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맹제영, 한경호, 강신숙, 안충석, 노동준, 이영우, 강현우, 한창현, 오민환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은 지난 5월, “코로나19 이후의 신앙과 삶”을 주제로 특별 좌담회를 열었습니다. "기쁨과 희망"에 실린 좌담회 내용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와 공동 게재합니다. 지면상 요약된 내용이며, 전문은 하단 링크에서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참석자 : 박동호 신부(사회), 맹제영 신부(의정부교구 총대리), 한경호 신부(꼰솔라따선교수도회), 강신숙 수녀(성가소비녀회), 안충석 신부(서울교구 원로사목자), 노동준 신부(이문동성당 보좌), 이영우(서울교구 빈민사목 담당), 강현우(서울교구 빈민사목 담당), 한창현 신부(성바오로회), 오민환(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연구실장)

 

우리는 코로나19를 어떻게 맞이했는가

박동호 : 우선 이번 코로나19와 관련한 사태는 저처럼 사제생활 한참 하던 신부들에겐 정말로 완전히 낯선 환경을 느닷없이 만난 것이거든요. 코로나 사태가 우리 교회 전반에 또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떤 영향 또는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나누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나누실 이야기는 코로나19에 대해 교구별로 또 본당별로 어떻게 대처했는데 그것이 정말로 효과를 낳았는지 살펴볼까요. 임기응변이었지만 적절했다면 어떤 것이 적절했고, 또 부족했다면 어떤 것이 모자랐고 어떤 것들을 보완해야 할는지, 거기서 한번 심각하게 신중하게 따지고 넘어가야 할 것은 뭔지. 그런 것들을 나눠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올해 서품받으신 노 신부님, 이런 상황을 맞이하면서 어떤 느낌이셨나요?

노동준 : 정말 감성적으로만 말씀을 드리자면, 사실 처음 서품을 받을 때부터 약간 불안했어요. 사제서품식(2월 7일) 있던 날도 이미 코로나가 시작되었고요. 그리고 사제서품 뒤에 발령을 받고 본당에 온 지 일주일이 채 안 돼서 미사 중단 결정이 내려졌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한 2주 정도면 그래도 좀 잠잠해져서 다시 미사를 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렇게 한 지도 거의 석 달이 가까워지는 상황에서는 죽음의 이르는 다섯 단계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정도 해봤다가 신천지에 분노도 했다가, “여기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있겠거니 아직 내가 못 찾은 거지 어딘가에는 방법이 있지 않겠나? 하느님께서도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지 않으실까” 하면서 점점 수용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박동호 : 그럼 이번에는 수도회는 어떠셨는지 한 신부님께서 말씀해 주시겠어요.

한경호 : 저는 먼저 오늘 좌담회 질문지를 받아 보고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제가 문항을 만들어서 지인들에게 보내봤어요. 일종의 설문조사를 해 본 셈이죠. 어떤 걸 했냐면, ‘코로나19 이후 우리 신앙인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라는 질문인데, 약 100여 분에게 문자를 돌렸어요.

우선 '개인 신앙생활은 어땠는가?' 두 번째는 '그럼 지금 신앙생활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 세 번째는 '혹시 이 코로나19로 인해 우울감을 느꼈는가?' 물어봤어요. 원래 저희 공동체(꼰솔라따선교수도회)가 매달 두 번을 모이거든요. 동두천, 대전, 부천 등에서 모이는데, 이 모임 자체를 다 없앴어요. 코로나가 중국에서 생기기 시작하고, 한국에서 그 다음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자, 저희 수도회 총장 신부님이 모든 나라에 있는 공동체에서 모임이나 발령이나 이런 자체가 다 금지하셨어요. 저희 수도회는 국제수도회라 그런 쪽으로 결정하신 것 같아요. 이탈리아에 계신 총장 신부님이라 아마 다르게 느끼셨겠죠. 지금도 저희 공동체는 특별한 모임은 안 하고 있고요. 어제 처음으로 그냥 신자 분 몇 분 하고만 미사를 드렸어요. 아직은 신자 분들이 와서 미사를 함께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박동호 : 저는 개인적으로 코로나19가 세상에 미치는 충격과 관련해서 나름대로 북 리스트를 만들었어요. 주로 ‘세계화’라는 주제와 연결해서 읽을 책 목록을 만들었어요. 세상이 1970-80년대부터, 그리고 이른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 나올 때부터 ‘세상이 이렇게 가도 되나?’ 이런 걱정을 많이 했잖아요. 실제로 그런 고민은 2차 바티칸공의회라는 배경도 있고 해서, 사회적 거리 두기의 시기에 그와 관련된 책들을 읽었어요. 신앙생활에선 아주 냉담 수준이었는데, 코로나19가 이 시대 우리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무래도 신부다 보니까 '찬미받으소서'란 회칙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코로나19 하고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종합적으로 생태 차원에서 새로운 성찰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회칙이 시의적절하게 제공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래서 생태·경제·정치 문제나 세계질서 문제를 '찬미 받으소서'에서 보니까 좋은 학습의 기회는 된 것 같습니다.

