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들의 공개 이견, 걱정할 일일까 아니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계획일까?
성령 강림 대축일을 생각하며

(기사 출처 = America)

성령 강림 대축일(올해는 6월 5일)의 제1 독서는 사도행전 2장 1-11절이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도들 위에 성령이 불꽃 모양의 혀로 나타나 이들이 모든 나라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해 준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우리에게, 당시 사도들을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도 알아볼 수 있던 방식으로 말한다.  즉 지금의 우리도 서로 이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한 종교 공동체 안에 살고 있으며, 모든 사람 심지어 주교들 사이에도 다른 말로 인한 혼란을 겪는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의 이웃들이 성령께서 불러일으킨 소란에 이끌려 온 이야기를 듣는다.

-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

성서학자들은 이때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신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결정적 순간이라고 말한다. 복음을 만민에게 전하라는 핵심을 이해한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성령께서 서로 다른 언어로 분열된 바벨탑의 저주를 되돌렸다는 점도 강조할 가치가 있다. )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초기에 (유대교 전통에 따른) 할례와 부정한 음식에 대해 관용하는 결정을 내려 유대인이 아닌 이들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처럼, 바로 이 순간을 통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던 이들이, 모든 이에게 전해진 이 기쁜 소식을 듣고 하느님의 위업을 알게 된 것이다.

교회가 지내 온 모든 시대에, 하느님 백성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해 왔다. 문자든 비유든, 고의적이든 아니든. 같은 말을 할 수 없을 때 개념을 전달해 주는 통역이 필요하지만, 이는 언제나 완전할 수 없으며 때로는 전혀 다른 황당한 개념으로 전달된다. 

영국 왕이 크리스토퍼 우런이 지은 런던의 성 바오로 대성당을 둘러보고 “재미있고, 무섭고, 인공적”(amusing, awful, and artficial)이라고 말했다는, 한 가지 식상한 고사를 생각해 보자. 당시 이 세 단어는 현재와 전혀 다른 “놀랍고, 장엄하며, 정교한”(amazing, awe-inspiring and well-crafted)이라는 뜻이었다.  모든 사람이 겉으로는 같은 언어로 말한다고 해도, 서로 간의 더 큰 간격을 넘어 말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렵겠는가.


현재 상황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근 시작한 3년에 걸친 세계 주교시노드 준비를 위한 시노달리타스 절차 중에 더 다양한 의견과 표현을 권고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른바 '고르바초프적 순간'이라고 말할 법하다. (역자 주: 고르바초프는 1980년대 소련 공산당의 마지막 서기장, 대통령으로서 소련 사회주의의 개혁과 개방(글라스노스트)을 수행하고 대 서방 화해정책으로 냉전을 해체했으나, 소련 또한 그의 뜻과 다르게 해체됐다.) 비유에 따르면 교황의 결정은 교회에 신선한 자유를 선사했고 그간 잘 버텨 왔지만 이미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한 교회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새로 찾은 자유와 명백한 위험이 독일보다 더 뚜렷한 곳은 없다. 독일에서는 지금 “시노달리타스 절차”가 진행되면서 사제 독신에서 동성 결합, 교회 통치에 관한 교회법의 대폭 개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능성을 모두 열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더 극적인 것은, 최근 뮌헨-프라이징 대주교인 라인하르트 마르크스 추기경(프란치스코 교황의 자문기구인 추기경위원회의 구성원이자, 교황청 재무평의회 의장)이 동성애적 행위의 도덕성에 대한 교회 가르침은 변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더 나아가, 그 자신이 동성애 커플들을 축복한 적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는 지난 3월 31일자 독일 주간지 <슈테른>에 “교리는 절대불변이 아니”라며, “교리가 말하는 바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미국 타일러 교구의 조셉 스트리클런드 주교는 트위터에 다음과 같이 자기 의견을 밝혔다.

“마르크스 추기경은 이미 가톨릭 신앙을 벗어났다. 그는 정직할 필요가 있으며, 공식적으로 사임해야 한다.”

