에게 가는 길' 갈무리)

어딘가에서 자신을 맘껏 드러내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

흔히 트랜스젠더는 성전환을 한 사람, 즉 단순히 남성에서 여성으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꾸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바꾼다기보다는 본인의 원래 모습을 찾아간다고 생각하는 게 더 맞을 듯하다. 아이가 태어날 때 보이는 외부 성기로 지정되는 성별을 ‘지정 성별’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지정 성별과 본인이 인지하는 성별이 일치하는 사람을 ‘시스젠더’라고 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많은 시스젠더를 만나고, 나 역시 시스젠더다. 하지만 시스젠더와 달리 본인이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젠더가 지정 성별과 다른 사람을 ‘트랜스젠더’라고 한다. 따라서 트랜스젠더 중에는 우리가 아는 ‘성전환한 여성 또는 남성’ 외에 바이젠더,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등 성별이분법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런 내용을 부모모임에 와서야 비로소 처음 들었고, 이후 공부하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잘 몰랐을 뿐이지 그간 주변에 적지 않게 성소수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보통 어느 문화권이나 5-10퍼센트 정도의 성소수자가 있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한 반에 학생 20명이 있다면, 그중에 1명꼴로 성소수자가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5000만 명이 넘으니까 그중 약 250만 명 정도의 성소수자가 있다고 추정한다. 이 숫자는 우리나라 공무원 120만 명과 현역 군인 60만 명을 합한 수보다 많다. 이렇게 많은 성소수자가 주변에 있다는데 왜 우리는 본 적이 없거나 드물다고 생각할까? 아마도 자기를 표현하지 못하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기에 만약 당신에게 주변 성소수자가 한 사람이라도 커밍아웃했다면, 그 성소수자가 당신을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이기에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일이다. 물론 그 당사자가 당신에게 커밍아웃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 커밍아웃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커밍아웃을 받은 사람은 당사자의 동의 없이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아웃팅이 되는 것이다. ‘아웃팅’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성소수자임이 강제적으로 폭로된다는 뜻이다.

성소수자 당사자가 부모에게 커밍아웃하는 비율은 20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성소수자의 약 80퍼센트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에 관한 매우 중요한 부분을 부모님께 비밀로 한 채 살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왜냐하면 커밍아웃했다가 부모님께 거부당하고 혐오의 말을 들으면 모든 걸 잃은 것처럼 상처받을까 봐, 그리고 부모님 또한 고통스러워할까 봐 매우 두렵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는 자식의 남모를 고통을 몰라줬던 것에 미안해 하고 이해와 지원을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부모는 자식에게 그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게 낫다며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부모들은 성소수자인 자식이 갑자기 커밍아웃해서 가정의 평온을 깨뜨린다고 비난하지만, 그처럼 무거운 비밀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살다가 존재가 부서질 지경이 되어서 견디다 못해 커밍아웃하는 자식의 위태로움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관련 논문에 따르면 커밍아웃 후 부모에게 상처받은 청소년의 자살시도율은 일반 청소년보다 8배 정도가 높다고 한다.

최근 '슈룹'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왕비가 자식인 왕자 중에 남몰래 여장을 하고 거울을 보며 행복해 하는 왕자를 이해하며 지지하는 대사가 있다. “너의 진짜 모습을 감추지 않고 살아도 괜찮은 세상이 올 거다.” 드라마의 배경은 조선시대다. 개화된 세상에서는 자기답게 살아도 괜찮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인데, 우리는 개화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인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걸까? 대부분 개신교회에서는 갖가지 성경 구절을 들어 혐오와 차별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2018년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는 경찰이 근처에 있었는데도 같이 참석한 나와 아이가 개신교 혐오 세력에게 폭행을 당해 맞고 옷이 뜯기고 안경이 깨졌다. 백주대낮에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항의하자 그들은 “하느님의 법이 사람의 법보다 위에 있다”며 당당했다.