한경호 : 제가 아까 자체 설문 조사한 내용 중에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그게 '이제 코로나 이후 우리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더니, 젊은 분들은 거의 50퍼센트 정도는 냉담하지 않을까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기도생활 꾸준히 하셨던 분들, 그냥 레지오 단체 같은 곳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분들은 “내 신앙을 다시 뒤돌아보게 되고 더 열심히 하게 됐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렇게 분명하게 두 부류로 나뉘더라고요. 예를 들어 제 또래의 결혼한 친구들 아니면 삼십대 친구들 같은 경우에는 신앙생활에 냉담이 더 많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보면서, 교회가 너무 성사 위주로 된 것 아닌가라는 부분을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성사라 하면 사람들이 긴장하게 되고... 성사 이외에 가톨릭교회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새로운 사태’의 출현, 새로운 차원의 신앙 요청

오민환 : 저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초대교회의 신앙을 생각하게 됐는데요. 초대 교회도 격리된 공동체 아니었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은 다락방에 숨어서, 공포와 두려움에 떨지 않았나요. 또 바오로의 초대교회 공동체 역시 모두 다 자신 있게 세상에 나설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지금 우리처럼 격리된 그런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격리 시간도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사회적이든 물리적이든 격리됐다는 것이, 단지 어떤 단절이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이 신앙과 나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라고 봐요. 이 코로나19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전체적으로 패러다임 전환으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뉴노멀(새로운 일상)의 출현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새로운 차원의 신앙, 새로운 차원의 세상살이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렇게 요청되는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가치로 생각하는 연대와 사랑 그것으로 귀결되느냐 아니면 완전한 자기 봉쇄로 가느냐 하는 결단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각자도생 또는 각국도생 그런 말을 하지만, 결국 해법은 연대와 사랑에 있고, 그 가치는 그리스도교 신앙 본질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박동호 : 지금 말씀하신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보는 게, 서울대교구 임시 사제평의회를 세 번을 했거든요. 갑자기, 세 번 했는데 내용은 이래요.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언제부터 미사를 하는 게 옳으냐? 교구 사제들의 평의회, 의사결정기구에서 코로나19가 우리 사회나 우리 교회에 주는 의미가 뭐고, 사목에서 무엇을 우리가 깊게 성찰하고, 결의를 다지고 준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평의회 참석 사제들(약 40여 명)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는 단지 미사를 안 한다. 그런데 안 할 수밖에 없다고 했고, 두 번째는 그러면 언제 미사를 다시 할까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때는 정부에서 아직 언제 등교할 것인가, 이런 것도 논의하고 결정하지 못했을 때 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결정하는 것을 보고 그때 가서 미사를 재개할지 안 할지 결정하자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5월 들어서 점진적으로 생활방역으로 넘어갈 때였습니다. 국내 확진자 수가 10명 단위로 떨어진 다음에 그때 우리 교구장께선 갑자기 다음 주 수요일부터 미사하자고 하니까, 일선 본당에서는 촉박하고 당황스러웠지요.

 

코로나 사태에 대한 교회의 성찰적 대응이 없었다

오민환 : 그러면 그렇게 긴급하게 사제평의회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뭐지요?

박동호 : 이게 무슨 말씀이냐면, 지금 코로나 상황은 ‘새로운 사태’잖아요. 적어도 우리 교회에는 더 직접적으로 새로운 사태인데, 피부로 닿는 회중, 그러니까 하느님 백성과 함께 하는 가장 상징적인 표징으로서 미사, 그걸 안 하는 비대면의 성체성사, 그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새로운 사태입니다. 그 새로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응할 거냐에 대한 보다 진지한 질적인 고민 없이, 다만 언제 미사할거냐? 미사를 하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 할거냐? 또는 레지오 마리애를 할거냐 말거냐! 이런 거예요. 너무 고민이 없었다는 거죠. 심지어는 사목의 본질과 관련한 것에 대해선 성찰이 없고, 어떻게 하면 교회를 행정적, 절차적. 관료적으로 잘 운영할 것인가? 이게 세 번의 서울대교구 사제평의회에서 보여준 태도였던 것 같습니다. 고민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할 수 있을까, 좀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안충석 : 우리 교회는 시대의 징표에 관한, 그리고 앞으로의 교회 위상과 위기 극복에 대한 성찰과 대응이 전혀 없는 무대응, 무원칙의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상유지만 하는 교회 말이지요.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혼란의 시대에 맥락 없는 사목, 영혼 없는 미사