마르크스 추기경이 스트리클런드 주교를 아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이 의견에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눈여겨볼 사건이었다. 한 주교가 다른 주교에게 공개적으로 사임을 요구한 일이 마지막으로 일어난 때가 언제였을까? 다른 주교를 배교자라고 불렀다는 것은 교회 분열과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진정 분열의 위험에 빠진 자는 누구인가?

공정하게 말하자면, 스트리클런드 주교는 미국 주교들 사이에서도 배제된 사람이다. 그가 다른 주교를 샌드백처럼 난타함으로써 뉴스에 등장한 것이 처음도 아니다. 지난해에도 그는 미국 시카고의 블레이즈 수피치 추기경과 벌링턴의 크리스토퍼 코인 주교가 각자의 교구에 대해 내린 결정에 대해 트위터를 통해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아마도 그가 일으킨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은 그가 라크로스 교구의 제임스 올트먼 신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트위터에 밝힌 일일 것이다. 올트먼 신부는, 여러 사건이 있지만, 진보적인 가톨릭 신자들을 “좌익 파시스트 나치”라고 부르고,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가톨릭 신자들은 “지옥불을 맛볼” 것이라고 주장해 직무를 제한당했다. 

하지만 스트리클런드 주교가 미국 주교들 중 독일 교회가 취한 입장에 반대한 유일한 인물은 아니다.

지난주 성목요일, 샌프란시스코 대교구의 살바토레 코르딜레오네 대주교는 <퍼스트 씽즈>(First Things)에 “내가 독일 주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 서명한 이유”라는 글을 실었다. 문제가 된 이 서한은 “독일의 우리 형제 주교들에게 보내는 형제적 공개서한”이었지만 독일 주교들에게 보내는 대신에 온라인에 공개됐다.

이들은 독일 교회가 시노달리타스적 행동들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뢰성을 포함하여, 교회 권위의 신뢰성을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서한에 서명한 74명 가운데 49명은 미국 주교들이었으며,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의 주교들이 추가로 (독일 교회를) 비판하고 우려하는 입장을 내놓았고, 폴란드 주교회의 의장인 스타니스와프 가데츠키 대주교도 동조했다.

이 “형제적 공개서한”에 대해, 독일 주교회의 의장 게오르크 베칭 주교는 4월 14일 서한을 통해 응답했다.

“공동합의적 길은 당신들이 쓴 것처럼 절대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위를 포함해 교회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다.”

베칭 주교는 독일 교회의 시노달리타스는 “단명하는 사회학적 이론이나 세속적 이념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며, 신앙에 대한 지식의 핵심 원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성서와 전승, 교도권과 신학, 그리고 또한 복음의 빛에 비추어 해석된 복음의 징표와, 믿는 이들의 신앙 감각이다”라고 했다.(역자 주: 원문의 복음의 징표는 “시대의 징표”의 오기일 수 있어 보인다.)

공동합의적 절차는 우리가 다시금 맞는 새 성령강림이 아니다. 우리는 새로 성령강림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새 육화(강생), 새 부활이다. (사진 출처 = America)
공동합의적 절차는 우리가 다시금 맞는 새 성령강림이 아니다. 우리는 새로 성령강림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새 육화(강생), 새 부활이다. (사진 출처 = America)

공동합의적 절차에 대한 신뢰, 또는 불신

세계 주교시노드를 준비하는 3년에 걸친 전 세계적 시노달리타스 절차가 1년 지났고, 성소 부족과 세계 각지에서 교회로부터의 이탈이 크게 진행되는 위기가 더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들과 그런 것을 부추기는 자들이 없어질 것으로 예상해서는 안 되며, 또한 그런 공개적 부동의가 그칠 것으로 봐서도 안 된다.

사실, 이는 어느 정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라던 것으로 보인다. 더 공개적인 토론을 하고 <프라우다>는 더 적게, 말이다. (역자 주: <프라우다>는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로서 “진실”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공식적으로 당(교회)에서 인정한 의견만 한 입으로 말하는 것을 뜻한다.)