우리에겐 교회의 위로가 소중하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어떨까? 서울에서는 1년에 한 번 퀴어문화축제가 열린다. 축제에는 각종 단체의 부스가 차려지고 그간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등 각 나라의 대사관과 불교, 성공회 등 여러 종교의 부스가 보였지만 천주교 부스는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다행히 올해 처음으로 천주교 부스가 보여서 참 반갑고 고마웠다. 천주교 신자인 당사자와 부모들은 퀴어축제에 차려진 천주교 부스를 보면서, 하느님 안에서 축복과 감사를 느끼며 한편으로 안도감과 희망도 느꼈다. 또한 최근 열리는 성소수자부모모임의 정기모임에는 감사하게도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앨라이Ally(지지자)들이 많이 참석하는데, 그중에 많은 분이 성직자와 수도자다. 성소수자와 그 가족을 이해하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기 위해 온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일부 그리스도교의 혐오와 차별로 크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종교를 떠난 후 외로워 하거나, 그 안에서 숱하게 갈등하며 힘들어 하다가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의 환대를 받자 위로와 치유를 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오래전에 교회를 떠난 나 같은 사람조차 그간의 냉담을 돌이키고 신앙과 영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해외에서도 성소수자 사목에 적극적인 교회 지도자가 있다. 독일 뮌헨 교구장 라인하르트 마르크스 추기경은 올해 3월 뮌헨 성 바오로 성당에서 '퀴어 찬양예식과 사목적 돌봄 20주년' 미사를 거행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문기구인 추기경위원회의 일원이자 교황청 재무평의회 간사이기도 한 마르크스 추기경은 주간지 <슈테른>과 인터뷰에서 동성애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에 기초한 ‘포용적 윤리’를 발전시킬 필요성을 역설하며 “교리는 영원불변이 아니다.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독일 베를린대교구의 하이너 코흐 대주교는 동성애가 “정상적인 성적 지향으로서, 특정 사회화의 도움으로 변화될 수 없고 변화되어서도 안 된다”라고도 말했다.

물론 이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신앙인과 지지하지 않는 신앙인 모두 소신과 근거가 있겠지만, 종교가 시대적 맥락과 상관없이 2000년 전에 기록된 경전 구절로 사람을 판단하는 재판관의 자리에 설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하느님의 사랑이 현존하는 자리에 설지 생각해 볼 사안이다. 만약 재판관의 자리에 선다면 매일의 날씨가 아니라 시대의 기후를 살피는 재판관이 되기를 바란다.

하느님이 주신 ‘스페셜 에디션’, 운이 좋거나 운이 더 좋은 여러분과 나

내가 출연한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이 개봉했을 때 시사회 극장 한 관 전체가 많은 성직자로 채워져 언론에서 화제가 될 정도로 성소수자 신자들에게 성직자는 특별한 존재다.

참고로 이 영화는 현재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고 각종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으며, 올해 12월에 발표할 대종상 후보에도 올라와 있는 화제작이다. 그 덕에 영화 역사상 매우 드물게 지난 1년 동안 100회가 넘는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전국에서 많은 관객을 만나 왔는데, 우리 부모들은 성소수자 자식들을 “신이 주신 스페셜 에디션”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고 사람들은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사람이 나이 오십을 넘으면 보통은 익숙한 환경에 안주해 바뀌기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부모들은 성소수자인 아이들에게 가는 길을 통해 다른 세상을 알게 되었고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 좋은 어른이 될까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인 <NPR>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는 혐오의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전체 이용자의 0.06퍼센트뿐인데, 그 악플이 큰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99퍼센트의 사람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스라엘의 작가 엘리 위젤의 말처럼 “중립은 가해자에게만 이로울 뿐 희생자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침묵은 결국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이 된다. 그래서 성소수자 부모들은 중립을 지키는 척 침묵하지 않고,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권 현장에서 연대하고 활동한다. 이제는 내 자식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픈 사람들과 함께 서고 싶고 성소수자 자식 덕분에 우리 삶이 더 깊고 넓어졌기에 아이들을 “신이 주신 스페셜 에디션”이라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만약 성소수자를 존중해 주는 시대, 그런 사회에서 산다면 여러분과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가 아니어서 우리가 노력해야만 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운이 더 좋은 사람이라는 걸. 왜냐하면 여태 없던 변화를 꿈꾸는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얻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걷고 함성을 외치고 함께 비를 맞고 서로를 안아주는 모든 일은 세상을 바꾸는 작지만 위대한 일이다. 약자들이 서로 손잡고 연결되어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큼 강하고 단단하고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그게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모습일 테다. 하여 우리는 지금 운이 좋은 사람 아니면 운이 더 좋아서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가진 사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여러분께도 손을 내미니 이 멋지고 위대한 일에 함께하셨으면 좋겠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소중한 앨라이가 되어 주시기 바란다!

정은애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나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로 39년 차 소방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4년 동안 준비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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