강신숙 : 저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맥락 없는 사목, 영혼 없는 미사에 관해 생각하게 됐어요. 지금 본당에 있는데, 교구의 지침이 본당에 전달되는데 정말 맥락이 없는 사목이에요.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어떤 맥락을 읽고, 사목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얘기가 정말 너무 크게 나가는 그림일 수도 있는데, 그동안 교회의 모든 사목 체제가 성직중심주의였기 때문에, 항상 사제 홀로 미사 집전하고 성사를 집전하잖아요.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전례 중심으로만 이루어진 거죠. 세상과 맞춰가고, 세상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모든 지구적인 위기를 성찰의 내용으로 끌어들여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교황님이 계속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피부에 와닿는 경고들이 계속 있어 왔거든요.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삶속에서 그러한 것들이 감지되는데, 문제는 신부님들 안에서는 이게 그렇게 와닿지 않는다는 거예요. 늘 미사가 중심이기 때문에, 항상 미사가 중요해요. 그런데 저는 이 미사가 정말 맥락 없는 미사라고 생각해요. 맥락 없는 미사, 영혼이 없는 미사, 미사를 위한 미사 말이지요. 미사 안 하면 큰일 나고, 주일미사 안 지키면 대죄라는 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사고방식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그냥 모든 것이 코로나로 인해 올 스톱이 된 거에요.

안충석 :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정말 이 세상에서 역사적 인물로 살았던 예수님이 바랐던 교회공동체 모습으로 살았나,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핵심 내용인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민낯이 다 드러난 거라 봐요. 주일미사 참례하지 않으면 대죄라면서, 성사 생활만 강조했던 우리 민낯이 드러난 거예요. 지금 본당공동체에서는 신앙생활의 정체성, 핵심은 무엇이고 그리고 또 기도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걸 제대로 가르치는 본당신부나 교리교사가 없어요. 아주 기초적인 교리, 생활교리, 사회교리, 성서공부 이런 교육이 잘 안 되니까 예비자 교리 시간에 배웠던 그 지식으로만 살아갑니다. 그러다 쉬는 교우, 냉담 교우가 되고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의 차이점이 없어지는 거예요.

 

성당 문도 닫고, 마음도 닫은 교회?

이영우 :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은 ‘성당 문을 닫은 것’이었다고 말하잖아요. 우리가 성당 문을 빨리 닫고 사회적 거리를 둠으로 코로나 예방에 타 교회에 모범이 된 부분이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 문을 닫고 미사를 중단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다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신자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노력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코로나19로 고통받고 죽은 분들도 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급식소가 폐쇄됨으로 굶어 죽을 위험에 처한 분들도 돌봐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는 지역인 관악구 대학동에 ‘해피인’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1인 가구가 75퍼센트인 지역입니다. 예전에 고시촌이라 불리던 곳인데 고시가 폐지되고, 고시원과 원룸에 고시에 실패한 사람들과 저렴한 주거공간을 찾아 들어온 중장년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해피인은 식사 해결이 힘든 분들을 위해 점심 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구청에서 급식을 금지했습니다. 2주간 문을 닫았던 해피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도시락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좁고 열악한 공간에서 도시락을 준비하다 보니, 전에 나오던 봉사자들도 꺼리고, 그러다 보니 일손도 부족하고 부식비도 더 들어갔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교회가 전례 때문에 성당 문을 닫았다고 하지만 최소한 봉사자들이 와서 일할 수 있도록 주방만큼은 열어 놨으면 어땠을까. 본당에서 주방을 열어 주고 도움을 준다면 봉사자나 일하는 공간도 여유로워 더 안전하게 도시락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례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웃들에게까지 교회 문을 다 닫은 것 같았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은 더 큰 어려움에 처하기 쉬운데 교회가 다 문을 닫고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코로나 사태에서 교회가 정말 이렇게 어려울 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건가? 도대체 교회의 존재 이유가 뭔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민환 : 가톨릭교회가 통합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직이잖아요. 그런데 주교회의도 그렇고 각 교구도 그렇고 이번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의견을 모아 어떤 일관된 목소리로 종합해 줄 수 있는 분들의 올바르고 명확한 지침이 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 지침이 없어서 오히려 더 각 지역 본당이 더 혼란스러웠던 건 아닌가 싶어요. 이번에 노 신부님이 유튜브 미사를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효과는 있었는지,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유튜브 미사의 효과?