아마 우리는 모두 결정해야 할 것 같다. 언제나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과거로부터 무척 익숙한 교황의 개입 없이, 무엇을 논의하고 무엇을 제외할지, 무엇이 교회의 영구한 가르침이고 무엇이 (변할 수 있는) 지역적 규정 또는 관습인지 말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합의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심하게 부서진 교회에서 그런 합의가 가능한가? 게다가 이 합의는 미국과 유럽의 주교만으로는 안 된다. 남반부 교회의 이야기도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며, 우리가 이곳 미국에서도 별 신경쓰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 안에 존재하는 교회의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 제대에 서서 말하기보다는 신자석에 앉아 듣는 것에 더 익숙한, 교회의 95퍼센트의 말도 들어야 한다. 

역사와 현실

교회론 학자로, 그 누구보다 시노달리타스에 대해 잘 아는 조셉 코몬차크 신부는 최근 <아메리카>와 인터뷰에서 "일치가 항상 단일성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한 나라 안에서도 어떤 지역에서 작동하는 방식이 다른 지역에서는 다를 수 있다.

이는 교회의 관습과 규정에도 마찬가지다. “모든 일에 대해 전 세계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규정을 둘 필요가 없고, 지역 주교들에게 각자 결정할 기회를 더 줘야 한다.”

코몬차크 신부는 케네스 우드워드와 인터뷰하면서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80년대에는 “(겨우) 여자아이가 복사가 될 수 있느냐를 두고 결정하는 데 교황청의 두세 부서가 논의하느라 8년이 걸렸다. 그때 교황청은 미국 알래스카에서 남아프리카의 줄루랜드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디에나 다 적용할 규정 -여성 복사 허용- 하나를 통과시켰다.”

또 다른 현실 하나. 지금의 통신수단이 나오기 전(그러니까, 교회가 2000년 존재한 가운데 1850년 동안) 교황청이 내리는 지시와 결정은 물론 심지어 지역 주교들의 지시와 결정도 지역 교회에 전달되는 데 몇 주, 몇 달씩 걸렸다.

예를 들어, 20세기에 들어선 지 한참 뒤에도, 미국 신자들 대부분은 현임 교황의 이름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지금 교황이 비오 교황인가? 아니, 베네딕토 아냐? 레오이던가? (역자 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비오 9세, 레오 13세, 비오 10세, 베네딕토 15세, 비오 11세의 순서다.) 교황은 저 대서양 바다 건너에 살았고(유럽인들에게는, 저 먼 알프스라는 산맥 너머에 살았고), 자기네가 사는 지역 교회에서는 아주 멀었다.

하지만 이렇게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해서, 그리고 이에 따라 전례에서부터 교회-국가간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단일하지 않았다고 해서, 미국 가톨릭교회, 멕시코 가톨릭교회, 캐나다 가톨릭교회와 같은 식으로 서로 다른 교회로 나뉘지는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자. (역자 주: 우리가 흔히 쓰는 “한국 가톨릭교회”는 Catholic Church in Korea처럼 표현하여, 각 지역에 존재하지만 서로 같은 (하나의) 교회이며, 이를 쉽게 Korean Church라고도 하는 것은 원래 영국 성공회처럼 국가별로 분립된 교회를 뜻하기에 엄격히는 뜻이 다르다.) 그보다는, 이러한 지리적 격차는 지역교회들이 각자의 지방에서 토착화되고, 자생은 아니지만, 대체로 자율적이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지금처럼 모든 의견과 모든 분란이 세계 어느 곳에 살든 신자들의 시선에 즉각 들어오는 이 21세기에 교회를 이처럼 하나로 묶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은 다음과 같다.

“지난 2000년 동안 교회를 하나로 묶어 온 것 대부분, 그것은 분명 교황의 권위나 전통에 대한 절대적 의존은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함께 행하고 주교나 로마 주교가 집전하는 성체성사에 대한 신뢰였다.”

