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달리타스 트란스페렌다

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공동합의성이라는 낱말을 처음 접한 계기

2년 전이었다. 2019년 10월 19일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서울대교구 평신도 사도직 단체 협의회가 주최하고 서울평협 평신도 사도직 연구소가 주관하는 ‘열린 세미나’가 있었다. '누구를 위한, 누구의 교회인가, 하느님 백성의 공동합의성 실현을 위해'라는 주제가 흥미로웠다. 이날 최현순 교수님의 발표를 들으면서 공동합의성이라는 낱말이 처음 머리에 들어왔다. 라틴어 시노달리타스를 번역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이 말에 담긴 신학적 함의가 상당히 깊다는 느낌도 들었다. 발표가 끝나고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주로 교회의 본질과 사명, 교회 안에서의 삶 등에서 공동합의성이 지니는 의미를 짚는 이야기가 많았다.

열린 세미나를 방청하면서 공동합의성 개념은 오늘날 천주교가 사회교리를 제정하는 과정에도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규범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공동합의적인 논의를 거쳐서 정할 문제가 아니냐는 것이다. 교구의 직권자나 사제 또는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평신도가 신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하느님 백성다운 교회를 이루자는 것이 공동합의성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 뒤로 교회 안팎에서 벌어지는 사회적인 사안을 다루면서 공동합의성 정신을 강조하는 논의를 본 적이 없었다. 발표에 대한 논평에서도 비슷한 우려가 있었다. 즉 한국의 상황에 대한 진단과 분석, 수용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문제에 대한 분석이 미비하여 공동합의성 논의가 이상주의에 머물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논의 자체가 신학적 교회론, 조금 더 나아가더라도 공동합의에 이르는 영적 식별의 방법이라는 원론의 차원에서 계속 맴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김우중
©김우중

공동합의성 < 시노달리타스

시노달리타스에 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할 것이다. 교회론, 성사론, 성직론, 종교 대화, 사회교리 등 많은 주제가 시노달리타스와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는 시노달리타스 개념의 번역 문제다. 평소에 종교 용어의 번역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이 낱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계속 머릿속을 맴돈 것은 저걸 왜 저렇게 쓸까 하는 의문이었다. 처음에는 공동합의성이라는 말을 썼으나 요즘은 다들 시노달리타스라고 쓴다. 왜 그런가 했더니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2021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앞으로 시노달리타스라고 쓰기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교회의 홈페이지를 찾아보았더니 이렇게 나와 있었다.

“그동안 ‘공동합의성’으로 번역해 온 ‘Synodalitas’의 우리말 번역에 대해 논의하였다. ‘Synodalitas’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을 위해 모든 하느님 백성이 친교 안에서 함께 참여하고 경청하며 논의하는 여정의 구조와 정신을 담고 있다. 따라서 ‘공동합의성’, ‘공동 식별 여정’, ‘함께 가기’, ‘동반 여정’ 등 한 단어로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 여정이라는 ‘Synodalitas’의 핵심적인 의미를 충분히 담을 수 없다는 데 동의하였다. 이에 라틴어 발음대로 ‘시노달리타스’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지금 쓰고 있는 번역어(‘공동합의성’)가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를 따지기 전에 교회 용어를 자기 나라말로 옮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지역 교회의 성격과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16세기의 동아시아 선교 초기에 데우스, 그라치아 등 교회 용어를 선교지역의 언어로 번역하면 본래 뜻이 왜곡되거나 핵심적인 의미를 충분히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중국의 한자, 일본의 가나, 조선의 한글 등 표기 방법만 빌리고 발음은 원어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지역 교회의 자율성은 크게 증대되었으니, 지역의 문화나 관습, 어문 생활을 고려하여 적절한 번역어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아시아 교회는 시노달리타스를 뭐라고 하나?

한국 교회는 ‘Syodalitas’를 공동합의성이라고 번역하여 쓰다가 시노달리타스라고 적기로 했다. 그러면 다른 아시아 교회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아는 분들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참 재미있는 답변들이 돌아왔다. 베트남, 중국(타이완과 홍콩 포함), 일본 교회의 순서로 소개하겠다. 단, 이것은 그 지역 교회의 주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알려준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 대략 그렇게들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 이 정도로만 받아들이면 되겠다.