노동준 : 유튜브 미사 효과가 없다고 보긴 좀 어렵죠. 효과가 있었다고 봐야지요. 어떤 청년이 신부님께 유튜브 미사를 청년들한테 해 줬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하게 되었어요. 매일 미사를 찍어서 유튜브에 올렸거든요. 평일미사 같은 경우는 100분 정도 그리고 주일미사 같은 경우에는 제 기억으로는 300-400분 정도가 유튜브 미사를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단순히 그냥 유튜브로 미사를 했다가 아니라, 우리 성당에서는 신자들을 위해서 뭐라도 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시더라고요. 메시지 전달이 가장 확실한 목표였던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이 저한테 말씀하시는 건, 본당에서 손 놓고 있는 건 아니구나. 신자들을 위해서 본당에서 뭐라도 하려고 애쓰는구나라는 거죠. 물론 아까 강 수녀님 말씀하신 것처럼 미사참례가 전부인 것처럼 돼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노력을 했다고 신자분들이 평가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일선 교구청의 고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맹제영 : 교회의 역할에 굉장히 부정적인 의견들이 많으신데요. 코로나 시국에 그동안 교회가 뭐 했느냐, 그러시는데, 사실 교회가 한 것은 있어요. 교회에서 안 모이는 거 자체가 협조한 거예요. 지금은 초유의 사태니까 다들 당황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는 가능하면 정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태도를 보이는 거죠. 그것은 바로 ‘연대’의 반대인(?) 모이지 않는 것, 그 ‘거리 두기’ 상황을 유지하도록 협조를 한 거고요.

저는 코로나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러면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해 봤습니다.

(의정부)교구청 관리국의 경우, 한 달 두 달 이상 미사가 중단되니까 본당과 기관 직원들 월급을 못 주게 되는 상황에 대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본당 사제와 수도자 생활비와 성무활동비 그리고 본당 직원들의 월급 3월분은 교구에서 전액 지원했고, 4월은 어려운 본당만 지원했어요. 그리고 현재 2020년 교구납부금 본당별 탕감 액수에 대한 논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홍보국 차원에서 유튜브 사순 특강을 8차례 진행했습니다. 코로나19는, 사목국 특히 성인 사목, 청소년 사목을 올 스톱시켰어요. 왜냐면 모임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사목의 경우 현재는 온라인 콘텐츠 개발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 상황에서 저희는 사회사목국의 활동에 주안점을 두고자 했습니다.

코로나가 발생하자마자 현시점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은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FOJ(Fighting Overcoming Joining)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극복과 연대를 위해서 우선 ‘FOJ 기금’ 모으기를 지속적으로 시행하려 하고, 현재 그 기금으로 지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어요.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고통받는 분들을 지원하는 사업에 교회가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앞으로 사회사목국의 역할이 매우 커지리라 봅니다. 이런 식으로 나름대로의 각 부서별 국별 업무 분장을 하고 실행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코로나19가 주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한다고 봐요.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사태에 대한 첫 경험, 당혹, 혼란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이제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을 해 나갈 것인가를 준비해야 한다고 봐요. 준비 여부에 따라 교회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나오리라고 봅니다. 현재에 대한 비판은 잠시 유보하고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가, 그 비전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대응이 뭐 워낙 큰 사안, 다시 말해 세계관의 전환 또는 사목 패러다임 전환과 맞물려 있어요. 오늘 논의 초점을 이에 맞춰 봤으면 좋겠습니다.

 

비대면 시대의 사목, 교회는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안충석 : 제가 이번에 묵상했던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 육신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까지 잃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너희는 육신을 죽이는 것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까지 잃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성서 말씀이 가슴에 다가왔지요. 우리 시대의 징표와 교회 위기 극복, 그리고 많은 사람이 절망하고 희망을 잃어가는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세상에 희망의 빛이 되는 역할을 하느냐,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거죠.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신앙생활, 기도생활도 하지 않게 된대요. 매달리는 것도 한계가 온다는 거지요. 지금 우리 사회가 그러한 절망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해요. 그 절망에 이르는 길에 교회가 서 있습니다. 교회는 확실히 위기에 직면하고 있어요.

지금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봅니다. 교회가 장사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성전의 예수님이 될 것인가, 결단의 때입니다. 그릇된 자본주의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몰아낸 주님, 그로 인해 그 사악한 시대에 예수님이 살해된 그 이유와 같이, 우리 시대도 그 어떤 이해 상관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교회공동체가 과연 예수님이 세우시려 했던 그 공동체인지, 진정으로 성찰할 때입니다. 코로나 이후의 교회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좀 그렇게 시작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중세가 끝나고 산업혁명 이후 교회는 계속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겠죠. 저는 그것이 자신의 몸, 생명을 나누어 주신 성체성사 사랑의 실천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 성체성사 사랑의 실천에서 공동체 회복이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각 종교 호감도에 관한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불교 30퍼센트, 개신교 20퍼센트 가톨릭 10퍼센트대에요. 앞으로 10퍼센트 이내로 추락할 수도 있다고 봐요.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신앙생활의 정체성과 핵심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앞으로 다가올 비대면 시대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회가 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코로나 사태 이후로 몸도 마음도 영혼도 다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연대와 평등, 공존의 가치로 재구성되어야 하는 대전환의 역사적 시기입니다. 세상은 이런데 우리 교회는 스스로 성전의 장사꾼이 된 것은 아닌지, 교회가 자본주의 돈의 논리로 돌아가고, 교구의 사제 인사는 사목적인 인사여야 하는데, 세상의 논리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누구는 교회가 사회보다 더 썩었다고 합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대책만 해도 그렇지요. 사회가 하는 절반만큼도 교회가 대응을 안 하고 있어요. 무대응이 상책인가. 이게 교회의 모습은 아니죠. 교회는 나름대로 계속 대응해야 해요. 교회는 어떻게든 손을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박동호 : 맹 신부님께서 “코로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 연대의 고리를 끊었는데, 거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연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잠깐 말씀하셨는데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태도로 더 연대할 것인가? 그럼으로써 어떻게 교회의 교회다움을 되찾아 갈 것인가, 이런 관점에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이후 교회의 사목, 교회의 영성, 그리고 교회의 길

