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연구소 온라인 화상 세미나
조민아 교수, 코로나19 성체성사와 신앙공동체

코로나 시대, 사회가 종교에 요구한 단 한 가지는 “모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함께하는 미사와 각종 회합이 중단된 비대면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대면 방식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온 교회는 이제 어떤 길을 가야 할까.

대면과 비대면, 그 방식을 넘어 깊이 있게 삶과 신앙을 나눌 수 있는 교회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지 나누는 자리가 마련됐다. 우리신학연구소는 15일 “부서지고 나누며 다가가는 그 몸, 코로나19 성체성사와 신앙공동체”를 주제로 온라인 화상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 발제를 맡은 조민아 교수(미국 조지타운대)는 “모이지 말라는 위기” 속에서 그간 교회가 단일한 정체성으로 강조했던 “한 몸” 비유를 새롭게 사유할 것과 대면과 비대면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세상과 소통하고 서로를 돌보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제안했다.

교회와 “한 몸”이었던 이들, 그리고 “결국 한 몸이 될 수 없었던 이들”

일부 개신교가 “모이지 말라”는 사회의 방역 요구를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한 몸”이란 비유로 동질성이 강조되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 공동체가 강력하게 결속했기 때문이다. 비대면 방식은 그러한 강한 결속을 막는 위기로 인식됐다.

또 “한 몸”이란 비유는 그리스도인이 단일한 정체성으로 내부 결속을 다지며 구성원이 안정된 소속감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자신과는 다른 존재를 혐오하거나 차별하는 근거로도 작용했다. 이는 일부 개신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민아 교수는 이미 미국의 보수적 가톨릭교회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미사가 중단되고 성체성사를 할 수 없게 된 뒤 많은 신앙 공동체가 모임이 가능했던 시간, 몸으로 만나 ‘한 몸’이 됐던 때를 그리워했지만, 그 한 몸 안에서 상처받던 이들,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한 몸에 속하려고 분투했던 이들, 그런데도 결국 한 몸이 될 수 없어 떠나야 했던 이들도 그때를 살갑게 기억할까”라고 물었다.

그는 내부 결속만이 중요해지면 공동체는 안팎을 구분하고 경계를 세우고 자신의 기준을 내세워 강요하는 “죽은 몸”이 된다면서 “몸의 기본 원리는 접촉과 나눔으로, 비대면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늘 타자와 접촉하고 나누며 살고 있고 그러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조민아 교수(미국 조지타운대). (사진 제공 = 우리신학연구소)
조민아 교수(미국 조지타운대). (사진 제공 = 우리신학연구소)

대면과 비대면을 넘는 광범위한 몸들의 접촉
성체성사의 신비, 시공간 뛰어넘어

조 교수는 “몸을 완성된 덩어리가 아닌 끊임없이 생성되고 나뉘고 변화하는 유기체의 조합으로 생각하면 몸과 몸의 접촉(대면)은 일정한 공간에서의 신체적 접촉 외에도 훨씬 미세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우리가 접촉이 아니라고 인식했던 온라인 화상으로 상대를 만나는 방식도 일종의 몸과 몸 사이의 접촉이자 만남이 된다.

그러면서 그는 “한 공간에서 만나, 만지고 어우러지는 접촉만을 참된 접촉으로 간주하고, 그 접촉이 없다면 공동체 내 회합과 관계 형성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대면 외에) 항상 이뤄지고 있는 수많은 접촉의 기회를, 몸의 만남과 나눔을, 함께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관계의 가능성을 무언가 결핍된 임시 방편용으로 치부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사도 요한과 교부들이 강조한 그리스도의 몸도 이처럼 생성, 변화, 접촉하며 살아가는 몸이며, 외부 자극에 늘 열려 있어 나눔을 통한 공생으로 존재한다. 또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의 몸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신자들에게 이어진다고 그는 설명했다. 대면 방식으로만 몸의 접촉이 일어난다고 인식하면 이 같은 성체성사의 신비를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체성사 신학에 드러난 몸의 의미에 따르면, 동질적, 폐쇄적인 몸에 기반해 모든 신자가 한 공간에 모이는 대면 회합으로만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이 규정된다는 기존의 '한 몸'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조 교수는 “집단적 대면 회합보다 안전한 대면 조건을 통해 이뤄지는 작고 지속적이고 일상화된 접촉, 구성원 하나하나가 공동체 내, 외부를 연결할 수 있는 나눔을 통한 접촉이 성체성사 신학의 비전에 더 가깝다”고 설명했다.

시공간을 초월해 살아 있는 예수의 몸은 단일하고 불변하며 고정된 공동체의 모습을 과감하게 뛰어넘으라고 교회에 주문한다. 그는 “대면 문화와 비대면 문화가 공존할 수 없다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비대면 문화를 그저 참아내거나 극복할 대상으로만 여기고 대면을 비대면으로 단순 번역하는 기술적 방식만 고민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동질성과 폐쇄성을 버린 “무위의 공동체”

조민아 교수는 코로나19로 교회가 새롭게 사유할 만한 공동체의 한 본보기로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가 주장한 “무위의 공동체”를 소개했다. 무위의 공동체는 “동일성을 강요하지 않고, 기획과 프로그램의 완수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함께 있음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며, 고착되지 않은 관계로 구성된 열린 공동체”다.