코몬차크 신부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체로서의 가톨릭교회가 지역 교회들 안에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보편교회라고 하는 따로 별도의 교회는 절대 없다. 공번된 교회(Catholic Church)가 있으며, 믿음과 희망, 그리고 자비에 바탕을 둔 그 관계망이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뜻에서 이 교회는 보편(universal)적이지만, 또한 아주 구체적이다.”

“이러한 지역교회를 그 교회가 더불어 살아온 역사적 순간들과 떼어내 존재하는 것처럼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교회가 다뤄야 할 현 시대의 큰 과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지금 받는다면, 당신이 곧바로 내놓아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어디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냐? 누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냐?’ 왜냐하면 우리는 이곳 미국에 살며 이런저런 과제 뭉치를 안고 있으며, 또한 저기 아프리카의 말리에 사른 사람은 다른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미국인은 이 말을 잘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계 곳곳의 교회는 미국 본당들과 모습이 다르다는 것, 아프리카 말리에서는 중요하거나 긴요한 것이 미국 일리노이주 피오리아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는 교회적, 정치적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통치나, 문화 규범, 성체를 영하는 방식 등 많은 문제를 놓고 서로 지역적으로 뚜렷이 다른 관습을 갖고 있는데, 하나의 보편교회라는 것을 (별도의 구체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니, 우리는 교회가 모든 시대와 모든 현장에서 늘 똑같았다고 주장해야만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세계 다른 곳 그 어디보다 더 많은 우상들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지 말라는 중세 교회의 가르침은? 이것은 지금도 우리가 배우는 책에 쓰여 있다. 베네딕토 14세의 회칙 “Vix Pervenit”(1745)를 읽어 보라. 이는 지금도 ‘찬미받으소서’에서처럼 보편적인 교도권적 가르침에 포함돼 있다.) 하지만, 서로 파문의 저주를 퍼부어 봤자 좋은 결과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주교가 다른 주교에게 하든, 내가 이웃에게 하든 말이다.

그럼 다음은?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가 성령강림절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신약 성경에서 오순절 이야기를 보면 한 가지가 분명히 보인다. 제자들은 갑자기 한목소리로, 같은 말로 모두 말하기 시작하지 않았다. 아니, 이 자리에 참여한 각 공동체는 이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각자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공동체는 한 가지만 말하거나 문화적으로 단일하거나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리적으로도 단일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일어나 서서 “내 말이 하느님의 소리이며, 누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는 잘못된 말을 하거나 듣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시노달리타스는 새로운 성령강림이 아니다. 우리는 새 성령강림이 필요치 않다. 그보다는 새 육화, 새 부활이 필요하다. (성령강림은) 한 번으로 족하며, 우리는 매번 새 것이라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

사도행전의 원문은 여전히 지금도 교훈적이고 또 적합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 안에서 일치의 메시지, 많은 이가 하나된 메시지, 하느님 위업의 나눔을 들을 필요가 절실하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결국에는 혼란스럽거나 심지어 무서운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파문하면서 우리의 세월을 낭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100년도 전에, 베네딕토 15세는 회칙 ‘평화를 호소하는 것’(1914)에서 이 점을 아주 명백히 지적한 바 있다.

“신앙이나 규정에 아무런 해가 없는 문제들에 관해 – 사도좌의 그 어떠한 권위 있는 개입이 없을 때- 다양한 의견이 발산할 여지가 있는데, 각자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옹호하는 것은 누구나의 권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러한 토의 중이라 하여, 자비를 심각히 위배하는 요소가 될지 모를 표현들은 절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가 자유로이 각자의 의견을 옹호하게 하라, 하지만 그 또한 마땅한 절제와 더불어 그러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 누구도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뿐인 다른 이에게 신앙 또는 규정에 불충하다는 딱지를 붙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우리는 베네딕토 15세의 이 말을 우리 교회의 영원한 전통의 변함없으며 근본적인 요소로 생각하도록 하자.

(제임스 킨은 <아메리카>의 선임 편집자다.)

기사 원문: https://www.americamagazine.org/faith/2022/04/19/bishops-schism-synod-24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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