맹제영 : 예, 무슨 얘기냐면 코로나19가 도대체 뭐냐? 아까 박동호 신부님께서 '찬미받으소서'를 말씀하셨는데, '찬미받으소서'의 배경에는 ‘기후온난화’라는 거대한 틀이 있는 거지요. 기후온난화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지구가 인류에게 백신을 뿌린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해도 인류가 말을 안 들으니까 코로나19라는 새로운 백신을 지구가 작동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구는 자기방어 체계를 작동시킨 거라고 생태학자들은 해석하거든요. 그런 커다란 관점에서 볼 때 ‘코로나’, ‘지구온난화’, ‘찬미받으소서’ 셋은 깊이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지구의 코로나19라는 백신에 대응해 인간의 백신도 작동해야 하는 건데, 생태학자들은 백신엔 크게 3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코로나19에 대한 의학적 백신, 두 번째는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행동적 사회적 백신, 세 번째가 자연과의 거리를 두는 ‘생태 백신’입니다. 그래서 인간 간의 자연과의 거리 두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삶의 자세이며 이 3가지 백신이 앞으로 인간이 새로운 사태에서 취할 중요한 방법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란 행동 백신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관계를 재검토하라는 말이지요. 인간관계에서 타자에 대해 자기 욕망대로, 자기 식대로 막 치고 들어가는 게 굉장히 많잖아요. 그것이 교회에서 드러난 것이 ‘수도자의 정결’이거든요. 거리 두기를 할 때 어떤 사람과는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요. 가정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내가 거리를 둘 사람과 거리를 둬서는 안 되는 사람, 그렇게 거리 두기를 조절하고 절제할 줄 아는 영성과 삶의 방식이 앞으로 요청되는 것이고, 사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표현된 게 ‘정결’이라는 덕목으로 보이거든요. 포르노에 감염된 젊은이들이 뭐 ‘정결’이란 덕목을 얘기하면 콧방귀 뀌지만, 앞으로 정결이라는 덕목은 아마 굉장히 중요하게 부각될 겁니다.

‘생태 백신’에서는 이제 인간이 자연과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 거죠. 이제 인간은 자본 축적을 위해 자기욕구, 자기욕망대로 자연을 무한 착취하는 이런 문명과 삶의 방식과 결별을 선언해야 합니다. 수도자들이 말하는 ‘가난’이라는 덕목, 곧 자연으로부터 정말 필요한 만큼 취하는 것, 필요 이상의 것은 나누는 삶의 방식인 이 가난의 덕목이 앞으로는 굉장히 강조될 것 같고요.

마지막으로 애프터 코로나 시대에는 계속 가난한 사람들이 발생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여태껏 인류 역사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최소한 4-6억 정도의 가난한 사람들이 지속해서 발생할 것이라 해요. 교회가 이런 정결과 가난이라는 영성적 삶을 기초로 해서, 앞으로 계속 증가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온전한 선택과 투신, 이것이 그야말로 ‘순명’이라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이것이 우리 교회가 더욱 힘을 모아야 할 측면이 아닐까라고 봅니다. 이와 같이 정결과 가난, 그리고 순명이라는 큰 틀 안에서 교회가 전체적으로 자신을 반성하고 코로나 이후의 사목적 틀을 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팬데믹의 시대, 사목의 주체, 권리, 책임은 교회구성원 모두에게