베트남 천주교회에서는 ‘Hiệp Hành(히엡 하잉, 協行)’이라고 한다. 함께 가다 또는 함께 행하다, 이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베트남도 한자 문화권이므로 한자에서 유래한 낱말을 가지고 교회 용어를 번역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 천주교회에서는 ‘眾議精神(중의정신)’ 혹은 ‘公議精神(공의정신)’이라고 한다. 그리고 Synodal Process는 ‘同道偕行(동도개행,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감)’이라고 번역한다. 중국도 역시 한자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천주교회에서는 Synodal Church는 ‘共に歩む教会(함께 가는 교회)’라고 번역하지만, 시노달리타스는 영어 발음을 그대로 가져와서 그냥 ‘シノダリティ(시노달리티)’라고 표기한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만이 원어를 고수하고 있는 셈이다.

 

번역에 필요한 것은 문화적 상상력

나는 연옥이라는 교회 용어가 어떻게 성립하였는지를 공부한 적이 있다. 12세기 유럽에서 확립된 용어는 푸르가토리움(purgatorium)이었다. 이 낱말이 아시아로 건너왔을 때 처음에는 발음 그대로 적었다. 기리시탄 시대 일본어로 된 교리문답을 보면 ‘뿌루가또우리요(プルガトウリヨ)’라고 나온다. 포르투갈식 표기(purgatorio)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중국에서 미켈레 루지에리가 1584년에 ‘신편서축국천주실록’이라는 최초의 한역서학서를 지었는데, 여기에는 포혁다략(布革多略)으로 나온다. 아마 중국어 발음으로 푸르가토리움에 가까울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까지는 출발지의 발음을 도착지의 문자로 그대로 적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루지에리의 저서를 복간한 나중의 판본인 ‘천주성교실록’에는 용어가 달라진다. 연죄자가 거처하는 곳[煉罪者居之]이라고 되어 있다. 그 뒤에 연죄지옥(煉罪地獄), 연죄옥(煉罪獄) 등 여러 가지로 적다가 결국 연옥으로 고정되었다.

연옥이라는 번역어가 성립하는 과정에는 흥미로운 문화적 상상력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푸르가토리움은 정화한다(purgo, purgare)는 의미다. 그것도 불로 정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자어 정화(淨化)에는 불이 아니라 물이 중심을 이룬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죄를 불로 정화한다는 의미를 담으려고 쇠를 불려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쇠 불릴 련[煉]’이라는 글자를 발견한 것이었다. 이처럼 교회 용어의 번역에는 그리스도교라는 원래의 지평에서 나온 뜻과 선교지의 문화사와 사상사라는 또 다른 지평에서 돋아난 낱말이 융합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말하자면 두 지평의 만남과 융합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번역의 문화적 상상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시노달리타스의 번역을 위하여

내 생각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부제를 라틴어로 달았다. ‘번역되어야 할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 transferenda]’라는 뜻이다. 굳이 시노달리타스를 현대 한국말로 번역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자꾸 쓰면서 그 말에 담긴 뜻을 잘 새기면, 그렇게 굳어져서 자연스럽게 통용되지 않을까? 미사, 가톨릭, 시노드, 다 그렇게 해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새삼 번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낱말들 아닌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시노달리타스도 그런 길을 걷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엄연히 한국어와 한국 문화, 한국 사상사에는 그리스도교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좋은 낱말들이 많다. 동반자나 동행과 같은 일반적인 낱말도 있고, 반려(伴侶)라는 말도 있다. 반려는 짝을 뜻하는 참 좋은 말로 흔히 부부를 가리키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인 교회를 신랑과 신부로 묘사할 수 있어 더 좋다. 그밖에 불교에서 함께 수행하는 동료, 같이 길을 가는 짝을 가리키는 도반(道伴)이라는 말도 있다. 시노달리타스의 뜻도 잘 담을 수 있으면서 낯설지 않은 한국어 낱말을 찾아 번역어로 다듬으려는 노력은 한국 천주교회의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내친김에 한 걸음 더 내디뎌 보자. 한국 사상사의 큰 산맥인 원효가 제창한 화쟁(和諍) 개념이 있다. 모든 논쟁과 대립을 화해시켜 조화를 이루는 원리다. 화쟁이라는 낱말을 가져와서 시노달리타스를 화쟁 정신이라고 번역하는 상상을 해본다.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기면 누가 이익일까? 불교 집안에서 보물을 도둑맞았다고 하지 않을까? 그러면 이렇게 달랠 일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인데 네것 내것이 어디 있냐고,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방이 참 많으니 편한 대로 계시고 뭐든지 가져다 쓰시라고.

 

조현범(토마스)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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