조 교수는 “이러한 공동체가 되려면 기존의 동질적, 폐쇄적인 한 몸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고정된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구성원 간의 불일치와 차이를 감추지 않고 소통하며 밖으로는 공동체의 공간을 지역사회와 공유하는 등 타자를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가 자신의 몸을 부수어 생명의 떡으로 우리 삶에 돌아온 것처럼 서로의 취약함으로 함께 존재하고 타자와 연결된 삶 속에서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공동체가 성체성사적 교회”라면서 “동질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에 집중해 비대면 상태에서도 깊은 관계 맺기가 가능한 방식들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코로나 시대 교회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로 교회가 가장 먼저 선택할 길은 교회가 “자율적, 자발적, 일상적 접촉이 자연스러운 소통의 장소”, “너른 평상과도 같이 열리고 트인 장소”, “머리를 맞대 고민하고 발을 맞추며, 더디고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멈추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장소”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무위의 공동체 불가능? "이상을 품고 시도하는 것은 가능" 

이날 토론에는 왕태언 신부(의정부교구 신앙교육원 부원장), 이미영 소장(우리신학연구소), 황경훈 센터장(아시아신학연대센터)이 참여했고, 신한열 수사(떼제공동체)가 총평했다.

먼저 시공간을 초월해 접촉하는 나눔의 몸으로서의 성체에 대해 이미영 소장은 “성체성사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만 가능했다”면서 “그 합당함에서 배제된 이들, 주일미사에 나올 수 없거나 이혼한 사람, 낙태한 여성 등 거룩하지 못하다고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이들은 스스로 나서지 못하거나 교회가 배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소장은 “교회는 하느님나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존재인데, 완성된 존재라고 인식하면서 경계에 머문 이들을 포용하지 못했고 밖을 향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라면서 “그간 역사에서 하나된 교리를 저해하는 것을 배제해 온 교회가 무위의 공동체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이어 왕태언 신부는 코린토 1서 12장 ‘하나인 몸과 여러 지체’를 들며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는다는 말씀이 정말 가톨릭교회의 지금 모습인가를 깊이 돌아보고, 코로나 이전 교회의 모습이 잘못된 표준화는 아닌지와 교회의 중산층화 귀족화라는 문제도 뼈저리게 돌아볼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왕 신부는 가톨릭교회의 성사는 본래의 공동체성이 있는데 그동안의 성사는 그것을 드러내기에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면서 “고해성사를 제외한 성사들은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더 성대하다고 인식하는 것처럼 우리는 한 몸이란 것을 군집성에서 발견한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어 황경훈 센터장은 조민아 교수가 소개한 ‘무위의 공동체’는 공동체의 목표를 획일화하지 않고, 일치가 아닌 불일치를 드러내는 소통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 등 사실상 실현되기는 매우 어렵다면서 어떤 방법으로 구현될 수 있을지와 교회의 존재에 대한 회의적 시각에도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무엇인지 물었다.

또 그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가 지나치게 수직적 관계인 상태가 유지된다면 평신도의 역할을 찾기가 어렵다면서 “하느님 백성들이 예수님의 생명의 빵처럼 살았는가를 묻고, 21세기 현대인의 심성과 한국 사회를 반영한 전례, 의례를 고민할 때는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무위의 공동체 현실화하기 어려운 공동체이지만 그런 공동체를 이상으로 품고 그러한 모습에 다다르고자 하는 시도까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면서 “무위의 공동체가 가능하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 전파자가 되고 교류하는 평신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답했다.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는 “세상의 폭력적 질서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 교회”라면서 “지금까지 교회는 세상 질서를 좇는 것에 관심을 가졌지만,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다른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주중에 노숙인을 위해 성당 공간을 제공하는 미국 도시들의 사례를 들면서 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해 더 문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 “결이 성근 바구니처럼”
다양한 삶의 이야기 흐르는 공간으로

이 밖에도 무위의 공동체와 공동합의적 교회와의 차이, 다양한 삶을 포용하는 교회가 되는 데 필요한 것, 타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법제화했을 때 문제 등 참가자 질문이 이어졌다.

먼저 무위의 공동체와 공동합의적 교회에 대해 조 교수는 “교회는 결이 성근 바구니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교회가 하나의 목적과 이상으로 묶인다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이상과 목적을 수직으로 내려보내지 않고 다만 틀로서 사람들을 묶어”주면 된다고 답했다.

이어 교회가 다양한 삶을 포용하려면 “교회가 무언으로도 강요하는 모범과 본보기를 벗어나서 평신도 중심으로 다양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교회 공간에서는 수직적 대화 위주지만 온라인의 장점을 이용하면 서로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기반도 얼마든지 있다고 덧붙였다.

윤리적 책임의 법제화에 대해서는 “폭력적 법과 제도에 대해서는 적극 반대하는 것이 신앙인이 자세이지만, 아무리 옳은 제도나 형식이라도 영구적인 것은 없다”면서 “삶의 여러 모습과 다양한 내러티브를 통해 영구적인 것의 한계를 비판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논의에 대해 신한열 수사는 “중심은 있지만 울타리는 없는 교회, 환대의 교회가 돼야겠다고 이해했다”면서 “단지 성체성사만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와 구원의 보편적 성사로서의 교회가 돼야 한다는 것이 코로나 시대가 교회에 던지는 과제이자 질문, 도전이 아닐까.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을 이 시대에서 살아보는 것이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총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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