강신숙 : 이 좌담회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그동안 당연하게 이루어졌던 대면 사목에서 비대면 사목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자리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주제가 흥미를 끌었습니다. 저도 본당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신자들의 고충을 지근거리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대면 사목에 솔깃했던 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수 개월의 시간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교회가 해나가야 할 것은 대면이나 비대면과 같은 사목적 기술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좀 더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물론 효과적인 비대면 사목의 개발도 중요하지만, 지금처럼 사목적 주체나 권한이 성직자에게만 몰려 있고, 나머지 계층들은 모두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교회 구조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사태가 발생하면 또다시 무력감으로 빠져들 거예요. 악순환인 거죠. 그래서 비대면 사목보다 더 효율적인 것은, 신자들이 자기 신앙생활의 주도권을 갖고 스스로 신앙생활과 미션을 모색해 나가는 힘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저는 평생 ‘아이’로 늙게 하는 현재의 구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교회를 ‘야전병원’이라는 이미지로 등장시켰을 때부터 이미 '찬미받으소서' 회칙은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교황님의 목소리는 세상의 가장 ‘긴박한 사태’에 맞춰져 있어요. 기후위기든 코로나19이든 모든 형태의 위기상황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들, 배제된 자들, 노약자나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보호를 촉구해 왔지요. 그러나 우리 중 다수는 이런 사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숨을 고르면서 이런 사태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는지를 성직자와 신자들이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사목자들만 모든 책임을 떠안고 고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위기 때는 모두가 나서서 함께 동참하고, 모색해 나가는 동반자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어떤 팬데믹이 닥친다 해도 인간은 서로가 연결된 끈을 놓지 않습니다. 교회공동체는 이 끈에서 탈락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지금보다 더 촘촘하게 연결하고 연대해 나갈 수 있도록 중재하고 이어 주는 가교역할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팬데믹은 인류에게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 것을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욕망의 사슬을 당장 멈추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함께 모색하고 전력을 다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복음적인 사목’이며, 이런 사목의 주체와 권리, 책임은 어느 계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 구성원이 함께 지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직자, 평신도, 수도자들이 과거식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만 이번처럼 무능하고 무기력한 행태를 반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전시 중에는 모두가 한 가지 사실만 걱정해야 합니다. 생태계를 복구하고 기후위기를 멈출 방도를 찾는 것, 이것이 사람을 살리는 사목의 최대 과제이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사와 성사생활은 이런 복음적 과제를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표징적 도구로 혹은 진리의 안내자로 남게 될 것입니다.

한경호 : 코로나로 이탈리아에서 많은 분이 돌아가셨고, 우리 수도회 신부님들도 돌아가시고 계시거든요. 브라질에서 함께 일했던 할아버지들도 본국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돼서 돌아가셨어요. 매일매일 사망자 수를 보는데 이탈리아에서 3만 명이 넘었다고 하죠. 패닉에 빠졌어요. 저희 수도회가 양로원도 운영하는데, 거기에 정말 간호사들이 안 오는 거예요. 왜냐면 요양원에 가서 사람들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고, 간호사들이 자기가 감염될 수 있다면서 겁을 먹는 거예요. 총장님께 이런 현실에 관해 편지를 쓰면서, 선교사로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물었어요. 

얼마 전 나이로비 난민촌에 사시는 신부님이 계세요. 나이로비 수도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난민촌이 있는데, 사람들이 코로나로 겁이 나다 보니까 거기 천막을 공격을 해버렸어요. 일종의 혐오 같은 거죠. 또 빈민촌도 굉장히 어려운 상황인데,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면 경찰이 아니라 일반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죠. 악순환만 계속됩니다. 그곳 선교사에게 기자가 “이 상황에 선교사로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물었어요. 선교사는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고 그들을 버려 둘 수 없고 어떤 방법을 찾아서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우리 총장 신부님도 저희들에게 그런 비슷한 얘기를 해요.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도망가지 말라! 우리에게 용기를 가지고 기도하라!” 왜냐하면 저도 좀 그랬어요. 인천교구 같은 경우 사제 분들이 다 돌아왔어요. 공부하고 유학하던 분들이 거의 몇 명 빼고는 다 돌아왔어요. 박사 학위 거의 끝나는 분들도 남아 있을 수 있지만, 다 돌아왔어요. 그게 참.... 한편으론 이해도 되지만, 오지에 있는 우리 선교사분들은 안 나오거든요. 남아 있거든요. 그리고 또 개신교 선교사 분들 있잖아요. 결혼하신 분들, 그분들은 지금 우간다 상황이 아주 안 좋은데 그곳 사람들을 위해서 남아 있어요. 그 사람들을 돕고 있어요. 그거 보면서 조금 부끄러웠어요.

박동호 : 사회적 거리 두기를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거리 두기를 합니다. 자기 맘에 드는 사람과는 밀착, 자기 맘에 안 드는 사람과는 배척, 뭐 이런 거죠. 이제 그런 배경에서 나하고 같이 지낼 사람하고는 똘똘 뭉치게 되고 불편한 사람은 밀어버리는 현상, 부정적으로 이렇게 또 진화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중복된 얘기지만, 이참에 코로나 핑계를 대고 성당 안 갈까? 가 봐야 뭐 재미도 없고 기쁘지도 않고, 그냥 대충 그렇게 지내는 것보다 그 시간에 다른 데 가서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지금 코로나가 그렇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거 같아요. 거리 두기 때문에 성당엔 안 와도 회기역, 이문역 근처 술집은 버글버글하거든요. 그러니까 감각적으로 더 끌리는 쪽으로 가는 거죠. 아까 한 신부님 말씀 들으면서, 나이로비나 이탈리아 선교사들은 그냥 거기에 함께 계시는데, 우리는 왜 그랬을까. 우리는 그걸 못 느낀 거죠. 우리 사회는 제3자를 통해서 감동적인 이야기로만 들은 거죠. 이게 느낌이 다른 거예요. 우리는 뭐랄까 모범이 없어요. 우리 내부에 말하자면 예수님 같은 삶을 살았던 누구, 사회적 약자에게 온전하게 투신했던 누구, 그 모범 사례가 글로만 남거나 이야기로만 전달되지, 실제 모델이 그만큼 없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스스로도 그런 모범이 되도록 정말 고군분투해야겠지만, 모범을 찾아내는 일, 소박하지만 일상에서의 교우든 수도자든 신부님이든 고위성직자든 평신도든 아니면 신자가 아니든, 정말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자꾸 노출되도록 하는 것도 큰 차원에서 필요하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익숙함과의 결별, 그리고 선언이 아닌 실천을

오민환 : 우리의 신앙은 너무나 익숙한 것에 의해서 익숙하게 길들어 있습니다. 일반 신자들은 어떤 좌표를 잃고, 수도자나 성직나나 우리와 크게 다를 게 없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단 말이죠. 이것을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본당 신부님은 사목회 임원 몇 명만 모아 놓고 따로 미사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헌금도 내게 하고, 그러면서 신자들에게 본당 재정이 어쩌고저쩌고 돈타령하면서 하소연하고요. 사정은 딱하지만, 이건 정말 약속 위반이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씁쓸해지고, 교회가 자본주의화 되어 가는 모습을 이번에 확인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더 본질적인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어요. 사목자들은 더 고심이 많으시겠지만, 아무튼 신자 없는 교회를 진지하게 고민하셔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안충석 : 아까 한 신부님이 아프리카 난민촌에 남은 선교사 말씀하셨는데, 돌아가신 이태석 신부님이 생각났어요. 48년의 짧은 인생을 살다간 이 신부님에게 기자들이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 많고 할 일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 남수단 톤즈로 가느냐고 물었대요. 그랬더니 이 신부님이, 십 남매를 기르신 내 어머니 모성애, 내리사랑을 보고 배웠고, 어머니 사랑의 향기에 이끌려서, 그리고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는 그 말씀 하나 때문에 아프리카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들 잘 아시는 로마 시대 때 베드로가 무시무시한 박해를 피해 도망가다 예수님을 만난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베드로가 “쿼 바디스 도미네”(주님 어디 가십니까)라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버린 양들을 구하러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러 로마로 간다”고 답하시지요.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로마로 돌아가 순교합니다. 이 코로나 시대에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교회여, 그때 너 어디 있었냐” 물을 겁니다. 그때 “나도 같이 코로나를 극복하려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강신숙 : 제가 언급한 요지는 어떻게 하면 교회 구성원이 함께 위기상황을 풀어 나갈 수 있을까를 말씀드린 건데요, 이 질문은 사실 ‘공동합의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도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를 논의해야 하는데 어떤 계획이 있는지 생각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교회 구성원이 함께 모이는 일이 교구차원이라든가 시노드는 한계가 있습니다. 신부님들도 고민은 하겠지만 항상 기존 사목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더 외연을 넓혀서 새로운 각도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더 많은 상상력으로 동력과 시너지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지 하는 겁니다. 본당 신자들도 자신들이 지금껏 해왔던 루틴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렇게 고착된 기계적 사고를 깰 수 있는 방법들을 논의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장이 펼쳐질 수 있다면 신부님들도 함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사목의 리더십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걸 사목의 수평적, 혹은 생태적 이동이라고 할까요. 회심이라는 것은 이렇게 이동해 나가는 것이지, 단지 기존의 것을 유지, 보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신자들이 곧 복음적 주체요 선포의 주체라는 사실을 깨치고 일어섰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신부님들은 교회공동체에 굉장히 좋은 자원이라서 얼마든지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고 또 그런 역량이 있다고 믿습니다. 만일 ‘공동합의성’이라는 장이 열리면 현재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감이나 자극을 얻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합니다.

 

‘공동합의성’, 실험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오민환 : 독일의 예를 들면요. 독일은 ‘우리가 교회다’(Wir sind Kirche)라는 평신도 단체가 있어요. 교회 내 일종의 시민단체라 볼 수 있는데, 이 단체를 제도 교회가 쉽게 보지 못해요. 그러니까 교회 개혁과 쇄신에 관해 계속 제안하고 그 실현가능성에 대해서 탐색하고 요청하니까, 제도 교회에 쪽에서 보면 불편하기도 하지만, 이 단체의 의견을 쉽게 묵살하기도 어렵습니다. 또 그러면서 독일교회는 ‘가톨릭의 날’(Katholikentag)이라 해서 2년마다 독일의 도시를 돌아가며 열립니다. 전 교구 신자들이 다 모입니다. 벌써 100회를 넘겼어요. 거기서 교회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수렴됩니다. 우리도 그런 기획이 필요하다고 봐요. 하여튼 수녀님이 말씀대로 교회가 성직자 중심으로 모든 것이 다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는 내부의 힘이 없어요. 그 자리에서 성직자들이 한 발 빼 주거나 아니면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없다는 말이죠. 

독일 교회가 진보적 신학을 수용했던 이유는, 그만큼 교회의 위기가 심각했던 거죠. 독일 교회의 위기는 바로 유럽 교회의 위기였는데, 1968년 유럽 혁명, 소위 ‘68혁명’ 이후로 교회는 사회의 급진적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반전운동, 사회주의 물결, 동성애 문제, 교회 내 각종 스캔들 문제 등등 교회는 탈출구를 찾기 힘들었고, 독일교회는 시노드를 개최하고 진보적 신학사상을 수용하면서 교회의 희망을 찾습니다. 교회 구조의 쇄신과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지요.

박동호 : 고민은 뭐냐면, 그렇게 개혁을 시도하고 반성했는데 교회가 살아났느냐는 거죠? 말하자면 그 대처가 늦은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점에서는 응답이 적절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독일만이 아니라 유럽의 68혁명 이후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그 친구들이 벌써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도 안 돌아와요. 무슨 말이냐면 그러한 시도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게 아니고 시의적절하지 못하고, 때를 놓쳤을 때 혹은 패러다임이 바뀌었는데, 그에 대한 응답이 나오지 않았을 때 생기는 일이죠. 교회의 응답이 혁명적이려면 진보적이든 쇄신과 개혁을 말하든 세계관, 교회관 자체를 바꿔야 해요. 어폐가 있지만, 영국성공회는 살아남았잖아요. 영국성공회는 여성 주교님도 나오고 여성 신부님도 나오고 그랬잖습니까. 다시 말해 응답을 할 때는 말이지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일 수 있다. 그리고 절대적이진 않지만, 응답을 정말 잘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새로운 신앙의 패러다임을 위한 불씨, 그리고 균열

한창현 : ‘비대면 사목’과 관련하여 사회적 거리 두기와 온라인 전례에 익숙해진 신자들이 코로나 이후에 전례 참여를 등한시할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형태의 신앙생활이 등장함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성당에 나오는 신자 수가 감소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일상에서 신앙생활을 충실히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적 신앙생활의 형태를 제시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영상으로 미사를 보는데 익숙해지면 신자들이 느끼는 미사의 가치가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미사를 보는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하루 중에 편한 시간에 동영상 관람하듯이 미사를 시청하는 것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영상 미사 시청이 미사 자체에 대한 가치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면밀한 접근이 필요해 보입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들에 균열을 내는 작업이 현실적으로 적합한 출발점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개신교의 경우에는 온라인 예배의 가능 여부를 두고 신학자들이 끊임없이 논쟁합니다. <CBS>에 나와서도 싸우고 유튜브에서도 계속 싸웁니다. 신자들은 데모도 하면서 예배와 관련된 기존의 이해에 끊임없이 균열을 냅니다. 그런데 우리 천주교에서는 온라인 미사가 맞다 틀리다, 그런 고민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가 온라인 미사의 적합성 여부를 신학적으로 논쟁하였다면 그 자체로 불씨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만일 온라인으로 미사를 드리는 것은 잘못됐다고 문제를 제기한다면, 이거 자체가 미사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지는 질문으로는 함께 모여서 미사를 하는 것만이 참된 전례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 들여온 사실입니다. 여기에 균열이 생기면, 우리는 왜 모이는 걸까, 누가 모이는가, 등등의 여러 질문이 따라서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불씨를 지필 수 있다면, 정말 오늘날 필요한 전례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까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다음에 가서야 방송 미사가 익숙해진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신앙생활이 형태를 고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현우 : 코로나 사태 발생 이후 몇 달간 무력하고 우울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하게 자괴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삼양동 선교본당 지역 노인들을 방문해 보기도 했는데, 할머니들께서는 그런대로 견디십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들께 너무 힘들어 하십니다. 그분들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만남의 자리가 필요한 것 같고요. 오늘 이 자리에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빈민사목의 현장은 더 만나고, 더 함께 하는 실천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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